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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Nov 14. 2021

켜켜이 묵은 그리움은 가끔 뒤통수를 친다

호주에서 김선미 찾기.

20210918.


켜켜이 묵은 그리움. 기억나지 않는 책.

변하지 않는 그리움의 모양.



분명히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의 책 중에서 읽은 내용일 것이다.

손가락이 봄철에 땅에서 돋는 죽순(竹筍)처럼 길고 섬세한 사람을 아름답다. 이것은 좋은 기준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저 손가락이 죽순 같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순? 어떻게 손가락이 죽순 같지?


옥지소완, 세요설부, 홍장분식, 단순호치, 아미청대 같은 중국의 전통 미인상의 이야기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상을 일컫는 말에는 손가락이 죽순 같다는 말은 없는데 저 내용을 읽은 것은 대체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떤 책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손가락이 죽순처럼 아름답다'라는 내용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오래 친 친구의 손가락은 작은 체구에 맞게 작았지만 손가락이 아주 예뻤다. 그 손가락을 보고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해가지 않던 죽순 구절을 떠올리고 그게 바로 이런 손가락인가 생각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마냥 가느다란 것이 아니라 죽순처럼 손끝이 가늘어지며 손톱이 작았다. 피아노를 오래 치면 이렇게 손가락이 예뻐지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학교를 다고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인가 친구의 가족이 모두 호주로 이민 가기 전지 우리는 꾸준히 만났다. 항상 둘이서. 내가 다니던 학원과 친구의 집은 가까웠고  삐삐로 연락하고 서로의 집전화로 연락해서 그 사이에 있는 햄버거집에서 만나곤 했다

만날 때마다  그간 써둔 수 통의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다 딱 한번 친구의 어머님이 일하시는 직장에 들른 적이 있다. 친구의 어머님은 행림병원 임상병리실에서 근무하셨다. 병원 2층인가 3층인가의 사무실에 흰 가운을 입으신 어머니가 책상 앞에 앉아 있으셨고 PC로 업무를 하고 계셨다. 앉은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나를 향해 '아 네가 선미 친구구나.'라고 하시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단발머리.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


친구의 부모님은 이혼하시고 어머님과 친구와 남동생 이렇게 세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정확하게 이혼을 하신 것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에는 그다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냥 넘어가는 일들이 있다. 우리 사이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니까.

친구의 집에 가끔 놀러 가면 남동생은 람의 나라를 하며 토끼인지 사슴인지를 때려잡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단지 내 부모님은 이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 집은 아파트인데 친구의 집은 빌라라는 이유로 친구의 가정환경을 판단했다.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우리 가정을 이해할 깜냥은 없었고, 무책임한 부모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으며 본인의 불안정함을 자식 앞에 갈무리 못하는 엄마를 마냥 애달파하고 가엾이 여기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말했다.

너는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고 니 일하면서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 자식도 낳지 말아. 너희들이 다시 작아져서 내 뱃속으로 들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엄마 아빠가 낳아놓고 날더러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하면 저는 어쩌나요?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냥 미안했고 내가 엄마 행복의 걸림돌 같아서 빨리 어떻게든 잘 되어 당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정서 학대라고 한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엄마의 말은 그대로 내 목표가 되어 나는 그렇게 살리라 결심했다.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나 혼자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진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서 내 노후까지 책임지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읽는 것이 가장 좋아서 막연하게 항상 국문학과, 영문학과, 문학과 등을 내가 가야 할 대학의 학과라 생각했는데 친구의 어머님을 한번 뵌 후 문득 떠올랐던 생각 하나로 지금 내가 이곳에 다.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

여자의 직업 중에 임상병리사라는 것이 있으며 그러면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일을 하며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는 것이 가능하구나. 그렇다면 그냥 혼자 사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겠지. 아무렴. 그리고 만약 자녀가 있다고 해도 그 앞에서 너네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일하는 곳에서 자녀의 친구를 만나고 '아, 네가 아무개구나.' 하며 인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수능을 치기 전에 그 친구의 가족은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이유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왜 이민을 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담과 처음으로 학교 지망을 상담할 때 '저는 모모 대학 임상병리학 가려고요'라고 말했고 담임선생님은 너는 간호학과 갈 성적까지 나오니까 그냥 간호학과나 쓰라고 하셨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렇게 했다.


