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모든 것을 마무리하며, 사랑해요.
아무리 완만하게 길을 탄다 해도 결국 숨이 차오르는 구간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갈게요. 어디 가지 마시고 여기에만 있어야 돼요."
길잡이가 휴식을 알리고 나서야 다들 다리를 두드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기지개를 켰다. 올라가야 할 곳이 꽤 높아 보였다. 마을 사람들보다 호위하는 군졸들이 더 문제였다.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옷 무게부터 엄청나 보였지만 사람들이 짐을 들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터였다. 그래도 저 정도로 티 내지 않고 버티는 게 대단했다. 그치는 것 같던 비는 계속 내렸다. 솔과는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마을 소식 같은 이야기들은 이미 다 떨어졌고, 솔의 부모님과 온 동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곳에서 간지러운 말을 할 정도로 담이 크질 못했다. 조용히 빗방울이 흙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산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산에서 굴러 떨어진 게냐."
"하하······."
말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주 무서운 악몽을 꿨어요, 이 나이에. 발을 헛디뎠는데 잡았던 굵은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어요, 한여름에. 일단 왜 산에 올라갔는지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칠석 즈음엔 다들 일부러라도 늦게 일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니, 어쨌든 길게 보면 차라리 다행이지 않더냐."
"예?"
"누가 우리에게 마을이 안전해졌다고 알리러 올 수 있었겠니."
생각해보니 또 그랬다. 마을 전체가 외지에서 큰일을 겪을 뻔했다. 콧잔등에 똑 떨어진 빗방울이 잘했어,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은 조금 더 쉬고서 다시 출발했다. 산이 비를 먹어서 부드러웠다. 이건 좋은 게 아니었다. 잘못 디디면 작은 돌이 흙덩이와 함께 쓸려내려갔다. 먼저 오르던 사람들이 뒤에다 조심하라 외치는 소리가 잦아졌다. 거의 다 와서, 조금은 더 편해질 수 있는 마음을 잔뜩 졸여야 했다. 산은 잘근잘근 입술을 씹는 솔을 도닥이며 앞세웠다. 솔의 부모님이 보고 있었다. 절대 무슨 일 안 날 겁니다, 산은 속으로 다짐을 건넸다.
가야금을 뜯는 손에 맺힌 핏방울은 줄을 적시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만 물러가거라, 하는 소리에 연주자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견우님?”
견우는 그와 가벼운 인사말을 나누고 방금 닫힌 문을 다시 열었다. 염라대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빙긋 아는 체를 했다.
“왔구먼.”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실은 처음이지, 안 그래?”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으로 끝난 건가요?”
지금까지로 봤을 때 끝이 맞았다. 하지만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남았다. 아까부터 드는 미묘한 초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왜요, 왜 멈춰요?"
"무슨 일인데요?"
앞에서 가던 사람들이 멈췄다. 그것도 마을 바로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간간히 작은 비명도 들렸다. 앞에 있던 솔도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입을 가렸다. 으억, 하는 큰 소리에 깜짝 놀랐다. 누가 쓰러졌단다. 아이들 몇이 울기 시작했다. 산은 중간에 서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받아 올리고 있어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산, 산, "
솔이 급하게 산을 불렀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거기 무슨 일이에요?"
"산, 여기 우리 마을 맞아?"
그럼요,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멈췄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했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자리를 넘기고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아 아버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을 저쪽까지 너무 잘 보였다. 까맣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집이 있어야 할 곳엔 집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 흔적만이 남았다. 조금 앞에 장승 두어 개가 절반쯤 타다 그을린 채로 뒹굴고 있었다. 가늘더라도 비가 오는데 아직도 검은 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미안해할 정도로 산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마을 가에 있던 나무들이 까만 밑동과 까마귀 시체 같은 조각을 남겨두었다. 기다리신다면서요. 목이 꽉 막혔다.
"도적떼들이 지나갔나 봅니다."
"아뇨."
한 군졸이 작게 말을 건넸다. 알아요,라고 하려고 했지만 나온 말은 단호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정적 속에 들리는 것은 울음소리밖에 없었다. 도적이면, 물건만 가져갈 것을, 어째서. 솔이 뒤에서 안는 게 느껴졌다. 배에 힘이 들어갔다. 솔이 등에 얼굴을 대고 흐느끼고 있었다.
"산, 이거 진짜야?"
"아뇨, 아닐 거예요."
곧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저번에도 꿈이었잖아. 허벅지를 꼬집고 손등을 꼬집고 뺨을 쳐도 깨질 않았다. 다 해진 신발을 벗어던졌다. 기다리신다면서요. 사람들이 산에게 왔다. 분명히 비껴간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그건 힐책이 아니었다. 결국 울음에 파묻혀 산도 울음을 터뜨렸다. 비가 갑자기 거세졌다. 장대비를 맞으며 아픈 줄도 모르고 울었다. 발이 질척거렸다. 그리고 뒤쪽이 요란해졌다. 뛰어! 소리에 사람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움직이는 바람에 발이 꼬여 우르르 넘어졌다. 군졸들이 무기를 맞대고 있었지만 상대가 되기엔 너무 적었다. 아직 가지 않은 놈들인 것 같았다. 충격에 주변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고 빗소리에 귀가 어두웠었다. 으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빗소리를 뚫고 울리는 굉음을 들었다. 거대한 바위가 나무들을 꺾으면서 길을 내며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작은 바위들도 같이 굴렀다. 흙이 뒤따라 쓸려내려 왔다. 가장 뒤쪽에 있던 이들부터 깔리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솔을 감싸 안았다.
