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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Aug 07. 2024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맛있는 집은?

그리고 여행하기 좋은 나이



숙소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호주는 보통 횡단보도 오른쪽에 기둥이 있고 그 기둥에 달린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뚜루루루 소리가 나면서 곧 파란불로 바뀐다. 추억의 뚜루루루 소리와 함께 진짜 시드니 탐험이 시작된다.


배고프다. 뭐 먹을까? 아이가 묻는다. 

글쎄. 우선 시내 쪽으로 가면서 보자. 

어느 쪽이야? 

이쪽으로 가야 센트럴 역 지나 시내가 나와.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지! 일 년을 살았는데.


지금이야 처음 왔더라도 구글맵으로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지만 이십여 년 전 처음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는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거나 아니면 그냥 운에 맡겨야 했다. 그때 첫 숙소가 글리브Glebe에 있었는데 센트럴 역에서 가까운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왠지 그럴 것 같아 끌리는 쪽으로 무작정 걸었더니 다행히 센트럴 역이 나왔다. 첫날부터 운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여행자들의 그런 운을 구글맵이 다 빼앗아가버렸네. 온 우주가 나만 돕고 있는 것 같은 신나는 기분을 가져가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효율성을 옛다 던져주었지. 그 시절 낭만이 가끔 그립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시드니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센트럴 역의 오른쪽 동네다. 북쪽으로 조금 걷다 방향을 바꾸면 (내가 머리를 자르던 미용실이 있는) 피트 스트리트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조지 스트리트다. 엘리자베스 스트리트에서 방향을 바꿔 피트 스트리트에 접어드니 저 멀리 패디스 마켓이 보인다. 워킹홀리데이 시절 일하던 호텔 근처라 내내 나의 출퇴근 길이었던 곳이다. 마켓의 갈색 벽돌도 그 앞으로 다니던 트램 길도 그대로다. 그런데 곳곳이 마라탕이다. 마라탕이라니. 시드니에 마라탕이라니. 우리 집 앞에 널린 게 마라탕인데 여기도 마라탕이라니. 음식의 세계화는 정말이지 빠르기도 하구나. 


와, 우리 딸이 좋아하는 마라탕, 여기도 있네? 먹고 싶어?

엥, 아니. 굳이 여기까지 와서. 

(마라탕 싫어하는 내가 냉큼) 그래, 땡큐 베리머치. 그런데 진짜 없는 게 없네. 공차도 있어! 첫날부터 스테이크는 좀 그렇지? 너 멕시칸 먹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게. 맛있는 데가 있으려나?


그렇다. 우리는 맛집을 미리 검색해 오는 여행자들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 데서나 뭐든 잘 먹는 사람들이라 그런 건 아니고 (각자 나름의 기준과 취향이 확실한 편) 그저 게을러서 그런 것도 아닌데, 말하자면 여행지에서의 낯선 조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게 음식이든, 장소든, 사람이든. 더 이상 못 걷겠어서 무심코 들어갔다가 인생 파스타를 만나면 그것도 좋고, 새끈한 인테리어에 속아 들어갔다가 최악의 브리또를 먹어도 그 역시 오래 기억에 남을 테니 그것대로 좋은 그런 여행자들인 것이다.


사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여행을 함께 하다 보니 맛집 검색은 사치였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가게 되는 식당은 언제나 아이가 배고플 때 가장 가까운 식당이었다. 그래서 미리 정하는 게 소용없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자라 맛집 탐방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그러다 보니 그냥 움직이는 게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물론 오로지 미식을 위한 여행도 가끔 있다. 예를 들면 쿠알라룸푸르 한식당 탐방 (조호바루에는 없는 횟집과 냉면집 등), 베트남 쌀국수 기행 등인데 그런 여행에서는 모든 끼니의 식당이 출발 전 미리 정해져 있다. 물론 남편이 주도한다. 나는 ‘아무거나’를 외치며 조용히 따라다닐 뿐. 그리하여 이번 호주 여행 역시 ‘아무거나’ 대충 먹게 될 예정 아닌 예정이었는데,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조호바루에서부터 햇반과 육개장과 메추리알과 김과 너구리를 무겁게 끙끙 들고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엄청난 사건인데, 그야말로 내 여행 인생 중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일 년 전, 한국 음식을 왜 먹어? 라는 자세로 한 달가량의 유럽 여행을 떠났던 나는 한인마트도 없는 시골 동네에서 괴로움에 울부짖다가 대도시에 도착하자마나 신라면과 김치를 공수해 허겁지겁 들이키며 깨달았다. ‘이제 나는 한식 없이 여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래서 준비했다. 햇반과 육개장과 카레와 김과 메추리알 등등을. 하지만 첫날부터 비상식량을 탕진할 수는 없지. 


