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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Jul 15. 2024

단편소설 <Naked>

숨쉬듯 쓴 단편소설 #10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도파민이었다. 간만에 소설을 쓰다 보니 진도가 잘 안 나갔지만 재밌게 썼다. 국제도서전에서 산 <어느 날 네가 말했다, 나는 좀 다르다고> 책을 읽고 쓰기 시작했다.


트랜스 남성에 대한 소설이다.



Naked


“내가 이번 벌거숭이래.”


게임은 보통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번 벌거숭이는 보험을 들지 않았고, 국가와 구호 단체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애 정보는 크롤러들의 손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여태까지 살펴본 바, 크롤러들은 제 기대보다 독한 자들입니다. 너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인터넷에서 제가 숨겨놓은 보물을 기필코 찾아냅니다. 그것은 마치 무한히 늘어나는 서랍장을 하나하나 뒤져서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크롤러의 독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들인 노력의 대가를 톡톡히 받아갑니다. 값을 치루는 자는 그들이 수집한 생애 정보의 주인, 벌거숭이입니다.


크롤러는 보통 아래와 같이 벌거숭이에게 문자로 첫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조은별 님. 귀하의 생애 정보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벌거숭이들은 처음엔 스팸 문자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다행히 이런 오해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나의 정신은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정신은 가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정신은 내 이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정신은 내 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정신은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될 방법은 단 하나.


“조은별 님이 비공개 블로그에 올린 자살 암시글입니다. 트랜스 남성 이성애자로서 세상에 구속감을 느껴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원하시면 저희가 은별 님에 대해 아는 걸 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벌거숭이가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크롤러도 이 점을 알기에 하루 정도는 기다려 줍니다.


“자살을 앞둔 사람한테 뭘 원하는 거죠? 제 생애 정보를 퍼뜨렸을 때 저는 세상에 없을 건데요.”

“은별 님은 그렇겠죠.”


크롤러들은 정중하면서도 폭력적입니다. 이들은 마치 세금 징수원처럼 벌거숭이에게 명세서를 들이밉니다.


생애 정보 공개 옵션

도파민 2 : 생애 정보 + 편집본 공개 / 디폴트
도파민 1 : 생애 정보 공개 / 5억 원 지불 필요
도파민 0 : 생애 정보 미공개 / 10억 원 지불 필요


“은별 님에게는 총 세 가지 공개 옵션이 있습니다. 디폴트 옵션은 도파민 2이며, 옵션 변경을 하지 않으면 해당 방식으로 생애 정보가 공개됩니다.”

“편집본이 뭐죠?”

“말 그대로 은별 님의 생애 정보를 편집한 문서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자극적으로 편집합니다. 은별 님의 경우 연인과의 이야기가 편집본의 주요 내용입니다. 연인과 나눈 대화, 함께 찍은 사진, 영상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연인이 누구를 말하는 거죠?”

“은별 님이 만난 모든 분들입니다. 유리 님, 여름 님, 하은 님과 나눈 기록을 편집했습니다. 편집본에는 저희가 파악한 그 분들의 신상 정보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지금 그러니까 전 애인들을 생각해서라도 돈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제 생애 정보를 봐서 알겠지만 전 그만큼의 돈이 없어요.”

“생애 정보의 공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와 걸쳐 있는 모든 분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비용 마련이 어렵다면 주위 분들과 조율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참고로 저희가 별도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은 님의 자산 상황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악마가 따로 없네.”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기한은 일주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의사항 및 입금 관련 안내 사항은 거주지로 등기 발송하여 금일 내 도착 예정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일로 가득했던 벌거숭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이참에 죽어 버리면 크롤러들이 그만 두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전 애인들에게 연락해서 협박할까. 크롤러의 문자를 몇 차례 다시 보며 벌거숭이의 생각은 후자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전 애인들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때 문득 유튜브에서 봤던 벌거숭이 관련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벌거숭이 피해 상담 센터와의 통화 기록


“안녕하세요. 벌거숭이 피해 상담 센터죠?”

“네. 맞습니다.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제가 이번 벌거숭이라고 문자가 와서요. 저만 아는 사실을 말하는 거 보면 진짜 같아요.”

“아. 그렇군요. 마음이 편치 않으셨겠어요.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돕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조은별이요.”

