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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얀 Dec 27. 2024

저는 디자이너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디자인 스킬을 갖춘…

첫 직장 첫 직무를 은퇴까지 이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일단 나는 아니다. 디자이너라고 할 수는 없지만 편집디자인 스킬을 배웠고 그걸로 첫 직장을 다녔다. '편집자'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너무나도 내가 부족했고, 관련 학과도 나오지 않은 내가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어서 선택한 길이다. 출판 편집디자인을 배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길에 들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능력이고, 쥐꼬리만 한 월급 받고 살아가는 내가 부업으로 입에 풀칠할 수 있는 하찮지만 귀한 능력이다.


첫 직장에서는 표지를 제외한 조판, 내지 디자인을 모두 맡았다. 표지도 하라고 한다면 할 수는 있다. 그게 당신 마음에 들 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어도비 인디자인은 마스터했다. 요즘 출판사에서는 잘 쓰지 않는 아래한글로도 책 편집을 할 줄 안다.(쿽은 논외다. 쿽은 인디자인으로 모두 교체되었다.) 남들보다 한글을 요-만큼 좀더 잘 다루고, 인디자인은 이-만큼 좀더 잘 다룬다. 웬만한 책은 다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다 혹독한 스파르타식으로 다닌 첫 직장 덕분(?)이다. 덕분… 맞겠지. 사람은 나쁘지만 일은 나쁘진 않으니까.


첫 직장과 현 직장의 사이, 그리고 첫 직장 전에 다닌 인턴으로 다닌 회사에서의 경험 덕분에 맥도 다룰 줄 안다. 수준급은 아니다. 버벅거리긴 한다. 그래도 contrl 대신 command를 쓸 줄은 안다. 집은 윈도우, 회사는 맥을 써서 단축키 적응하느라 힘든 적도 있지만, 그래도 쓸 줄 안다.

경험은 참 귀하다. 가까이서 보면 그렇다 할 경력이 못되고 길에서 내다버린 시간처럼 보이지만, 멀리 한 걸음 물러나서 보니 그때의 내가 있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변변찮지만, 더 변변찮은 내 이력서에 그나마 한 줄 정도 더 쓸 수 있는 경험들이 되었다. 그때 울고 화냈던 시간들을, 어떨 때는 저주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상처가 낫고 아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이야기들을 왜 하느냐(항상 서두가 길다), 

회사에 신입 디자이너가 들어왔다.


기존에 함께 다니던 디자이너님이 퇴사를 하고 2개월의 공백 끝에 신입 디자이너가 들어왔다. 단행본 경험은 제로(zero)다. 학습지랑 그림책을 만든 경험은 있단다. 그 둘과 단행본의 간극… 해보진 않았지만 엄청날 것 같다. 둘의 포맷은 완전히 다르니까. 

더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분… 맥을 전혀 사용할 줄 모른다! 나도 못하는데 이 분은 더 못한다! 우리 대표님(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졸지에 회사에서 맥을 '그나마'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첫날부터 단축키 물어보고 가르쳐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내가 이걸 당신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걸까요. 대표님, 사람 뽑을 땐 그것도 감안하고 뽑으셨어야죠.


단행본 경력이 없다보니 인디자인 다루는 방법도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단행본은 같은 형식이 반복되는 포맷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스타일이라는 것과 마스터 페이지를 주로 사용한다. 스타일은 서체, 자간, 서체 색상 등 형식을 지정해서 단축키처럼 만들어 놓는 것이고, 마스터 페이지는 아래한글로 치면 바탕쪽, 즉 페이지의 배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더 간단한 설명을 하기에 어렵다. 오늘도 어휘력 부족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이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하다. 벌써부터 막막하다.


새로온 이 분과 나는 A부터 Z까지 안 맞아서 그런 것일까, 이런 부분들이 더 크게 다가왔다. 2개월 동안 사무실에 적적하게(사실은 행복하게) 자리를 지키며(사실은 농땡이를 부리며) 지내왔는데 갑자기 말이 많고 말이 무척 빠른 분이 오니 적응을 못하는 것인지 하루하루 기가 빨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말만 빠르면 모르겠는데, 말의 속도에 비해 단어가 안 따라오는지 자꾸만 버벅거리시니 같이 그만큼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분이다. 

아, 행복했던 지난 2개월이여. 


오늘도 맥과 씨름하고 있는 그를 뒤로 하…려다, 냅다 불려가서 알려주고 있다.

딱 한달만 신경 써보기로 했다. 비록 머리에 필터를 안 달아서 생각한 걸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고, 동갑임에도 기함을 토할만큼 엠-지한 데다가, 여기저기 정신없이 참견하고 아는 척하며 다니는 친구이지만, 그래,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봐야하지 않겠나. 한두 달 정도 지나고 나면 의외로 맞을지도……. 안 맞을 것 같지만.


근데 저는 디자이너가 아니에요. 이거 알고 있지 않냐고요? 아니야, 일단 모른다고 하겠어요.

이러다가 당신이 교정 보고 내가 디자인하게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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