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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Dec 16. 2021

#21. 동료의 배신, 그리고 정당화



한적한 버스정류장 근처에 버려진 쓰레기들 중에는 어울리지 않는 맥주 캔이 있었다. 학인은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번화가인 이곳은 매일 성실한 미화원에 의해 청소가 될 터인데. 틀림없이 오늘 오후나 돼서야 생긴 쓰레기가 분명했다. 터벅터벅 발목에 쇠사슬을 매단 듯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던 학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삶이 고되었으면 이른 저녁부터 술을 찾았을까? 그것도 굳이 걸어가는 와중에. 그윽이 고독한 알루미늄 캔을 바라보던 학인은 이미 한 번 누군가에 의해 짓밟힌 물건에 들끓는 감정을 투사했다. 그리고 곧 발등을 세워 힘껏 차 버렸다. 휘이 골목으로 날아간 캔은 맨홀 뚜껑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었을 뿐 내용물을 토하진 않았다. 속은 텅 비어있었다. 


그는 꽤나 오랜 시간을 정류장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눈앞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들이 계속 정차했지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슬며시 반응을 살피던 버스 기사를 기어코 셋이나 보내고 난 뒤에야 앞에서 승객을 내리는 택시 한 대를 잡았다.


"어서 오세요. 아, 어제는 그렇게 죽을 쑤더니 오늘은 운이 좋구먼.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님, 혹시 갓파더라고 아세요? 새로 호텔 짓고 있는 외곽 도로 근처에 있는 술집? 예전에는 교회 건물이었고…….”     


한참을 듣던 택시 기사는 안쪽에 금이빨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아아 소리를 연발하더니 네비를 찍지도 않고 곧장 액셀을 밟았다. 뒤통수가 휴지 상태의 분화구처럼 드러난 택시기사의 운전 스타일은 꽤나 과격했다. 롤러코스터가 레일을 넘실대듯 핸들을 꺾을 때마다 차체가 양쪽으로 휘청거렸다. 학인의 위장에서 신물이 식도를 타고 역류할 때가 돼서야 이국적인 관목들로 울타리를 이룬 가게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색적인 풍경에 학인은 처음에 착각하여 다른 곳에 내린 줄로만 알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풀 한 포기 없던 황량한 <갓파더>의 겨울 모습과는 달리 가게 외관은 싱그러운 여름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학인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며 주차장 안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유럽의 어느 고성 주위의 조경을 연상케 하는 높은 생울타리뿐만 아니라 건물에도 있었다. 예전의 답답했던 외벽 전면을 허물고 통째로 열리는 창을 내어 세련된 테라스 공간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바닥에는 계절에 어울리는 푸른 인조잔디가 깔렸고 그 위로 대조를 이루는 빨간색 캠핑용 철제 식탁과 의자를 둔 것이 시선을 끌었다.   


학인의 기억 속에는 이 완벽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람이 여전히 선명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잊으려 해도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사람. 어렸을 때부터 쓰던 애착 이불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어있어 포기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알아도 쉽사리 놓지 못하는 사람. 바로 유정이었다. 막상 스쳐 지나가듯 던진 한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친구 놈과 귓등으로 흘려들은 자신을 비교하자 왠지 모를 씁쓸함에 가슴이 죄어왔다. 그리고 뒤늦게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후회가 서해안의 밀물처럼 텅 빈 가슴을 가득 채웠다. 심경이 복잡한 학인이 모직에 붙은 보풀이라도 털어내듯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이자 가까운 테라스 석에 앉은 두 명의 여성이 속닥거리며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가 부끄러움을 끌어안고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때마침 서성이던 진성과 마주쳤다.

     

“어? 넌 또 웬일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다들 말도 없이 오고. 근데 꼴이 왜 그래?”     


테킬라를 채운 롱드링크 잔을 서빙하려던 진성이 초췌한 학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뭐가? 도대체 내 몰골이 어떻길래 다들 한 마디씩 하는 건데? 근데 다들이라니? 또 누가 왔어?”     


“몰라서 물어? 거기 옆에 거울 좀 봐라. 얼굴이 잿빛인 게 꼭 이라크 파병 나갔다가 전우를 잃고 돌아온 패잔병 같잖아. 안쪽에 도환이랑 효준이 놈도 와있다.”     


진성의 조언에 따라 학인의 시선이 입구 벽면에 걸린 고풍스러운 거울로 옮겨졌다. 오랜 시간 정리하지 않아서 덥수룩한 머리에 퀭한 눈 아래로 드리운 다크서클이 마치 교량 밑에서 다년간 생활한  여느 부랑자를 떠올리게 했다. 


"건호는? 연락해보지 왜?"


"건호? 너네 화해는 한 거야?" 


진성이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화해?"

"너 기억 안 나? 그날 그렇게 나가고 나도 한 번도 연락 안 했어. 우리도 그렇지만 그날 분명 너한테 제일 기분 상한 거 같은데 부른다고 냉큼 오겠냐. 시험 붙으면 알아서 연락 올 거니까 일단 신경 끄자. 그게 서로한테 편해." 

