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듯 쓴 단편소설 #9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에는 따로 소재가 없고 2,000~3,000자 분량의 글을 쓰는 거였다. 아쉽게 3,000자를 약간 넘겨 3,300자를 썼다. 이번 해의 마지막 글이다.
저에겐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 머리 위로 숫자가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필이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제 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위의 숫자가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습니다.
머리 위로 숫자가 보인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저에게 중2병이라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저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습니다.
아무도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아 오기가 생겼습니다. 머리 위의 숫자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 밝혀 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머리 위에 뜬 숫자를 주인의 이름, 특징과 함께 메모장에 적으며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저를 비롯해 가족, 친구들의 머리엔 굉장히 큰 숫자가 보였습니다. 거진 억 단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반면 지하철역, 공원에서 본 사람들의 머리 위엔 100도 안 되는 숫자가 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주위로만 큰 숫자가 보이는 게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쭐한 마음으로 중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머리 위로 숫자가 보인다는 얘기는 더이상 주위에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인 것을 안 중2에겐 주위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제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기엔 저의 성적, 교우 관계, 외모 모두 평범 그 자체였습니다. 주인공에게 이능력이 발현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때를 기다렸지만 기약이 없었습니다.
결국 고2가 되었을 때 체념했습니다. 이때부터는 머리 위 숫자가 꼴도 보기 싫어 없는 것마냥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숫자가 지긋지긋해 문과를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이게 신호가 되었는지 저와 주위 사람의 머리 위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었습니다. 대학교 입학할 때 100 아래로 떨어졌고, 취준생 때는 10, 직장인이 되니 0을 찍었습니다. 이유가 궁금했으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숫자가 처음 나타나 0을 찍기까지 10년의 기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한 건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명인은 머리 위 숫자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거였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연예인은 대개 그들의 인기에 비례한 숫자를 가졌습니다.
근데 여전히 저를 미궁에 빠지게 하는 게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반인도 유명인 근처에 있으면 숫자가 커진다는 것(심지어 유명인보다 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둘째는 나는 유명인이 아닌데 중2 때 숫자가 억 단위였다는 것(여태 저보다 숫자가 높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두 난제를 끝내 풀지 못했습니다. B를 만나기 전까지는.
재작년 7월, 대학 친구 A의 권유로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매달 한 편씩 소설을 쓰는 모임. 저와 A를 포함해 다섯 명의 친구가 각자 소설을 쓰고 모여 감상을 나누었습니다.
모임을 시작하고 제 머리 위 숫자가 급속도로 다시 커졌습니다. 0에서 1,2를 왔다갔다 하던 숫자가 100, 1,000을 넘기더니 이내 천만 단위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저희가 모이는 날이 다가올수록 숫자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또 이번에도 역시나 모임에 참여한 친구들의 머리 위 숫자가 모두 컸습니다.
숫자에 더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러기 어려웠습니다. 글쓰는 게 즐거운 만큼 그것이 중요한 일이 되길 바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숫자가 오르는 일과 글쓰기를 연관지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몇 가지 보이는 게 있었는데 모두 모임의 B와 연관된 일이었습니다. 제 글이 B에게 좋은 평가를 받거나 제가 B의 글을 읽을 때 숫자가 눈에 띄게 커졌습니다.
때문에 저는 B를 신경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과 말을 살피고 인스타그램까지 둘러봤습니다. 심지어 B가 좋아하는 류의 글을 쓰고자 노력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제 인생에 열쇠가 되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B가 바빠져 더이상 모임에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B가 모임에서 떠난 후 그가 제 열쇠였던 게 증명되듯 머리 위 숫자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결국 0에 수렴하였습니다.
그 뒤로도 글쓰기 모임은 지속되었습니다. B가 없더라도 글쓰기는 여전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것이 개인적인 즐거움에 불과한 일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얼마 전 B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B는 모임을 그만 두고 준비한 작품 '주변인'으로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우리는 한국의 조앤 K. 롤링과 글을 나눈 사이라 얘기하며 웃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B의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책의 첫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심부에선 중심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주변부에서만이 중심을 오롯이 볼 수 있다.”
B는 다른 의미로 저에게 열쇠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책 첫 문장은 이상하게 그 날 하루 동안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저녁에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저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저는 머리 위 숫자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시청자의 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미지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창을 통해 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명인뿐만 아니라 그 주위 사람의 머리 위 숫자도 큰 게 설명되었습니다. 유명인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유명인의 시점이 아닌 유명인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와 함께 할 때 제 숫자가 커진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은 저를 통해 B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중학교 때 내 숫자는 왜 높았을까. 답은 금방 나왔습니다. 저는 머리 위로 숫자가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머리 위로 숫자가 보인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저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특수한 설정 아래에서 관찰된 거였습니다. 시청자들은 호기심에 한동안 저를 지켜보다 이내 흥미를 잃고 다른 채널로 갔을 것입니다.
문득 제 가설이 맞다면 제 머리 위 숫자가 다시 오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수수께끼를 풀어 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장실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 위 숫자를 보았습니다. 0이었던 숫자가 1로 바뀌었습니다. 그다음엔 10의 자리, 100의 자리, 1000, 10,000.. 숫자는 기하급수로 올랐습니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푼 순간. 저는 되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머리 위 숫자는 관음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메뚜기떼의 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찬물로 세수 한 번을 하고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다시 침대 위로 돌아가 눈을 감고 잠을 청했습니다. 내일도 어제 그리고 오늘과 다름 없는 지루한 일상이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