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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15. 2023

못다 이룬 꿈을 아직도 꾸고 있네



국민학교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국어 교과서에 희곡이 한 편 있었어. 엄마를 물가에 묻었다가 비가 올 때마다 개굴개굴 우는 개구리 이야기였을 거야. 분단 별로 연극을 준비했는데 내가 우리 분단 연출을 맡았어. 동선을 짜고 의상을 준비시키고 개구리 가면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주사기를 준비했어. 개구리가 비를 맞으며 우는 장면에서 가면에 뚫린 눈 구멍으로 주사기를 발사했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고 퓩 발사되어 버려 슬픔이 웃음으로 강제 승화되긴 했지만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참신한 아이디어였던 것 같아. 진짜 눈물을 흘리며 우는 개구리는 우리 분단 개구리가 유일했거든.


그랬던 나는 스물여섯에 극단에 들어갔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지하실에서 보내게 되었지. 처음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던 그 마음은 십여 년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도 생생해. 나는 분명 땅속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마음은 저 혼자 높은 하늘로 둥실 날아갔거든. 간절히 해보고 싶었던 일을 마침내 시작한다는 기쁨에 곰팡내 풀풀 나는 지하실도 멋져 보이기만 했지. 지방에서 상경해 얹혀살던 단원 언니들 숙소 역시 반지하였고. 그럼 어때. 내가 드디어 연극을 하기 시작했는데!

공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창문이 머리 위에 달린 좁은 화장실에서 씻고 앉은뱅이 화장대 앞에 앉아 로션을 바르면 거울 속 내가 실실 웃고 있었어. 좋아서. 행복해서. 살면서 뭔가를 열심히 한 적도 있고, 잘 해서 뿌듯한 적도 있고, 내 삶만 엉망인 것 같아 우울한 적도 있고, 그런 감정조차 사치였을 만큼 바빴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행복하다 싶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지금은 뭐, 다 옛날 이야기지. 애석하게도.


작년인가 잠시 한국에 갔을 때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봤어. 웅성웅성 객석을 채우던 소리가 암전과 함께 정지되었지. 어두컴컴해진 무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거야. 내 심장이 여전히 무대에 반응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무대가 내 삶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애통해 그랬을까. 그저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나. 그리고 그 짧은 암전의 시간에 생각했어. 배우들은 지금 얼마나 떨고 있을까. 분장을 하고 핀 마이크를 뺨에 붙이고 긴장된 마음으로 객석이 차기를, 암전이 되기를, 연극이 시작하기를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대본을 읽고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맞추고 의상을 만들거나 구해 입고 퀴퀴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오래된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로 분장을 해야 했어도 그저 좋았지. 아아아 하나둘셋 마이크 테스트를 하면서 내가 무대에 서는 배우라는 사실이,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황홀했지. 쨍한 조명 아래 서서 칠흑같이 어두운 관객석을 바라보며 무대를 가로지를 때, 작은 극장을 가득 채우던 또각또각 내 구둣발 소리. 마침내 공연이 끝나고 시원한 마음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던, 그런 시절.


그런 시절을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 한국 지겨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어!’라고 징징거리며 공연 없는 날 친구들에게 술을 얻어 마시고 있겠지.

텔레비전을 자주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는 좋아하는 편이야. 궁금한 사람들이 나오면 일부러 찾아서 보기도 해. 김영하, 김민섭 작가가 나오는 편도 찾아보았고, 조승우나 지진희, 신하균, 공유가 나오는 편, 내 사랑 방탄이들이 나오는 편도 보았고, 우연히 보게 된 임영웅 편도 재밌더라고. 그중에 요즘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 출연하고 있는 김고은도 있었는데, 그녀가 그랬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데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고. 1막이 끝나고 암전이 되었는데 무대에서 내려가기 싫었다고. 그만큼 강력한 감정은 지금껏 없었다고.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극장에서 스크린에 자기 이름이 뜰 때 희열을 느낀다고. 배우라는 건 참 감사한 직업 같다고. 맞아. 나도 그랬어. 내가 무대에 선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책을 사지 못해도, 여행을 가지 못해도, 먹고 싶은 걸 다 먹고살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 실제로도 그랬고.