“네. 은별 님. 연락받은 지는 얼마나 되셨죠?”

“어제 받았어요. 일주일 안에 돈을 준비하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겠죠?”

“보통 경찰에 신고하도록 말씀은 드리고 있어요. 신고가 되면 전담 수사팀에 접수될 거예요.”

“그럼 유출이 되기 전에 잡힐까요?”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사전 검거율이 높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사이버 범죄이기도 하고, 가해자가 해외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요.”

“그럼 신고하는 의미가 있을까요? 괜히 그 놈들 화만 돋구는 게 아닐지..”

“그래도 신고를 해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처가 가능합니다. 생애 정보나 편집본의 키워드로 인터넷 특히 SNS에 올라올 게시글을 차단하는 사후 대응도 이뤄지거든요.”

“아 그러면 신고하는 게 낫겠네요.. 혹시 그 놈들이 원하는 대로 돈을 줘서 막은 경우도 있나요?”

“그런 사례가 대외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은데요. 있긴 있습니다. 저희는 은별 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존중하고 지원해 드립니다.”

“5억을 넘게 요구하는데 아마 구하지 못할 거예요. 저 같은 사람을 위한 지원금은 없겠죠?”

“죄송하게도 그런 제도는 운영되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그 돈이 가해자에게 넘어갈 거라 범죄가 되풀이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서요.”

“그것도 그렇겠네요.”

“혹시 벌거숭이 피해 관련 보험을 든 건 없으시죠? 만약 들으셨다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어서요.”

“아뇨.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모르고 안 들었어요.”

“그렇군요. 그러면 일단 경찰에 신고해서 사후 대응을 잘 준비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영향을 받을 만한 지인에게도 말씀드리면 그 분들도 대비하실 수 있을 거예요.”

“역시 지인들에게 먼저 얘기해 줘야겠죠.”

“네. 마음에 여유가 없으시겠지만 생애 정보가 유출되면 지인 분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어서요. 특히 편집본에 나온 분은 더 많은 피해를 입으세요.”

“얘기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일주일이면 시간이 많지 않아 혹시 센터 방문 가능하실까요?”

“그럼 내일 2시쯤에 방문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지도에 벌거숭이 피해 상담 센터 검색해서 찾아오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벌거숭이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재난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지인까지 함께 휩쓸릴 재난입니다. 애인들과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편집될지 모르기에 더 두렵게 느껴집니다.


벌거숭이는 전 애인들에게 헤어진 순서대로 연락합니다.



전 애인 1. 정유리와의 카카오톡 기록


“유리야. 잘 지내? 나 영파여고 조은별.”

“은별아. 오랜만이다! 나 잘 지내지. 거의 6년 넘었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네ㅎㅎ”

“응응. 그러네.”

“넌 어때? 프사랑 상메가 없어서 번호 바꾼 줄 알았어.”

“사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했어.”

“응응. 뭔데? 보험이나 다단계 이런 건 아니지ㅋㅋㅋ”

“그런 거는 아니고.. 벌거숭이가 뭔지 알지?”

“알지. 요새 그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한 달에 한 번 한 사람의 생애 정보가 전세계에 공개되는 거잖아.”

“맞아. 갑작스레 놀랄 거 같은데 내가 이번 벌거숭이래.”

“엥.. 진짜?”

“응.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증거로 내놓더라. 진짜인 거 같아. 오늘 경찰서 가서 확인도 받았고.”

“헐.. 어떡해. 괜찮아?”

“일단 크롤러가 10억을 요구했고 일주일 안에 입금이 안 되면 생애 정보를 유출하겠다고 한 상황이야.”

“그렇구나.. 은별아 근데 내가 진짜 미안한데 지금 돈이 없어.”

“아니”

“방금 취직했고 자취도 시작하느라 여윳돈이 없네..ㅠㅠ”

“돈 부탁하려고 연락한 건 아니야.”

“앗. 그럼 무슨 일이야?”

“편집본에 너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했어. 너한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미리 알려 주려고.”

“내 이야기..? 편집본에 내 이야기가 왜 있어?”

“내가 만난 애인들 이야기 위주로 편집이 되었다고 하네.”

“잠깐. 우리 고등학교 때 만났던 거 얘기하는 거야?”