학인은 너무 정곡을 찔린 탓에 반박하기를 포기하고 그의 지정 자리, 그러니까 유정과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그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어, 언론에도 나오는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우리 진학인 아니신가?”

    

친구의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고 발견하자마자 눈치 없이 짓궂게 농담을 건넨 도환은 곧 끓는 가마솥으로 끌려갈 시골 암탉처럼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그는 몇 개월 사이에 체중이 눈에 띄게 불어 있었다. 원인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며 현재의 삶에 안주했거나, 여전히 고군분투하며 곁들여진 알코올과 스트레스 따위의 것들로 사육당했거나. 도환은 공무원이다. 부서에는 한창 애를 키우는 나이 대의 여자 선배들이 많다고 했다. 민원으로 스트레스가 있을지언정 매일같이 억지로 끌려가 술병을 기울일 확률은 거의 전무했다. 학인은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대는 도환의 표정이 여유롭고 평온한 것으로 보아 전자의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자신과 상반된 친구의 모습이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왠지 이게 어울릴 것 같군. 너네가 못 가본 이탈리아에서 온 거다."


진성이 주문하지 않은 그라파 한 병을 골라서 가지고 왔다. 투명하고 홀쭉한 병을 감싼 하얀 라벨지에 필기체로 휘갈긴 제품명과 함께 화려한 금박의 날개가 새겨져 있었다.


"비싼 거야?"


효준이 병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사회초년생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기에는 부담될 정도지.”               


"어디서 또 이름도 모르는 걸 가지고 와 가지고 사기를 쳐? 생색 좀 그만 내라 자식아."


효준이 눈치를 주자 진성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네한테는 맥주 한 병을 팔아도 죽을 때까지 생색낼 거니까, 그렇게들 알아."


그 사이 능숙한 진성의 손놀림에 따라 코르크 마개가 쑥 뽑혀 올라왔다. 맑고 개운한 퐁 소리가 이어졌고 곧 네 개의 잔이 채워졌다. 주변을 쓱 둘러본 학인은 혹시라도 대화 주제를 선점하지 못할세라, 잔이 부딪히기도 전에 자신의 고민거리를 장착한 후 대상 없이 허공에다 쏘았다.

               

“야... 내 얘기 좀 한 번 들어봐. 그래도 너네는 나보다 사회 선배잖아. 만약에... 회사에서 진짜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뒤통수 치면 어떨 거 같아?”

               

“어떻긴 뭘 어때… 듣기만 해도 기분이 더럽구먼. 예전에 효준이 신입 때 기억 안 나? 한 6개월 동안 엄청 챙겨주던 악질 과장 새끼. 나중에 실적 채우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지인 찬스 다 쓰지 말고 차곡차곡 모아 놓으라고 조언해 놓고 자기 승진 때 반강제로 부탁해서 쟤 실적 가로챘잖아.”               


도환이 숱 없는 눈썹을 구기며 찰랑거리는 술잔을 홀짝거렸다. 혀를 타고 전해진 시고 떫은맛에 그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후배가 무능한 선배 대신 실적 채우던 시절이 있었지. 무슨 내리 갈굼처럼 말이야. 그 후배는 다시 새로 들어온 후배 등 처먹고, 그게 또 반복되고. 지금은 좀 줄었어. 역겹지만 이래서 인간이 자연의 먹이 사슬에서 최상위에 있는 거 같아. 같은 종끼리도 비열해. 뭔가 받은 게 있으면 쉽게 거절할 수 없다는 관계적 습성을 악용하는 거지. 일단 가까워진 다음에 아주 교묘하게 어물쩡 부탁하는 식으로 나오는데... 거기서 거절하는 후배 놈은 뭐가 되겠냐? 그냥 이미지 쓰레기 되는 거거든. 전통을 거부하는 순간 눈 밖에 나는 거야. 야, 근데 공무원도 만만치 않게 악습 많잖아? 뇌물 받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려고 하자 이를 보고 있던 학인이 효준의 말을 가로막고 목청을 높였다.  


“아니, 잠깐만. 근데 내가 말하려던 상황은 말이야... 조금 더 복잡해. 만약 한 사람이 배신을 안 하면 재수 없게 자기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그리고 본인 말고도 연관된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다 돌아선 상태야. 그러면 어떨 거 같아? 배신당해도 좀 덜 미울 거 같아?”

               

“아, 소심한 새끼. 말 엄청 빙빙 돌리네. 상황이 복잡하긴, 개뿔. 아까랑 별 다를 게 없다니까? 결국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결정하는 비합리적인 동물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질 못하잖아. <죄와 벌>에 나오는 살인자 라스꼴리니코프가 노파를 도끼로 내려 찍을 때도 나름 자신만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지, 암.”               


도환이 의미심장한 예를 들고는 눈을 반달로 만들며 낄낄거렸다.

