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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l 06. 2022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짧은 방학을 맞아 세 식구가 쿠알라룸푸르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열일곱 살입니다) 가는 건 같이 갔지만 오는 날은 일정 때문에 남편이 먼저 내려가고 아이와 제가 늦게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표를 따로 끊었더니, 한 자리가 뚝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가 아빠랑 앉고 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았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이른 아침부터 조호바루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길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이라면, 혹시 가는 길이나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겨 우리가 이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 집과 이 집에 있는 우리 물건들은 전부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에어아시아가, 말린도 에어가 추락을 해 우리가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누가 이 집을 정리할까. 경찰이 오려나. 열쇠가 없으니 억지로 열어야겠지. 한국에서 가족들이 호출되려나, 아니면 알음알음 한 동네 살던 친구들이 와서 도와주려나. 아니면 그런 수고도 없이 그냥 몽땅 버려버리나.’ 이런 생각들을 말이에요.


멀리 앉은 두 사람은 높은 곳을 무서워합니다. 각종 전망대에서 벌벌 떠는 편이고, 건물 높은 층에서는 창문 근처에도 잘 가지 못하고, 중간이 뻥 뚫려 1층까지 내려다보이는 3층 쇼핑몰 난간에서도 부르르 몸을 떨곤 합니다. 그러니 비행기가 우르릉 쾅쾅 활주로를 달리다 마침내 온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차고 떠오를 때 자칫 기우뚱거리거나 휘청이기라도 하면, 손을 조심해야 합니다. 옆에 앉은 내 손이 부서져라 꽉 쥐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안 무서운 사람이 혼자 앉고 무서운 사람 둘이 같이 앉았으니, 둘이 서로 부서져라 손을 맞잡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혼자 앉아 또 생각합니다. 이 비행이 우리의 마지막 비행이면 어쩌나. 이렇게 떨어져 앉아 있는 마지막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머리 위에서 짐들이 떨어지고 비행기가 최고 속력으로 지면 혹은 수면을 향해 곤두박질칠 때, 마지막을 예감하고 늦지 않게 사랑했어, 자기 덕분에 행복했어, 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소중했어, 이런 작별의 인사도 못하고 그냥 끝인 건가. 그건 좀 슬픈데. 이런 생각을 또 하다가 고개를 탈탈 털며 가져온 책을 펼쳤습니다.


다행히 비행기는 잘 날았고 오렌지 주스와 땅콩도 맛있게 얻어먹고 무사히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여행을 시작하자 마지막을 상상했던 마음은 깡그리 잊고 또 서로 틱틱거렸지만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한 번 깨달은 걸 돌아서면 까먹어요. 까먹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죠. 그 대신 깨닫는 주기도 점점 짧아진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요. 어쨌든 배부른 이틀을 보내고 돌아오는 날, 일이 있는 남편은 아침 비행기로 먼저 출발했고, 아이와 둘이 저녁 비행기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비행기가 구르릉 덜컹덜컹 요란하게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무서울 텐데 이제 컸다고 먼저 손을 잡지는 않아요. 내가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깍지를 꽉 낍니다. 힘이 제 아빠만큼 어마어마합니다. 키도 나보다 크고, 몸무게도 나보다 많이 나가고, 알통도 나보다 훨씬 큰 아가씨가 되어 말입니다. 말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 온기, 그리고 그 굉장한 악력만 느끼고 있으면 됩니다. 평소에는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데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순간에는 그 손을 원 없이 꽉 쥐고 있을 수 있습니다. 비행기는 이번에도 무사히 이륙했다가 별일 없이 착륙했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며 생각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다시 이 문을 열 수 있어 감사하다고. 누군가 신발도 벗지 않고 우리 집에 들어와 소중한 것들을 시커먼 쓰레기봉투에 마구잡이로 쓸어 넣어 버리지 않아도 되어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떠돌며 살다 보니 집안에 값비싼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집에 돈을 투자해 꾸밀 마음은 없으니 집은 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이가 아빠 목마를 탄 사진, 세 식구가 하트 장미 앞에서 껴안고 찍은 사진 등을 올려놓는 앤틱한 콘솔도 없고, 큰맘 먹고 산 예쁜 반려 식물 도 없고, 보기만 해도 마음을 가라앉혀 줄 멋진 그림이 걸린 벽도 없는 그저 그런 집. 가장 비싼 물건이라면 거의 매일 달콤한 낮잠을 선사하는, 두 손을 벌벌 떨며 샀던 까만 인조 가죽 소파와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맥북 에어가 비슷한 가격으로 경쟁할 듯하네요. 그래서 남이 구둣발로 들어와 정리한다고 해도 부들부들 떨며, 절대 안 돼!라고 외칠 정도는 아닙니다. 그나마 소중한 물건들이 담긴 나이키 상자를 한 번 더 못 열어보는 게 아쉽긴 하겠지만요.


