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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란 Sep 02. 2020

일 잘하는 사람은 탕비실 정리도 잘한다.

기승전 Attitude

가끔 취준생 시절에 면접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가장 세상물정 모르고 했던 말은 '경영기획 분야의 사내 일인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취준생에 주어진 정보란, 기업의 공시자료와 채용공고에 쓰인 직무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이 전부였다. 마케팅 ○○명, 경영기획 ○명, 상품개발 ○○명. 이런 식의 공고를 보고, 지원분야에 맞춰 내뱉은 말이었다. 경영기획 직무가 '상경계 우대'라서 지원했을 뿐인데 면접장에서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 마냥 포장하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척 애썼다.


IMF 이전 경제 활황기 대졸 공채로 1년에 천 명씩 대거 입사하던 때에는 채용조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선배들 말로는 원서를 넣는 족족 합격 전화가 왔다고 했다. 좋은 시절은 그걸로 끝이었다. 1998년 입사 이후로 꽤 오랫동안 허리띠를 졸라맨 끝에 2008년 대졸 공채가 부활하는 듯했으나, 금융위기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후 제자리를 찾기까지 몇 년의 시간의 더 걸렸다. 막내 10년이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


시대가 변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토익 고득점자가 넘쳐나자 회사는 채용조건에 토익 스피킹이나 OPIC을 내걸었고, 공모전 수상이나 대외활동 경험 같은 것을 추가했다. 그리고 직무를 세분화했다. 해당 직무에 맞는 조건을 가진 꼭 필요한 수의 인력만 뽑아서 인건비를 줄이겠다는 취지였다. 취업 컨설턴트들은 면접자에게 그 회사보다는 그 직무에 관심이 있음을 어필할 것을 조언했다. 그 회사 또는 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숙지해서 발언을 할 때 섞어서 사용하라는 팁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했었다.


요즘에는 직무 중심 채용 방식이 더 심화되었다. 형식적으로만 구분했던 직무 구분을 좀 더 세분화하고, 해당 팀(직무)의 팀장이 해당 직무에 지원한 지원자 중에서 정해진 인원을 선발한다. 인사팀은 채용 공고 전에 각 팀의 인력 수요를 파악하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제시할 뿐 자기소개서 단계에서부터 각 부서가 직접 관여하도록 했다. 이런 채용 방식이 합리적으로 보일지언정, 최선의 것이었을까.


직무 중심으로 채용하고, specialist를 양성하고자 한 회사의 방침은 생각해보면 '성선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가 싶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개인은 선하나, 조직은 악하다'라는 말도 있듯이 회사는 그런 이상적인 곳이 아니다. 회사의 KPI보다는 내가 모시는 임원의 KPI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팀장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죽 쒀서 개 주는 거다.


특히 아쉬운 점은 사원들이 일을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팀 내 여러 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담당하는 업무는 딱 이것뿐이라고 철벽을 친다. 그러고서 직무 책임을 다했는데 왜 좋은 성과를 주지 않느냐며 조직장 또는 회사에 불만을 품는다. 물론 특출난 몇몇은 처음부터 제대로 업무를 수행한다. 면접장에서 말로 때운 게 아니라, 애초에 진정한 specialist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선배들로부터, 회사로부터, 사회로부터 차곡차곡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데 먼저 철벽 치는 후배에게는 '그래, 네가 알아서 하든 말든'이라는 심정을 품게 된다. 하나라도 더 알려고 묻고, 본인의 업무뿐만 아니라 다른 업무에도 관심을 갖는 사원에게는 떡 하나라도 더 주게 되어 있다.


호시탐탐 일 떠넘길 기회만 노리는 하이에나들도 많지만, '모르는데요.'라고 말하고 다음에 물어보면 또 모르는 햇병아리들도 많다. (니 일이면 알려고 노력은 해야지, 얘야.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자랑도 아니잖니.)


개인적으로 specialist가 되는 것은 과장 이후에 모색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만렙의 generalist가 되어서 어떤 직무에서도, 어떤 레벨의 업무라도 척척 해내는 사원으로 포지셔닝을 해야 그 이후에 여러 조직장의 부름을 받게 된다. 여기서 조직장은 사원 혹은 대리일 때 과장 혹은 차장이었던 분들이다. 중간관리자였던 선배들이 어느덧 조직장이 되어 나를 불러주는 거다.


초창기에는 나도 그랬다. 지들이 뭔데 나를 함부로 평가하냐고. 이런 시답잖은 업무만 나한테 시키냐고. 나는 더 위대하고 거창한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그때 묵묵히 했던 시답지 않은 일들이 쌓여서 내 평판을 이루고 있었다. 종종 다른 팀에서 job offer를 받을 때마다 출근하자마자 탕비실을 정리하며, 어떤 과자가 더 빨리 없어지는지를 관찰하던 때가 생각난다. 잘하고 싶었다.


'박대리는 사원 때 탕비실 정리도 기가 막히게 했어.' 그때는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나 때는 말이야. 출근하자마자 모든 일간지를 펼쳐놓고 회사와 관련된 기사들을 죄다 오려 붙였지.

나 때는 말이야. 출근하자마자 선배들의 휴지통을 비웠어. 담배꽁초가 우수수 떨어졌지.

나 때는 말이야. 출근하자마자 탕비실을 정리했어. 무슨 과자를 사야 될지 매일 고민했어.


비록 기대되는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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