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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탈 Nov 10. 2023

비어버렸다는 착각

삶도 정기 정리가 필요하다

10년차가 됐을때 해오던 방식으로 늘 똑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가진걸 써먹기만 해서 텅 비어버린 것 같아서 매일이 의미없고, 내 시간이 아깝고, 일에 아무 의욕도 감흥도 없었다. 일의 성과를 봐도 겨우 이것밖에 안되나 싶어 스스로에 대한 의심, 회의가 점점 커졌다. 번아웃이 아주 심하게 온 것이다.


고민 끝에 내면을 다시 채워야겠다! 그러면 새로운 일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의미도 새로이 생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새로운 환경, 배울 수 있는 환경에 둬야겠다 싶어 인생에서 절대로 할 수 없을것 같은 그러나 좋아하는 분야를 알아 보려고 유학을 갔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둔 몇년간 새로운걸 배운 것도 좋았지만 정말 좋았던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사소하지만 반드시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상의 일들을 느릿느릿 해가면서 생각의 실마리가 잡혔고, 어느새 과거 시간과 상황, 행동과 반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텅 비었다고 생각한 것은 삶을 지탱할 에너지, 체력, 열정이나 동기의 고갈이었음을 알았다.


그동안 배운걸 너무 써먹어서 자신이 텅텅 비었다고 생각한 것은 진짜로 비어버린게 아니었다. 지식과 경험이나 감각의 기억, 인사이트는 멀쩡히 잘 있었다.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최대한 빨리 해결책을 만들고 성과를 내기 위해 지식, 경험, 감각을 꺼내쓰기만 하고 새로이 얻은 지식, 경험과 인사이트 등을 정리하지 않은채 계속 쌓기만해서였다. 새로운걸 배울때는 너무 즐겁고, 많은 것을 얻었다! 라고 뿌듯했지만 그걸 원래 알던 것에 더해 잘 정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년 세월 동안 꾸역꾸역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잊어버렸다.


삶은 매일이 쌓여간다. 자신이 애써 얻는 지식, 경험과 인사이트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저장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건 아무데나 쑤셔넣어서다. 아무데나 집어넣어버렸으니 다시 꺼내 쓰기가 어렵다. 그렇게 자주 사용한 기억에만 의존해 살다보면 가진게 점점 줄어든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집에 물건들이 엉망으로 아무데나 방치되고 정리되지 않으면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없고, 뭘 갖고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실제로 샀던 음반, 책을 두번씩 산 경험도 있는데 두번째 구매시엔 절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거 읽은 책같은데? 하고 책장을 찾아보면 어디선가 똑같은 책이 나타나는.. 딱 그런 상황이 됐던 것이었다.


기억의 서고는 신비해서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린다. 한칸 두칸 뒤로 후퇴하고 책장을 비추던 등도 흐릿해지다가 배터리가 다해 꺼져버린다. 삼천칸의 서가를 가졌으나 세칸의 리소스만 사용하면서 불꺼져 사라진 곳을 떠올리지 못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기억의 먼지를 턴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시시각각 쌓이는 삶의 교훈과 기억을 잘 정리하는 일은 사실 좀 성가시고, 복잡하기도 하며 필히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휴면 예금 백억 가진 거지가 된다. 있어야 할 곳에 삶의 조각을 잘 정리해두기는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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