워킹홀리데이 시절에는 김치를 안 먹고도 일 년은 거뜬했는데! 일 년을 살면서 한국 슈퍼는 가본 기억이 없다. 사실 뭘 먹고살았는지 잘 모르겠다. 플랫메이트들과 코울스에서 장 보던 기억은 있는데 그걸로 내가 뭘 해 먹긴 했을까? 그전까지 요리라곤 해본 적도 없었는데? 유일하게 기억나는 끼니가 하나 있다. 내가 야심 차게 비빔면을 끓였는데 (아, 비빔면을 사러 한국 마트에 가긴 갔나 보다) 마침 플랫메이트가 귀가하자 무심히 한 입 권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걸 먹고 정말이지 우웩 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차가운 면의 맛을 모르는 가여운 사람들) 그리고 아침에 먹던 시리얼, 날씨가 조금 추워지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던 따뜻한 오트밀 죽 정도가 생각난다. 나머지 끼니는 대충 길거리에서 사 먹거나 밥이나 면에 닭고기나 소고기가 곁들여진 국적 짬뽕의 음식을 먹으며 살았겠지. 놀라웠던 것은 워킹홀리데이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고추장이 들어간 음식만 먹으면 속이 살살 쓰렸다는 사실! 그렇게 현지 음식에 완벽하게 적응했던 나의 위장도 이제는 늙었는지 고향의 맛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숙소 부엌에 푸짐한 먹거리가 먹음직스럽게 쌓여있다는 말씀. 그래서 춥게 걸으면서도 마음은 몹시 든든했다. 나 집에 육개장 있는 여자야! 여차하면 집에 가서 그거 먹으면 된다고!  


어쨌든 딱히 먹고 싶은 메뉴는 없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으니 바로 뜨끈한 국물이었다. 여행 첫날이니 다소 과감한 메뉴도 선택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생각과 다르게 발이 저절로 향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차이나타운 입구에 있는 패디스마켓 2층의 푸드코트였다.  


그곳에 기가 막힌 해물국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도 딱히 반대는 하지 않아서 이십 년 전 타던 바로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 있는 해물국숫집 앞에 섰다. 새우와 오징어도 넉넉하고 야채도 푸짐하며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뽀얀 국물의 해물국수. 넘치게 담긴 국수 한 그릇을 소중히 들고 자리에 앉아 한 술 뜨니 그제야 어깨가 좀 펴진다. 


연거푸 입에 떠 넣으며 여행하기 좋은 나이에 대해 생각했다. 마흔다섯. 위장은 살짝 반항을 시작했지만 체력은 아직 꺾이기 전. 어떤 상황이 닥쳐도 대충 해결할 수 있는 노련함. 아직은 귀찮음을 물리칠 수 있는 호기심.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서로 여행 코드를 딱딱 맞춰 온 열아홉 딸. 거뜬히 제 몫의 짐도 들고 심심할 때 말동무도 되고 귀찮을 때 이것저것 시키면 뚝딱 해결해 준다. 이를테면 개미만큼 작게 써놓은 와이파이 비번이 안 보일 때 ‘엄마 와이파이 좀.’ 하고 핸드폰을 내밀면 바로 해결. 구글맵 켜기 귀찮을 때 ‘거기까지 몇 분이나 걸릴까?’ 물어보면 바로 확인해 주고 내릴 곳도 알아서 알려준다. 덕분에 창밖만 바라보며 멍도 때릴 수 있다. 


하지만 딱 좋은 것들은 자고로 오래가기 힘든 법. 위장의 반란은 점차 심해질 것이고 (끼니때마다 고추장을 꺼내는 날은 제발 오지 않길) 귀찮음이 호기심 따위 가볍게 눌러버릴 날도 올 것이며, 아이와의 여행 궁합도 이제 몇 번 더 써먹고 나면 끝일 것이다. 아이는 곧 더 넓은 세상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겠지. 나는 햇반을 바리바리 싸들고 느릿느릿 어딘가를 떠돌거나 그러다 결국 어딘가에 자리 잡거나.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누려야지. 손발이 척척 맞는 여행 메이트와 매일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야지.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뚝딱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럼 조금 더 걸어볼까? 

그래!


주변을 조금 구경하다가 야외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플랫 화이트는 평범했지만 아이가 시킨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신기하게 (맥주처럼 따는) 병에 나왔다. 그렇게 낯선 것들을 포착할 때 짜릿한 기분이 든다. 그게 여행의 맛이지. 다른 사고, 다른 문화, 다른 방식을 접할 때 내게 익숙한 것들만이 정답이 아님을 깨닫는다. 짜릿한 기분으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몸과 마음이 마침내 이 여행과 동기화 완료. 


패디스 마켓에서 다시 조지 스트리트로 나와 북쪽으로 끝없이 올라가면 서큘러 키다. 쭉 올라가다 보면 내가 사랑하던 서점 다이목스가 있고 타운홀도 있고 성 앤드류스 대성당도 있고 퀸 빅토리아 빌딩도 있다.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추우니까 트램을 탄다. 두 정거장 후 퀸 빅토리아 빌딩 앞에서 내려 곧장 다이목스로. 워킹홀리데이 시절 영어 공부할 책을 사려고 수없이 드나들던 곳. 곳곳이 추억이다. 느릿느릿 둘러보는데 서점 특유의 나른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애써 막아내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아직 다섯 시 반인데 사위는 벌써 어둡다. 겨울이 맞긴 맞구나. 다시 트램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히터를 틀어놓고 나갔더니 이제야 집이 좀 따듯하다. 아직 하루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몸이 저절로 침대를 파고든다. 그리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우리가 한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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