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컨택한 인플루언서에게, 출판사는 어떤 방향으로 책을 꾸려나가고 싶은지에 대한 간략한 의견을 담은 기획안을 보낸 적이 있다. 이번 저자는 도서 출간 경험이 없는 인플루언서로, 글이라고는 인스타그램의 짧은 글 문안이 전부인 사람이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로 새자면, 기획편집자들은 방송으로 치면 PD와 비슷하다. 안 되는 것들이 있다면, (여러 의미에서) 되도록 만드는 것이 기획편집자다. 원하는 씬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CG와 여건들을 활용하는 것이 방송에서의 PD라면, 글을 못 쓰는 저자의 책을 내기 위해서라면 인터뷰를 녹음으로 딴 후 글로 어떻게든 풀어내든지, 글 대신 그림이나 사진 소스를 많이 사용하든지 등으로 책을 짓는 것이 출판에서의 기획편집자다.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이 저자는 책 출간에도 관심이 많고 책을 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방향을 잡기 위해 샘플 원고를 A4용지로 3~4장 정도 써서 보내달라고 했더니, 저자가 물었다.
“글을 쓰기 전에 참고를 하고 싶어서 그런데 어떤 책을 읽어보면 될까요?”
오… 그 말을 들은 순간, 조금 멈칫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어떤 책이 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판사를 다니면, 특히 편집자들은 책을 많이 읽는 줄 안다. 물론,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이 3.9권이라는 기사(출처: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42738)를 생각하면, 그에 비해 쪼끔 더 많이 읽기는 한 것 같다. 실제로 출판사 직원들은 돈보다도 자아실현을 위해 들어오는 경우가 많고(돈을 많이 벌기 위해 들어온다고 하기엔 박봉으로 유명하다) 책을 좋아해서 이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책을 많이 읽는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대체적으로 기획안에는 원고의 콘셉트, 담을 만한 메시지, 주제, 예상 목차 등을 작성해서 주는데, 그것만으로는 책의 방향을 다잡기에는 저자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유사 도서를 몇 권 선정해서 보내준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책을 내가 읽어본 건 아니야! 나의 초라한 유사 도서 항목은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건져올린 책 한 권, 베스트셀러에서 낚아올린 책 한 권, 내용을 대강 알고 있는 책 한 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래 기획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께서 으레 하는 말인 “책을 많이 읽어서 지평을 넓히세요”(이 나이가 되고 출판사를 다녀도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그래, 책 편식을 하지 말자, 책 좀 읽자 싶어서 일하느라 멀리했던 책을 다시 펼쳐 들기 시작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구직 기간에는 달에 3~4권가량 읽을 정도로(그렇다, 이것도 많이 읽는 거다) 책 섭취량이 많은 편인데, 일하는 동안에는 하루종일 텍스트를 먹고 있다보니 집에 오면 배가 불러서 다시 책을 펼쳐들려고 해도 토해내기 십상이다. 게다가 약간 강박증 같은 것도 있어서 책 병렬 읽기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으며, 한번 펼친 책은 다 읽어낼 때까지 다른 책을 펼치지 않으니 책 읽는 속도도 느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는 편이며, 때론 필요하면 앞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어나가는 습관도 있는 지라 다른 사람에 비하면 책 읽는 게 느리다.
게다가, 책보다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인터넷 방송을 즐겨봐서 집에 오면 방송도 챙겨봐야 하고, 핸드폰 게임도 해야한다. 인스타그램도 수시로 들어가봐야 하고 유튜브도 봐야한다. 웹소설과 웹툰이 빠지면 섭섭하다. 가끔씩 넷플릭스 정주행에 빠지면 거기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최근에 본 흑백요리사 재밌더라…….
요즘엔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시집을 읽기로 작정했다. 박연준 작가의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렴》(문학동네, 2024). 시집이니까 빨리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왜, 요즘 텍스트힙이 열풍이고 비교적 짧고 가벼워 텍스트 입문으로는 시집을 많이 선택한다 하지 않았나.
낭패다. 첫 회사를 학술서 출판사를 다녔던 지라, 관련 논문이 있으면 들춰보는 버릇 같은 것이 생겨(걱정하지 마시라, 이해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집을 거의 한달째 붙잡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 다른 개인적인 일로 너무 바빠서 책에 먼지가 쌓이기까지 했다.
참, 우리의 저자가 물어왔던 질문에는 어떻게 답변했냐고?
양심이 찔리지만 ‘제가 보낸 기획서의 유사 도서란을 참고하세요!’ 라고 답변했다. 그 날 집 가는 길에 유사 도서로 쓴 책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은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