월하노인은 옥황상제가 자신을 항상 곁에 두었지만 늘 지켜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해와 달이 자리를 바꿀 때, 옥황상제는 다른 곳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매듭 없는 붉은 실을 묶기엔 부족했지만 도움을 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늘에 있을 때부터 자주 놀러와 말벗이 되어준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방법은 많았고, 월하노인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가 선택한 산의 아버지는 월하노인이 내리는 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많았다. 그 꿈을 어찌 여길지는 몰라도 저번에 만나봤을 때를 생각해보면 믿음이 갔다. 그대는 내 축복하리라.
견우는 직녀를 꼭 끌어안았다. 땅에서 몇 번의 삶을 다시 살면서, 못 알아볼까 걱정했었다. 마지막으로 산이란 이름을 털어버리고 다시 직녀를 마주했다. 뱃속이 이상했던 것은 초조가 아니라 설렘이었나 보다. 직녀는 눈물을 글썽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정말 보고 싶었어."
봉수대는 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렸고 결국 마을은 그대로 지워졌다. 남은 사람은 없었다. 큰 소동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람들은 산을 넘고 넘어 다른 곳으로 왔다.
"하늘이 노했어, 신성한 날에 마을을 떴다고 그런 게야."
직녀를 모시는 마을이 한둘도 아니고, 들어본 적 없는 외딴곳에서 와서 그런지 알지 못하는 얘기들이 꽤 있었다. 그런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근거 없는 얘기란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면 쉽게 떠나지 않는 법이었다. 소문은 여행자들을 통해 멀리까지 퍼졌고, 사람들은 칠석날이면 경건하게 직녀성과 견우성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직무유기로 쌓은 업을 모두 지우고 직녀와 견우는 옥황상제에게 약속을 해야 했다. 덕분에 직녀는 예전처럼 다시 베틀을 잡고 견우는 소를 쳤다. 한동안은 땅에서 있었던 일을 얘깃거리로 삼아 수다를 떨었다. 행복했다. 하늘에서 다시 만나고 다가온 첫 칠석날, 까마귀과 까치들은 축하해주며 떠났다. 이젠 정말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됐는지, 처음에 조금 남아있던 불안한 마음은 점점 사라졌고 점점 다시 일을 뒤로 미루는 일이 많아졌다. 종종 땅에 놀러 갔다 오기도 했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걱정에 이래도 돼? 하고 하나가 물으면 다른 하나는 괜찮아, 라며 넘어갔다. 옥황상제는 이제 맘을 놓아도 되겠거니, 했으나 견우와 직녀가 곧 다시 놀기 바쁘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상제님을 뵙습니다."
옥황상제의 부름을 듣고 와 가벼운 절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불편했다. 잘못이 있는 줄은 알고 왔다. 이번엔 무슨 일이려나. 마음 저 깊숙한 곳에는 다시 땅으로 가야 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뭉글 거리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직녀와 견우는 그동안 겪은 벌로도 깨닫지 못하고 보살펴야 하는 것들을 등한시해 원성이 여기까지 올라온다. 그렇기에 다시 벌을 내리노라. 이전에 그랬듯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갈라져 지내도록 해라. 기한은 없다. 내가 다시 부르리라. 물러가라."
"차라리 다시 땅으로 내려보내심이 어떠합니까."
언제 왔는지 월하노인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하지만 옥황상제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내려보낸다고 해결되지는 않는 일이었다. 둘의 자리는 공석인 데다 땅에서 흔히 말하는 연애질이나 하고 있었다.
"물러가라."
"그럼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단 하루, 칠월 칠석에 만남을 허락한다. 새들에게 도움을 주라 이를 것이니 그리 알거라."
옥황상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해진 수명이 없으니 일 년 정도야 기다릴만하지 않겠던가. 입이 썼다. 누군들 딸의 행복을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리 따지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식들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손을 꼭 잡고 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월하노인이 옆에서 말을 더했다.
"제가 새로 들인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저들의 안내를 맡기시지요."
"그리하게."
월하노인은 빙글,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반가워하려나. 땅에서 아꼈던 사람이었으니 분명히 알아볼터였다. 산의 아버지를 어찌할까 고민하던 차에 염라대왕이 툭 던진 말이 있었다.
'충분히 깨끗하고 선한 영혼이니 데려가게.'
빙글, 이번에 그 편으로 실도 같이 전해줄 것이었다. 하늘 사람들에겐 원래 붉은 실이 없었으나 공들여 새로 만들어냈다. 알려주진 않을 것이지만 매듭 없는 붉은 실로는 대화도 할 수 있었다. 붉은 실로 옥황상제 모르게 직녀성과 견우성을 연결할 것을 생각하니 신이 났다.
"아이고 머리 좀 살살 밟아요, "
"하하하, 미안해."
칠석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일 년에 하나뿐인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 다시 헤어져야 한다 해도 어떤가. 이야기는 비단을 짜고 밭을 갈면서도 도란도란 나눌 수 있었다. 그래도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칠석이면, 땅에선 비가 내렸다.
끝.
[사진] 그림, 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