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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리스 Aug 22. 2016

ㄱ. 견우와 직녀 이야기

(6) 1(산이 아버지)+2(솔이와 산이)+3(마을 사람들)=6(마을)

 산이 마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솔과 자주 만났던 곳이었다. 솔가지나 하나 꺾어갈 생각이었다. 여유 부릴 수 없다는 조급함이 마음을 다그쳤지만 그래도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다. 평평한 바위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고 있었다. 흐릿함 속에서도 붉은색 댕기가 보였다.

  '여기다 묶어두고 두고두고 보자. 나중에 누군가 발견하면 마을 전설로 만들지 뭐, 좋지?'

 겨울에 눈에 파묻혀 주변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을 때, 솔이 자신의 댕기를 끌러 산과 같이 묶어놓은 것이었다. 전설은커녕, 묶어둔 다다음날인가 누군가 발견해버렸던 터였다. 어물쩡 넘어갔지만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산은 붉어지는 귀를 숨길 수 없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었다. 솔가지 말고 이것이나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은 손으로 부드럽게 댕기를 감쌌다. 뒷면에 검은색 글씨 같은 것이 보였다. 기다릴게, 건강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여기도 저기도 기다린단다. 장마가 끝났을 시기인데도 비가 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산은 서둘러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이고, 아무리 그래도 보내버리면 어떻게 해."

 친한 사이 아무리 혀를 차도 산의 아버지는 빙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차라리 같이 가지, 라는 말에 그 생각도 해 보았으나 곧 떨쳐버렸다. 비가 오는 것 빼고는 큰 걱정은 없었다. 그저 잘 있는지 어디쯤인지 조금 궁금했다. 애써 아직은 보고 싶을 때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보내자마자부터 곁이 허전했었다. 어린 새도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을, 산도 자기가 있을 곳으로 가는 게다. 살아남았다고는 하지만 별 활기 없는 마을에서 그는 점점 과거를 더듬는 일이 많아졌다. 사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저 지나가다 왔다기엔 지나치게 깊은 마을에 온 사람에게, 산이 태어나고 애 엄마가 죽은 날, 들었던 말부터 이상했었다. 그깟 말 따위, 하며 잊었지만 지금은 조금 무서웠다. 해줄 수 있는 건 어디서 들은 대로 신발을 바꿔 신은 것 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았고, 종종 나무를 깎아 지팡이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물어도 여름이라서, 아직 장작이 충분해서, 같은 이유를 대며 말을 돌렸다.


 길을 가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었지만, 지금은 뭔가라도 튀어나왔으면 했다. 새들도 잘 안보였다. 왠지 조금씩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걸어가는데 비 때문에 흔적이 많이 지워져 불편했다. 아버지가 가끔 말하는 노안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긴 거리를 한 번에 움직여 본 것도 거의 없었던 듯했다. 조금씩 지쳐갔다. 언제까지 가야 해, 산은 목덜미의 물기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허리를 뒤로 쭉 폈다. 아주 오랜만에 피는 허리 같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았다. 그러면 시야를 가리는 이건 빗물이 아니라 땀이었다. 옷깃으로 대충 얼굴을 훔쳐내었다. 저쪽 멀리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번뜩 머리가 맑아졌다. 드디어. 날듯이 빠르게 걸었다.

 중간에 마을 사람들이 아니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림새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마을 사람들 아니면 다른 마을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동네 사람들은 산을 보자 굉장히 반기며 몸은 괜찮은지 왜 혼자 왔는지 등등을 물었다. 발이 퉁퉁 부었네, 하며 챙겨준 것은 손이 크기로 소문난 아주머니였다. 용케 어린애들도 잘 따라온 듯했다. 그동안 별 일 없었고 여긴 잠깐 머무르는 곳인데 진짜 마을은 좀 더 가면 있고, 그 마을에선 자리가 부족해 여기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산은 마을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솔의 아버지였다. 보자마자 알았다. 솔이 그동안 말한 대로 눈썹과 턱이 똑같이 생겼다. 솔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아 반가웠다. 별로 할 얘긴 없었다. 그냥 마을이 다시 안전해졌고 여기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저 아랫마을에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전하자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크게 도움받은 것도 없었고 어떤 애들이 그 얘기를 들어봤다는 말을 해서 또 바뀌었다. 소식이 갔다면, 굳이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산이 쉬어야 하지 않냐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산은 괜찮다고 했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업어줄까? 하며 놀린 탓도 있었다. 대신 중간까지 길잡이는 다른 사람이 하기로 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것이라 지름길보단 산을 완만하게 타는 것이 낫다는 결정대로 가기로 했다. 아랫마을에 있을지도 모르는 동네 사람을 부르러 가고, 다들 짐을 챙기는 동안 산은 눈으로 솔을 찾았다. 저쪽에 부모님과 같이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산은 주머니에서 댕기를 꺼내 흔들며 씩 웃었다. 누가 뒤통수를 쳤다.

  "야, 티 내지 마, 부러워서 못 봐주겠네."

  "부러우면 보지 마, 누가 보래?"

  "됐고, 이따가 앞쪽에 서. 뒤쪽보다 챙기기 쉬우니까. 그리고 동네 사람들 다 아니까 티 내지 말라고."

  "다?"

  "어 다 아니까 모르는 척해줄게, 둘이 같이 가."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달라 보였다. 아버지도 알 거고 솔의 부모님도 알 거고- 맙소사. 아까 아저씨가 날 꿰뚫어 보는 것 같이 느껴졌던 눈빛은 눈매 때문이 아니라 감히 솔에게 접근한 녀석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던가. 어떻게 보였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길잡이가 이동한다고 외쳤다. 쉬다가 다시 걸으니 발이 느낌이 이상했다. 다 안다고 했으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조심스레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솔에게 다가갔다. 저 시원하고 예쁜 웃음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이리될 줄 짐작하고 있었다. 빙글, 말도 안 되지만 웃음이 나왔다. 아래로 흐르는 물이 다음 닿을 곳은 예상할 수 있지만, 지났던 곳을 다시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떻게든 잘 지낼 것이었다.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은 지켰다. 이제 기다리겠다는 말을 지켜줄 때가 된 것 같았다.


 길잡이가 길을 멈춰 세웠다.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자 확실하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어떡해애,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어떤 사람이 주저앉아버렸다. 산에서 만난 또 다른 무리, 이게 도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천천히 애들과 여인, 노인들을 가운데로 모으며 둘러쌌다. 무기로 쓸만한 건 별로 없었다. 다들 돌멩이를 몇 개씩 들고 주머니에 모래를 담아 마주치기를 기다렸다.

  "이쪽입니다!"

 큰 소리가 나자마자 사람들 고개가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외침 소리를 따라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이 무기를 겨누었다. 흠칫, 돌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저쪽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물었다.

  "무엇하는 자들이냐?"

  "도적떼 소식에 잠시 몸을 피해있다가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오."

 누군가 말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눴다. 아까 그 아랫마을에 도움을 주러 가는 길이랬다. 그리고 우리를 일부가 호위해주겠다는 이야기.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는 일에 동참했다. 누구네는 아래 살아서 도움이 빨리 가고 누구네는 도움이 늦어서 동네 전체가 이사를 가야 하는지 좀 억울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훨씬 더 밝아진 분위기로 출발하는데 다시 비가 똑똑 떨어졌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네요, 같은 별 실없는 얘기까지 하며 솔과 마음 편히 수다를 떨었다. 비가 조금 굵어지는 것이 시원했다. 솔을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었다. 비는 반가운 사람을 부르나. 이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돌아가면, 아버지도 뿌듯하게 여기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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