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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24. 2023

Prologue.

평일 정오면 반투명한 유리로 번쩍이는 5층짜리 진흥원 건물에서 사십 명이 조금 넘는 직원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여름 볕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궜고 미지근한 바람이 도로변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 사이사이를 무심하게 관통할 뿐이었다.      


학인은 로비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 계단에서 어김없이 어제와 똑같은 식당이 위치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반일식 팀장의 분주한 다리를 보며 비릿한 혐오감을 맛보았다. 만약 조직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벌이 ‘해고’라면, 그는 분명 지금 당장 잘려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학인은 조금은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성급한 판단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조직 안에서 태만과 무능으로 점철된 악의 위인이었다.

      

‘평생직장.’

     

순간 술집에서 친구 병진의 또 다른 위로가 떠오르며 헛웃음이 건조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과연 저런 검증되지 않은 대상에게 조건 없는 안정성을 주는 제도가 누굴 위해 생겨난 걸까? 이는 순전히 반 팀장과 같이 아주 오래전부터 열정이 식고, 무능하고, 진취성이 결여된 자들로 인해 물이 썩게 만드는 악순환의 시작점이었다.     

그들은 쉽게 말해서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 ‘교란종’들이었다. 새로운 담수의 유입을 차단하여 순환의 흐름을 상실하고 제 기능까지 잃게 만드는 암적인 존재. 학인은 간절히 이들을 도려내고 싶었다. 만약 아주 우연히, 삼라만상의 기운을 받아 일정 비율 이상의 열정과 헌신을 지닌 직원들로만 구성된 비즈니스계의 유토피아가 구현된다면, 그런 제도적 안전장치 따윈 없어도 그만일 텐데. 학인은 상상에 잠겼다. 그러한 조직은 적절한 시기에 필요해 의한 인적 교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며 사업은 번창하고 불필요한 요인은 줄어들 것이다. 파도 없는 바다가 없듯 사소한 난관들이 있더라도 좋은 선장과 선원들로 구성된 배는 순풍을 단 돛단배처럼 계속 전진할 테니까.

      

그래서 학인은 효율의 극대화의 측면으로만 봤을 때 모든 근로자에게 정년을 보장해 주는 제도는 회사가 지속적인 성장과 존속을 원한다면 단연코 사라져야 된다는 극단적인 사상에 이르렀다. 이는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이 경영진 멋대로 아무 때나 내처 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 신과 같지 못하고 간사하기 때문에 그러한 제도에 일제히 감사함을 느끼며 더 헌신하기보다는 더 배를 불리려 드는 남용(하물며 그게 유한한 안정일지언정)을 방지하자는 차원이었다.      

사대부의 어떠한 견제와 위협도 받지 않는 왕이 폭군이 되는 것처럼 반 팀장과 일부 교란종들은 이러한 안전장치를 등에 업고 하찮은 노력으로 얻어낸 권력으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인은 기꺼이 이 오염된 생태계의 이단아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는 고작 6년 차 주임이었다. 말단 직원 주제에 무슨 대단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겠는가? 그는 부당한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자기의사표현’이라는 무기로 당당히 맞서겠다는, 즉 반항적 태도를 갖추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정했다.

      

학인이 이러한 내면의 변화를 겪고 있을 때, 공교롭게 건널목에 선 반일식 팀장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키는 작은데도 빠른 발걸음으로 앞서간 반 팀장이 뒤를 돌았고 건물입구에 멍하니 홀로 서서 생각에 잠긴 학인이 눈에 들어왔다. 반 팀장의 혈색 없는 마른 입술 사이로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최근 기운 없는 학인을 꽤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야 인마!”

     

못마땅한 어조로 학인을 두어 번 불렀지만 학인은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성미가 불같은 반 팀장은 자신의 부름에 즉각 반응해야 할 부하직원의 무응답에 빈정이 상했고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천 차장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천 차장.”     

“예, 예! 팀장님.”     

“쟤 불러도 대답도 없고, 저기서 혼자 멍청하게 뭐 하고 서 있냐? 요즘 왜 저래? 한 2주 전부터 실연당한 놈처럼 얼이 빠져있던데.”     

“누, 누구 말씀이십니까?”     

“아! 누구긴 네 팀원이지. 진학인! 회사가 너무 편해서 긴장감이 없어졌대?”     

“아아아!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제, 제가 다시 한번…….”     

“아 됐어! 어휴! 요즘 애들은 하나 같이 기본이 안 되어있어. 우리 회사 같이 구내식당이 없으면 말이야, 자기가 먼저 오늘은 뭐 드실 거냐고 물어도 보고, 근처에 새로 생긴 맛집이 있는데 한 번 가보시지 않겠냐고 제안도 하면서 능청맞게 길도 안내하고 할 줄 알아야지. 먼저 갈 테니까 그냥 안 오면 내버려 둬. 짬뽕가로 와.”       

“알겠습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제, 제가 가서 데리고 오면서 좀 가, 가르쳐주고 타이르고 하겠습니다.”   


15년간 반 팀장을 본 천 차장은 불호령이 이어질까 허겁지겁 뛰어갔고 반 팀장은 그대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상한 팔자걸음으로 천성구 차장이 뛰어와 거친 숨을 학인의 얼굴에 뱉는 바람에 학인의 자아성찰은 끝이 났다. 천성구 차장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학인을 타일렀다. 하지만 전달력 떨어지는 천 차장의 이야기는 단 한 문장도 학인의 머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대로 증발했다. 학인은 분비물을 튀기는 또 한 마리의 교란종을 향해 그저 ‘네’라는 말과 ‘알겠습니다’라는 기계적인 대답을 뱉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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