내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한국에 들어온 친구가 내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고 우리는 서면에서 딱 한번 만났다. 서면 광복로가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에서 수시간 동안 밀린 아야기를 나누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내용 중 그 어느 것도 절대 입밖에 내지도 글로 쓰지도 않고 기억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친구는 호주로 돌아갔다. 헤어지면서도 당연히 삐삐나 서로의 집전화로 연락해서 햄버거집에서 만나듯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우리 가정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1년 정도는 더 이어졌고 나는 그때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교 성적증명서를 보면 분명 1학년 2학기. 2학년 1학기의 수강과목과 성적이 나와 있으니 내가 학교를 다닌 것은 분명한 사실 같다. 동아리도 아주 열심히 했다. 누구든 나를 활동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 수업이나 동아리가 없을 때 나는 뭘 했더라. 그때 엄마 아빠는 어떠셨더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내 동생은 어쩌고 있었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해결이 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무엇인가 해결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냥 열심히 학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다시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만나거나 찾을 방법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단 한번 만난 이후 우리가 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던가. 네가 나한테 알려준 연락처가 있었나. 나는 어떻게 했었지. 그때 친구는 아직 핸드폰 번호가 없다고 했었던가. 어머님 번호라도 받아두는 것이었는데. 왜 하필 흔하디 흔한 이름에 성은 김 씨인지. 이제 너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지.





이렇게까지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그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리움이 좋았다. 가끔은 너무나 사무쳐도 그냥 푹 빠져서 마음껏 그리워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알고 지냈던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몇 배 더 길어졌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났을 때의 나이만큼의 시간이 한번 더 흘렀다. 해소되지 않는데 계속해서 그리움만 켜켜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 그 압력에 못 이겨도 항상 똑같은 그리움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같은 길을 영원히 빙빙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같은 모양이 끝없이 반복되는 프렉탈 같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그리워하는가. 나는 영영 못 만날 것 같은 너를 일부러 그리워만 하는가. 늘 함께 떠오르는 '죽순 같은 손가락' 그 내용은 대체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일까. 슬쩍 다른 화제로 애써 돌려도 본다.



한 시절 풍미한 일본의 비주얼 락 그룹 엑스 재팬의 리더이자 드러머, 현재도 괜찮은 프로듀서인 YOSHIKI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와인을 따며 셀카를 찍으려다 의자가 부러져서 넘어졌다면 올린 SNS가 왜 잘하지도 않는 내 SNS 피드에 뜨는 것인지. 저 남자가 몇 시 몇 분에 지구의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아티스트와 무슨 작업을 했는지 까지 온갖 쓰잘데 없는 정보는 원치 않아도 알게 되는데. 오랜 기간 그리운 친구의 소식 하나를 내가 모른다.


https://www.instagram.com/p/CT9M-UngPkM/?utm_medium=copy_link



여전히 화장이 진한 저 사람이 왜 내 피드에 떴느냐. drummermichi님의 계정을 팔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drummermichi의 밴드가 자주 커버하는 곡들이 1990년대 비주얼 그룹 음악들이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HchIy2Y6JQ


특히나 저 드럼 치는 미치카나 村井道奏(7) 소년이 유독 누군가를 많이 닮아서 바다 건너 아줌마가 팬심이 차올라 응원 차 VPN 깔고 LINE도 팔로하고 LINE 드럼 라이브 몇 번 보고 하지도 않는 인스타도 팔로 했더니 이 사달이 났다. 애초에 YouTube에서 ロイロイロ 밴드를 추천해준 이유는 내가 가끔 이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엑스 재팬이나 toshi의 개인 솔로곡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친구는 YOSHIKI의 클래식한 락을 아주 사랑했다. 광팬이었고 선율이 아름답다며 밴드의 여러 곡을 피아노로 즐겨 연주했다.


하아.. 고급 와인을 들고 웃는 저 얼굴을 보면서 왜 내가 저 인간이 저러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냐를 생각했고 결국 다시 네가 떠올랐다. 네가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이제는 굳이 생각하지도 않는데 와인 병을 들고 웃는 저 얼굴에 결국 또 다시 그립고 보고 싶어 지고야 말았다. 또또또 미련하게!

그리움은 차곡차곡 쌓여있는데 허물 방법없어 쌓인 그리움에 뭘 하나 더 얹기도 두려워서. 나는 영영 못 만날 것 같은 너를 일부러 그리워하나 스스로를 의심까지 했는데 그 의심이 호주를 맴돌다 로스 엔젤레스를 거쳐 다시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고야 만다.


너는 어디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 그냥 몇 가지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잘 계시는지.

아직도 열 손가락이  죽순처럼 어여쁜지. 

너도 가끔 내 생각을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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