“응. 그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나 사진, 영상이 공개될 수도 있어.”

“아직 어떤 게 공개되는지는 모르는 거야? 편집본은 미리 볼 수가 없나..?”

“경찰이랑 얘기했는데 안 보여 주는 게 크롤러들 수법이래. 편집본을 미리 보여 주면 그 내용에 맞춰서 SNS 같은 곳에서 사전 검열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할 생각이야..? 보험은 안 들어놨어? 얼마 안 하던데.”

“보험은 안 들었고 10억은 마련하지 못할 것 같아.”

“그럼 그냥 유출되게 둔다는 거야?”

“응.. 미안.”


이 말을 끝으로 벌거숭이는 하루가 지나서야 답장을 받았습니다.


“은별아. 너 만났던 사람이 나뿐인가?”

“아니. 그건 왜?”

“혹시 다 같이 돈을 모으면 어찌저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오백 정도는 빌려 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내가 그 정도밖에 못 해 주겠네.”

“어제 말한 것처럼 돈을 부탁하려고 연락한 건 아니야.”

“이게 돈 달라는 거 아니면 뭐야. 위에 읽어 봐. 너도 피해 입을 테니까 돈을 좀 보태라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야..”

“일단 내 생각은 전했고 오백 이상은 어려워. 어제 우리 대화 나눈 거랑 사진, 영상 주고 받은 거 봤는데 별 거 없더라. 또 여고에서 여자끼리 연애하는 건 학창시절 장난 같은 거고.. 나는 이미 남자친구나 주위 사람들한테 말했어.”

“그래. 알았어. 혹시 상황이 달라지면 말해 줄게. 미안해.”


벌거숭이는 왜인지 죄인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1심을 마친 벌거숭이는 2심으로 갑니다.



전 애인 2. 김여름과의 문자 기록


“여름아. 카톡 연락이 안 돼서 문자로 해. 나 조은별.”

“무슨 일이야?”

“갑작스레 미안해. 벌거숭이가 뭔지 알지?”

“알지. 근데 그게 왜? 설마..”

“내가 이번 벌거숭이래. 그저께 연락 받았어.”

“아.. 마음이 안 좋겠네. 경찰에 신고는 했어?”

“했는데 잡기 어렵다고 하네. 크롤러가 10억을 요구하는데 입금 기한이 4일 정도 남았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아무래도 유출될 거 같아.”

“돈이 필요해서 연락한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나 돈 없어..”

“아니. 돈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야. 편집본에 전 애인들하고 나눈 대화, 사진, 영상이 실린다고 해서 미리 알려 주려고.. 미안해.”

“너가 미안할 일은 아닌데.. 어떡하지.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거야?”

“부모님이랑 연락 안 하고 있고 보험도 안 들었어.”

“호르몬이랑 수술한다고 돈 모으지 않았었나?”

“알바만 해서는 돈을 모을 수가 없더라. 취직하더라도 호르몬하면 다들 이상하게 볼 테니까. 지금 외모론 취직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럼 지금은 포기한 상태인 거야?”

“어떤 걸?”

“유출을 막는 거.”

“그렇지 않을까. 이젠 더 잃을 것도 없어.”

“너한테 이런 말하기 미안한데.. 좀 무책임하게 느껴져. 나한테 유출될 거라고 통보하듯 말하고 있잖아. 부모님도 나 레즈인 거 모르고 취직도 이제 막 했는데.”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미안해.”

“너가 만약 나처럼 잃을 게 있는 상황이었으면 그렇게 무감했을까 싶네.”

“이걸로 싸우고 싶지 않아.”

“너는 여전히 너만 생각하는구나. 내가 아무리 사랑을 줘도 부치로 남지 않겠다고 했을 때처럼.”

“내가 온전한 내가 되겠다는 게 왜 이기적인 거야? 가스라이팅 하지 마. 이젠 안 당해.”

“그렇게 나를 또 나쁘게 몰아가는구나. 됐어. 연락하지 마.”


전 애인들과 얘기하며 벌거숭이는 그들과 헤어진 이유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 날 밤 벌거숭이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를 3병 사서 마십니다. 용기가 필요한 마지막 대화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전 애인 3. 박하은과의 전화 기록


“여보세요.”

“하은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할 말 있어서 전화했어.”

