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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여름의 끝에 걸터앉아

경로 의존성 타파하기

by JunWoo Lee

문득 지금의 생각을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올해가 내게는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아니, 전환점이 되길 바라며 글을 쓴다.


대학생 때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배웠다. 4대 발명을 하고 세계를 주름잡던 중국이 영국에 밀린 이유가 뭘까? 참으로 흥미로워서 배운 걸 로 남겨놓기도 했다.


중국의 콧대는 영국에 와장창 깨졌고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국토가 열강에 유린되었다. 중국 내부적으로도 분란이 이어져 19~20세기에 걸쳐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사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가 있었다.


큰 실패는 한순간의 실수에서 비롯되지 않고

스멀스멀 쌓인 작은 요소들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합리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져서 별 의문 없이 내린 선택들. 즉 경로 의존성에서 비롯된 결정이 모여 거대한 실패를 만들 수 있다.


전쟁, 불경기, AI 등의 소식. 나를 불안하게 하지만 당장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월급은 칼 같이 들어오고 일상은 되려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걱정될 정도로 공고히 유지된다.


밖에는 추워라는 말이 울타리 안을 더 아늑하게 만든다. 밖을 내다보지 않고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게 한다. 대한민국의 친절한 노동법이 나를 지켜 준다.


냉혹한 현실을 피해 따뜻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다.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은 인재들이 성 가장 안쪽에서 근무하는 헌병단을 택한다.


진격의 거인 얘기를 더 해 보자면 50m에 이르는 장벽은 처참히 부서진다. 그렇게 견고해 보이던 벽도 무너지는데 내 일상을 지켜 주는 울타리는 어떨까.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수도에 무차별적으로 미사일을 쏟아붓는 시대다. 나의 터전에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너무 태연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울타리 밖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 혹은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불황, AI까지 여러 요소가 뒤섞인 풍파가 세상을 뒤흔든다.


두려움에 울타리 밖을 나서지 않으면 더 비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무지(無知)가 두려움을 강화해 울타리 안으로 더 숨어들게 한다.


매일매일 거듭되는 합리적인 악순환으로 나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종종 회사에서 이미 그렇게 된 사람들을 본다.


안주하다 못해 한 군데에 고여 결국 썩어 버린 시니어들. 그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은 예전만큼 마음 편하게 그들을 비난하지 못한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마음 한 편에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이직을 하고 싶은 회사가 딱히 있지도 않다. 회사 일에 불만이 없는 상황에서 이직을 위한 이직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나만의 일을 찾아 도전하는 건데 용기가 부족하다. 울타리 안에 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기가 사그라들 텐데 걱정이다.


가끔은 차라리 울타리 밖에 내던져지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한다. 생존 본능에 발버둥 치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 것이다.


누군가는 등 따시고 배부르니 하는 고민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 말이 맞다. 근데 등 따시고 배부르다고 가만히 있으면 중국이 경험한 역사가 내 삶에서 되풀이될 수 있다.


경로 의존성은 매일 같이 강화되기에 관성보다 무섭다. 물줄기를 틀려면 강한 외부 개입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물길을 내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자는 보통 내가 원하지 않는 사고나 재난의 형태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매일매일의 합리적인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사고의 기준점을 울타리 안이 아닌 바깥으로 잡는다. 내가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은 게 울타리 안에선 합리적일지라도 바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가 회사 더 나아가 국가처럼 비빌 언덕이 없는 디아스포라 상태가 되었다고 상상하며 내게 필요한 행동을 선택한다. 벽 바깥으로 나선 조사병단의 마음가짐을 갖는다.


물론 등 따시고 배부른 환경 안에서 그런 상상을 하기는 쉽지 않겠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경계 밖으로 나서야만 앞으로도 계속 등 따시고 배부를 수는 없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과정에서 스트레스는 받겠지만 대격변 중인 세상을 맞닥뜨리며 체질을 바꾸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경로 의존성이 타파되면 좋겠다.


전에도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동경이었다면 지금은 생계형 고민이 됐다. 울타리 안은 너무 따뜻하고 아늑하기에 위험하다.


남은 한 해의 목표는 회사에서 정의된 '기획자'의 역할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주어진 역할에 갇혀 생각하지 않고 혼자서도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단독자가 되고 싶다.


스스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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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Woo Lee 커리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기획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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