               

“야! 어떻게 고작 회사에서 있던 일을 살인이랑 비교하냐?”               


“얼레? 네가 방금 언급한 그 같잖은 회사일로도 어떤 사람은 죽어요. 매년 회사 일로 자살하는 직원들 기사 나오는 거 못 봤어? 너도 돌려서 묻고 있지만, 솔직히 너 지금 뉴스에 난 네 동기 때문에 하는 얘기잖아?"


속내를 들킨 학인은 단순히 함구하는 것으로 도환의 추궁을 인정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한테 최대한 조용히 묻으라고 지시하지? 넌 네가 나서서 부조리를 밝힐지 말지 고민하는 거고? 어차피 직장도 사람들 부대끼는 곳인데 다 뻔하지 뭐. 네가 지금 이렇게 우리한테 털어놓으며 암묵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것도 다 아까 한 말이랑 똑같은 맥락이라니까? 각자의 실리에 따라서 각기 다른 결정을 내리는 걸 무조건 비난하고 죄악시할 수는 없지만…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지. 나라면 평생 죄책감이나 불편한 마음 가지고 사는 것보다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떳떳하게 사는 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아니, 요즘 세상이 너무 삭막해. 뭔 2050년에 AI로 도배될 미래가 두렵다면서 역설적으로 점점 인간다움을 잃고 있는 거 같다니까? 진학인, 그리고 혹시 아냐? 속으로 너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몇몇 정의로운 사람들이 너의 용기 있는 모습을 보고 네 생각에 동참해서 반대쪽 파이가 커질지?”               

“이 보세요. 그건 너무 이상적인 발상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처럼 따뜻할 거 같아? 그런 해피엔딩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라고. 얘 겨우 6개월 된 말단이야. 누구 도움 하나 없이 혼자 나대다가는 그냥 불이익 몽땅 뒤집어쓰게 되겠지. 더군다나 얘네 옮길 수 있는 지사 하나 없이 딸랑 본사 하나인데, 발령도 못 가는 작은 기관에서 그런 무리수 두는 거 아니야. 분명 자충수라고. 동참은커녕 순진한 등신 새끼라고 비웃으면서 손가락질하겠지.”

               

효준이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주며 도환의 주장에 반박했다.               


“하긴... 현실은 그게 더 가능성이 높지. 뭐 그래도 최소한 그 배신당할 네 동기만큼은 널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지 않겠냐? 다행히 살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면서? 그게 우리가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라고 본다.”               


“어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네. 우리 공무원 나으리는 너무 이상적이세요. 난 신효섭 쪽에 붙을래.”               


진성이 고개를 저으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진학인, 너 회사 그만둔다고 얘기했다가 누나랑도 대판 싸웠다며?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하지만... 준비하던 이직도 실패했는데 괜히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나섰다가 앞으로 평생 다녀야 할 네 직장생활만 꼬여. 그러니까 그냥 순리대로 살아. 따지고 보면 누나랑 깨진 것도 다 그것 때문이잖아? 너는 지금 같잖은 동정심 때문에 네 인생을 스스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               


효준의 날타로운 충고를 들은 도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끼어들어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인류애 떨어지는 새끼들. 야! 그냥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진학인. 인생 누가 대신 살아주냐? 가만 생각해 보니 상황과 입장은 좀 다르긴 하지만... 경찰에게 살인 자백을 하기 전에 번뇌하는 라스꼴리니코프에게도 소냐가 있었어. 덕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지. 최소한 인간은 믿는 종교가 없어도 성경같이 정신적 지주가 될 매개체가 필요한 법이라고. 알아들어? 이 무식한 것들아!”


도환이 신경질 적으로 술을 들이켜자 효준도 따라서 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놈의 고전 소설 얘기. 야, 이진성 여기 왜 이렇게 더워? 에어컨 안 틀었냐?”               


"주방 옆 쪽이라 그래."               


진성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문학적 소양을 좀 채워라 자식아. 은행에서 맨날 모니터에 뜨는 숫자만 보니까 인성이 그 모양이지.”               

“근데 소냐가 누군데? 유명한 책인 건 아는데, 나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잘 몰라.”               


학인이 물었다.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자인데도 끝까지 믿고 곁에 있어 준 사람이야. 물론 둘 사이엔 나중에 사랑이 피긴 했지만, 어쨌든 그 믿음 덕분에 라스꼴리니코프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죗값을 치르고 속죄할 수 있었지. 이 잔인한 세상엔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필요하다고. 나를 희생해서라도 남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효준과 진성, 두 사람이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투자 얘기를 시작하면서 이 지루한 논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도환의 일장연설은 학인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단단한 술잔을 쥐는 학인의 손바닥이 영문 모를 기운으로 조금씩 달궈졌다. 그 불씨는 여전히 매서운 바람에 꺼질 듯 위태로웠지만 학인이 자리를 뜰 때까지 소멸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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