“나 집이라 통화 길게 못 해.”

“그래. 바로 이야기할게. 내가 이번 벌거숭이고 우리가 나눈 대화, 사진, 영상 모든 기록이 유출될 거야.”

“잠깐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취했어?”

“술을 좀 마시긴 했는데 거짓말하는 건 아니야.”

“언제 유출되는데?”

“입금 기한까지 4일 남았어.”

“입금 기한? 크롤러가 돈을 요구하는 거야?”

“응. 근데 오해하지 마. 돈 달라고 연락한 거 아니니까.”

“오해 안 해. 은성이는 그럴 애 아니니까.”

“고마워. 하은이는 나랑 달리 세상에 잘 녹아들어 살고 있으니까. 미리 말해 주려고 했어. 유출이 되면 전과 달라질 수도 있을 거야. 미안해.”

“왜 그게 은성이가 미안할 일이야. 유출하는 놈들이 나쁜 거지.”

“무책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냥 유출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많이 힘들었겠네.”

“나만 유출되면 모르겠는데 주위 사람들도 피해를 입으니까. 죄인이 된 것 같은 마음이야.”

“10억을 주면 유출이 안 되는 거야?”

“10억을 주면 생애 정보랑 편집본 둘 다 유출을 안 하는 거고, 5억을 주면 생애 정보만 유출을 할 거래.”

“그렇구나..”

“상담 센터에서 들었는데 생애 정보만 유출되면 피해가 적다고 하더라. 생애 정보의 분량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가진대. 그렇게 다음 벌거숭이가 나오면 잊혀지는 거고.”

“응응. 유튜브에서 본 거 같아.”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혹시 유출을 막고 싶으면 말해 줘. 편집본 유출이라도 막으면 하은이는 괜찮을 수 있을 테니까.”

“신경써 줘서 고마워. 고민해 볼게.”

“아냐. 오해 없이 들어 줘서 고마워.”

“목소리가 많이 안 좋다. 안 좋은 생각하지 말구. 내가 내일 나가서 다시 전화할게.”

“그래. 늦었다. 얼른 자.”


다음 날 벌거숭이는 전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깹니다.


“잘 잤어?”

“응. 하은아. 전화 덕에 깼네.”

“어제 얘기한 거 고민을 좀 했어.”

“어떻게 하고 싶어?”

“나도 그냥 유출되도록 둘래.”

“그래. 아무래도 5억은 너무 큰 돈이지.”

“아니. 돈 때문은 아냐. 우리 부모님한테 말하면 10억이라도 주시지 않을까. 체면을 중시하는 분들이니.”

“그럼 뭐 때문에..”

“가끔 번지점프 하는 영상 보면 그런 장면 있잖아. 막상 뛰어내리려니까 무서워서 발이 얼어붙는 거. 그래서 결국 다른 누군가가 밀어 주지.”

“이것도 비슷하다고 보는 거야?”

“우리가 헤어진 것도 결국 나한테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니까. 가족들한테 우리 사이를 밝히고 떳떳하게 관계를 유지할 용기. 그걸 얘기했을 때 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두려웠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근데 어제 얘기를 듣고 마음 한켠에서 그냥 유출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완전 회피형이지.”

“그런 어려운 문제는 누구든 다 피하고 싶을 거야.”

“언젠가 뛰어내려야 한다면 이번에 그냥 밀쳐져서 떨어질래. 혹시 알아? 번지점프처럼 별 거 아닐 수도 있잖아.”

“어떻게 되든 내가 함께 할게.”

“좋아.”


4일 뒤 크롤러는 입금을 받지 못하고 벌거숭이의 생애 정보와 편집본이 세상에 공개됩니다. 자살을 앞두었던 벌거숭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벌거숭이는 조은별에서 조은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벌거숭이를 둘러싼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벌거숭이의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이 트랜스 남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대놓고 드러내는 걸, 누군가는 감추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만 명의 이야기는 듣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엔 귀를 기울이는 인간이 참 재밌습니다. 무료한 연구소의 나날을 버티게 해 주는 얼마 안 되는 즐거움입니다.


다음 벌거숭이로 누구를 고를지 고민인데 아쉽게도 이번 달의 자유 시간은 여기까지 입니다. 말 잘 듣는 양자 AI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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