그러다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할 때 마침 뱃속에서 쿨쿨 자던 아이가 일어나 발로 배를 뻥 찼지. 엄마 잘 하라고 공연 중에는 푹 자더니 다 끝나니까 잘했다고 손뼉 쳐 주는구나! 싶었어. 하지만 뱃속에 있던 아이가 밖으로 나오니 무대에 서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더라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해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거지. 결국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어. 이만하면 충분히 해보았다 싶어 그만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늘 아쉬웠지.


그래도 삶은 흘렀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나쁘지 않지만 찐했던 그 시절 행복의 맛이 아직도 혀끝을 맴돌아.


배우들이 시상식에서 곧잘 하는 말 있잖아. 계속 배우니까 배우라고, 더 많이 배워 더 멋진 연기를 하겠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단전에서부터 질투심이 타올라. 나도 그만큼 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계속 배우는 건 나도 정말 잘 할 수 있어서 말이야. 나는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안정보다 모험을 추구했고, 뿌리내리기보다 방랑하고 싶어 했어. 늘 지금과 다르게, 지금보다 더 배우고 성장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김고은도 그랬어. 배우야말로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직업이 아닐까 한다고. 그런 거라면 나도 늘 배우면서 멋진 배우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착각일지도. 처음의 그 열정도 결국 바래고 녹슬었겠지? 그러다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무대에서 제 발로 내려왔을지도 모르고. 가보지 않은 길이니 답은 알 수 없지. 지나간 일이니까 쉽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렇게 못다 이룬 꿈을 아쉬워하며 또 시절이 차곡차곡 지났는데, 그 사이 내가 또 자라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왜 거기가 끝이었다고 생각해?

그때 아니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은 아니잖아?


그래?

그래! 거기가 끝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중에 말이야. 내가 어쩌다 운 좋게 주인공의 친구의 할머니 역으로 영화에, 혹은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면 말이야. 대사도 몇 줄 없는데 자꾸 NG를 내서 화가 난 감독이 ‘아니, 저 아줌마 누가 데려왔어!’라고 소리를 쳐 모든 스태프가 얼어붙겠지? 그럼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애처럼 겨우 눈물을 참다가 집에 와서 소주를 들이부으며 대성통곡을 하겠지? 상상만 해도 웃기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그렇게 혼나기는 싫네.


그렇게 혼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까? 까짓것 내 무대는 스스로 만들어 버리지. 좋은 친구들과 허름한 공간에 나무를 깔아 무대를 만들고 조명도 한두 개 대롱대롱 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거지. 주인공 친구의 할머니 말고. 주인공 할머니로! 내 청춘을 지하에서 보내며 배운 온갖 잡기를 다 발휘해 극작도 하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면서. 드레스를 차려 입고 늘 배우니까 배우라고,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할 일은 없겠지만 소박한 공연이 끝나고 공연을 보러 온 벗들과 맥주에 취해 주정을 할 수는 있겠지. ‘사람은 말이야!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막 이러면서. 그럼 참 행복할 것 같아.


그래, 인생 길어. 여기가 끝이 아니야! 삶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 그러니 꿈도 과거형일 필요는 없잖아? 자고로 꿈이란 의지를 담뿍 담은 미래형이 더 어울리지. 자, 서랍 속에 넣어 놓았던 당신의 꿈도 꺼내봐. 꿈은 넣어 놓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 꾸라고 있는 거니까.


나중에 어떤 백발의 할머니가 어울리지도 않는 멜빵바지를 입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면 아마 나일 거야. ‘아니, 조명이 조금 더 옆으로 가야죠!’ ‘아니, 그 대사에는 감정이 조금 더 필요하지!’ 그러다 또 이렇게 외치겠지. ‘오케이, 좋아! 오늘은 그만하고 맥주나 마시러 갑시다!’ 그렇게 북적북적 사람들을 이끌고 단골 맥줏집을 전세 내는 멋진 할머니가 되겠어. 개구리 연극 준비하던 실력 녹슬지 않게 잘 갈고 닦아서 말이야! 아,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그래! 꿈꾸는 건 이렇게 신나는 일이었어!


아리 극단 배우 및 스태프 절찬리 대모집!


2032년 9월 20일 저녁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들고 아리 극단으로 오세요.

이런 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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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누구? 바로 당신! 그럼 우리, 십 년 후에 만날까요?




사진: Unsplashstefano stacch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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