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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란 Aug 30. 2020

프리라이더에도 등급이 있다.

회사에서 생긴 일

실록의 기록을 보면, 각자도생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백성들이 장차 살육의 환난에 걸릴 것이니 미리 알려주어 각자 살길을 도모할 것'


조선시대로 치면 환난의 시대라 할 법하지만, 각자도생이라는 단어 아래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도무지 표정관리가 안된다. 정도의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행위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그들의 당당한 태도에 대체 어디까지가 이해해 줄 수 있는 수준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학시절 팀플에서도 프리라이더들이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절 프리라이더들은 묵묵부답 연락이 안 되다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언감생심 좋은 학점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직장에서 만난 프리라이더들은 염치 따위는 방구석에 두고 출근했나 싶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지난 8년 동안 온갖 사람들을 겪다 보니 프리라이더에도 등급을 매길 수 있겠더라.


난이도 의 프리라이더들은 운이 없어서 진급이 계속 누락되었거나 부당한 대우를 경험하고 최소한의 일만 맡아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다소 긴급한 상황에서도 몸 사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얄미워 뒤통수를 확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라이더들을 해치려들지 않으니 그러려니 한다. 언젠가 혹 현자를 만나면 고쳐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난이도 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달리고 있는 라이더에게 와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로 속을 긁는다. 며칠 전, 정년퇴직을 한 달여 앞둔 A 부장이 퇴근을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박 대리, 왜 안가?'

'아, 일이 좀 남아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지금 제일 일을 많이 할 때야. 과장, 차장 되면 대리 때만큼 일 안 해도 돼.'

(네? 야근하고 있는 다른 과장, 차장들 안 보이세요?)

'하핫. 정말 그럴까요?'   

'응. 팀장만 안되면 돼. 으하하.'

(네? 그래서 부장님은 팀장을 안 하셨던 건가요?)


A 부장시행문 한 장을 자기 손으로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간식을 나눠주는 직원의 손을 쓰다듬은 일로 임원이 산하 조직원을 회의실로 불러 모아 '그 딴짓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말해라. 그런 생각 들 시간도 없게 만들어주겠다고' 거품을 물게 한 장본인이며, 본인은 매년 영미권에서 열리는 워크숍에 참석하면서 부하 직원에게 이번에는 가 다녀오겠냐고 한 번도 물은 적 없는 사람이다.


라이더를 한심하게 여기는 프리라이더라니, 대단한 정신승리다. A 부장은 회사에 다니는 동안 일은 안 하고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팀장이 안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건가. 심지어 본인처럼 되라고? 하하. 안하지만, 후배들송별회가고 싶지 않아 빠져 나갈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거다.


근무의욕을 팍팍 떨어뜨리는 민폐 캐릭터 정도도 뭐, 웃프지만 흔하다. 피라미드형 인력 구조에서 임원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한 대부분의 부장, 차장들은 운신의 폭이 넓지 않. 50대의 가장인 그들이 자리를 최대한 오래 보존하기 위해 선택하는 다소 치사한 태도들이 자못 짠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30여년의 직장생활의 댓가로 적어도 그들은 내 인사평가 권한을 쥐고 있고, 나는 그들을 견디는 것도 월급에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생각한다.


난이도 상 동료나 후배를 프리라이더로 만났을 때다. 대게 상사가 라이더인 부하를 조정하며 프리라이더 노릇을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프리라이더지만, 라이더인 척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자발적으로 프리라이더를 택하는 경우도 있고,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프리라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건 스스로를 프리라이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더의 노력과 성과를 폄하하거나, 기회가 된다면 가로채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대게 이런 부류들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 혹은 회식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을 무기로 삼는다. 조직장들은 그들에게 '그래도 열심히는 하잖아.'라는 평가를 내린다. 실체를 아는 동료들은 퇴근 후소주 한 잔으로 쓰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이들과 잘 지내는 유일한 방법은 프리라이더가 되는 것이다. 동일한 부류가 됨으로써 그들의 경계에서 벗어나면 정신적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라이더가 프리라이더가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최악의 상황은 라이더가 조직장이 프리라이더들의 존재와 이간질을 묵인하는 조직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아무리 일을 해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리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리는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이 많아지죠? 일을 해서 혼나는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맞는 말이었다. 프리라이더를 고쳐 쓰는 것보다는 라이더들을 채찍질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일 테니까. 대부분의 조직장은 쉬운 길을 택한다.


지친 후배를 위로하기 위해 '인디펜던트 워커(Indepent worker)'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진정한 의미는 조직에서 독립해서 홀로 일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지만, 조직 안에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여 봄이 어떠하냐고. 위를 보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뿐이니, 일의 의미를 너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이렇게 공자 같은 말을 내뱉고는 나 스스로 좀 머쓱해서 그냥 치맥이나 하러 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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