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산과 의사의 삶은 군데군데 금이 간 얼음 호수를 걷는 것과 같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짐작도 하지 못한 때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두렵다. 출산을 돕는 산과 의사로 잠깐이 아니라 수년 이상 오래 일하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금이 간 얼음 부위를 밟게 된다. 그곳이 깨지면 지옥과도 다를 바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다행히 깨지지 않으면 무사히 넘긴 하루를 감사하며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어느 곳을 밟으면 깨지고 어느 곳을 밟으면 깨지지 않는지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선 자리가 깨지지 않도록 충분히 살펴보려는 노력을 하고 많은 경험이 쌓이면 그런 위험을 어느 정도는 피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얼음판이 깨지고 아니고는 거의 대부분 운에 달려 있다. 여기서 운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사에게 해당하는 말이지만 출산을 앞둔 임신부도 운이 좋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느 날, 늘 그렇듯 특별할 것이 없는 초산모가 입원했다. 출산 예정일을 꽉 채운 상태였고 진통 과정은 순조로웠다. 시간은 저녁이었고 외래 진료는 끝났다. 땀에 젖은 수술모를 벗고 진료실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출산 후 두어 시간 후 산모의 경과는 정상으로 출혈도 많지 않았다. 혈압 등 활력 징후도 정상 소견을 보였다. 그때까지는 평범하게 지나가는 많은 출산모 중의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몇 시간쯤 더 지났을 때 산모가 숨이 갑갑하고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고 호소했다. 보통 출산을 하고 나면 분만 과정에 있었던 출혈과 금식으로 인한 탈수로 목마름이나 어지럼증을 느끼는 경우는 흔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우 한두 시간 정도 지나면 수액을 공급하고 출혈도 줄어들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과도한 출혈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호전이 된다. 그럼에도 몇 시간 전에 출산한 산모가 계속 어지럽고 답답하다는 증상을 호소한다면 무언가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증상을 물어보니 숨을 쉬어도 물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고 했다. 정말 몸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산소 포화도를 측정하는 펄스 옥시미터를 가져오도록 지시하였다. 펄스 옥시미터는 손가락이나 팔목에 부착하여 혈액 내의 산소량과 맥박을 측정하는 장비다. 산소 포화도는 보통 90 퍼센트에서 95 퍼센트 정도 이상 유지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산모의 산소 포화도는 90이 조금 안 되는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일단 산소를 투여하면서 급히 119를 불렀다. 출혈에 의한 빈혈, 심장 질환, 폐질환, 양수 색전증이나 폐색전증 등 여러 가능성이 있었다.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연락하여 전원을 허락받았다. 119에 동승하여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산소를 계속 투여하였고 혈압을 측정하였다. 산모의 갑갑증은 약간 나아졌지만 여전히 정상 수치로 회복되지는 못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119에 동승하여 산모를 대학병원으로 전원 하는 동안의 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시간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상대성 원리는 멀리 우주상에서만 적용되는 물리학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시로 마주치는 현상이라는 것을 산과 의사들은 잘 알 것이다. 이송하는 동안 불안해하는 남편의 얼굴에 비하여 오히려 산모는 담담해 보였다. 출산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겪은 탓인지 남편보다 당사자인 산모들이 오히려 더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이라는 과정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눈으로 드러난 변화 말고도 한 여성의 정신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는 모양이다. 숨이 많이 갑갑하거나 어지럽지는 않은지 물어보는 내 말에 산모는 조금 갑갑할 뿐이라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남편과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했다. 산모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혈압이나 맥박 같은 활력 징후도 중요하지만 물어보는 말에 얼마나 즉각적이고 정확하게 대답하는지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출산 후에도 나는 수시로 산모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대답이 느려지거나 목소리가 작아지거나 한다면 좋지 않은 징후다. 그래서 불안한 내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의미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산모에게 질문을 던진다. 평소의 정상 분만 과정 때도 그럴진대 이렇게 119를 타고 이송하는 과정에서는 훨씬 더 불안한 마음에 잦은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너무 잦은 질문이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할 수 있어 가능하면 질문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길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고 응급실에 도착하였다. 정상적인 활력 징후에 의식이 명료한 채로 응급실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한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잠시 기다려 응급 환자 대기실에서 담당 의사에게 산모를 인계하였다. 산모의 병력과 상태를 담당 의사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주치의로서의 내 임무는 일단 끝났다. 산모는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커튼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119 소방대원들도 인수 인계장에 응급실 의사의 서명을 받고는 소방서로 복귀하였다. 인계가 끝난 후에는 그곳에서 더 할 일이 없지만 나는 잠시 응급 환자 대기실에서 혼자 서성거렸다. 그곳에 더 있다고 해서 내가 할 역할은 없지만 왠지 바로 떠나면 신께 미움을 받아 원치 않는 악결과라도 나올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일까?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잠시 더 시간을 보내다 병원에 아기가 있기도 하고 언제 또 올 지 모르는 진통 산모를 위해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원 진료실에 앉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 시간을 보내고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세브란스 병원의 주치의는 응급 혈관 조영술 검사에서 혈전이 폐동맥 일부를 막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제거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 양수색전증이었다. 혈전 용해제를 투여하였으나 효과가 없어서 혈관으로 내시경을 넣어 색전을 제거하는 시술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덧 붙인 말이 색전 제거술 시도 전에 심정지가 왔으며 심폐 소생술로 회복되어 간신히 색전 제거술을 마치고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라고 했다.
심정지라니... 몇 년 전 기억이 떠오르며 잠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의식이 뚜렷한 채로 병원에 이송하였고 산소 포화도도 많이 낮지 않아 비교적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색전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역시 양수색전증은 어떤 경우이던 가볍게 볼 수 없는 무서운 질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늦게 전원 하였다면 우리 병원에서 심정지 상태가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음날 다시 전화로 문의를 하여 보니 운이 좋았는지 산모는 별 이상 없이 회복 중이고 색전증은 다 제거되었다고 하였다. 행운의 여신이 그 산모를 찾아 주었다고 생각한다. 양수색전증은 발견도 쉽지 않고 발견해도 치료가 간단치 않아 사망률이 높은 질병이다. 몇 주가 지나서 그 일을 잊고 지낼 때쯤 그 산모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빨리 전원해 준 덕분에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물론 분쟁으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이번에 있었던 일과 이전에 있었던 양수 색전증의 두 경우 모두 내가 한 조치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우리 병원의 시설과 장비 인력을 활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 명은 생명을 잃었고 한 명은 생명을 잃지 않았다. 과정 못지않게 결과가 중요한 것이 의료 분야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의사가 가진 한계도 잘 알았다. 오랜 기간 의료 현장에서 일하면서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하찮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산모 혹은 환자가 가진 의지, 기본적인 건강, 가족들의 지원도 결과에 영향을 주지만 그가 가진 운이 정말 크게 작용하였다. 결국 모든 질병에 대하여 최종의 마무리는 신이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행운의 여신이 나와 함께 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믿고 우리 병원을 찾아와 준 산모와 아기, 그리고 나의 가족과 그분들의 가족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