만약, 만약에 우리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면, 멀리서 엄마나 동생들이 와서 우리 딸이, 사위와 손녀가, 우리 언니가 이렇게 살았구나 하며 눈물 바람을 하겠지요. 책상 앞에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을 보며 이 언니도 참 정신없이 살았구나 하겠지요. 그러다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읽다가 통곡을 하거나 아니면 엉덩이에 뿔나게 울다가 웃겠지요. 책 사이에서 비상금을 발견하고 주머니에 쏙 넣겠지요. 살 빼면 입어야지 하면서 깊이 처박아둔 옷들을 보고는 이런 것도 못 입어보고 살다가 갔구나 한 판 더 눈물 바람을 하겠지요. 내가 보내준 책들이 다 있네. 그런데 거의 안 읽은 듯? 이놈의 책들을 들고 갈 수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어쩐다? 아름다운 가게에 전화하면 가져갈 텐데 이 눔의 나라에서는 어째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다가 시간은 가는데 정리의 끝은 안 보이고, 그러다 결국 까만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쓸어 넣겠죠. 내가 무사히 집에 돌아와 놓고 남이 내 집 정리하는 상상을 이리 오래 하고 있네요.




영화배우 강수연 씨가 돌아가셨죠. 55세였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다면, 지금으로부터 남은 시간이 썩 많지는 않더군요. 플러스 마이너스 십 년! 내게 십 년의 삶만 남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죽음에 대해 다룬 많은 책들에서 이미 말하고 있지요. 많은 사람이, 아니 죽음을 앞둔 거의 모든 사람이 더 사랑할 걸, 더 많이 웃을 걸, 더 행복할 걸, 더 많이 여행할 걸, 후회한다고 말입니다.


죽음에 대한 상상과 죽음에 대한 소식 덕분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페 디엠(현재에 충실하라)을 외치며 살았지만 결국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를 되새기며 살아야 할 나이가 오고야 말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쓴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소설 <시티 오브 걸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흠흠, 번역가가 누구더라. 바로 나! ㅋ)


“젊음을 낭비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그 말은 틀렸어. 젊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고 그 보물을 귀하게 여기는 방법은 오직 낭비하는 것뿐이거든. 그러니 충분히 젊음을 누려라 비비안, 마음껏 낭비해 버려.”


네, 맞는 말인 것도 같지만 이제는 낭비해 버릴 젊음도 없네요. 이 말은 딸에게나 해 주고 (너무 낭비하지는 말라고 덧붙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고요) 저는 다른 주문을 외웁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버린 세월들과, 

얼마나 남았는지 절대로 알 수 없는 세월들 사이에 꽉 끼어 있는 오늘. 


오늘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오늘처럼 지겨운 혹은 오늘처럼 신나는 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주어질 수도 있겠지요. 


내게 얼마나 주어질지 가늠할 수 없는 그 오늘들을, 

아직도 청춘인 것처럼 신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날도 있고, 

이제 이만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우울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날들도 있는데, 

오늘은 약간 우울한 쪽이네요. 

신나든 우울하든, 더 많이 달라 조를 수 없는 그 오늘을, 

저는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쓰며 보냅니다. 

삶의 마지막과 죽음을 오래 생각해서 그런지, 

하루가 느리게 흐릅니다. 







Photo by Aron Visual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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