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Aug 14. 2024

여행 첫날부터 침대에 누워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지


여행의 서막이 보딩 패스라면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은 보스락거리는 침대 시트를 들추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갈 때라고 생각한다. 늘 자던 침대가 아니라 지금 처음 누워보는 침대, 머리카락 한올 붙어 있지 않은 침대, 아침에 벗어놓은 옷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 않은 새하얀 침대 속으로 쏙 말이다. 그렇게 침대로 쏙 들어가면 여행지로 이동하며 쌓인 피로도 사르르 녹고 또 새로운 탐험을 할 힘이 솟는 것이다. 


춥다고 호들갑을 떨며 이불속으로 들어가는데 아직 충분히 따뜻해지지 않은 방안의 찬 공기도 덩달아 따라 들어온다. 침대에 파고들며 막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바로 여행의 절정으로 넘어가야겠다. 여행의 절정이 무엇이냐고?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절정은 인생샷도 아니고 줄 서서 먹는 맛집도 아니다. 바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혹은 지금처럼 침대에 파묻혀 신중하게 골라온 책을 펼치는 순간이다. 최고로 사치스러운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행까지 와서 굳이 책을 읽는다고? 노노, 여행 중이니 더더욱 책을 읽는다. 책을 펼치는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 창밖의 풍경 등이 힘을 모아 책 읽는 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인생에서 단 한 번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다. 어두컴컴한 방콕의 호텔에서 천둥소리를 들으며 읽었던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다섯 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 도착한 리조트 선베드에 누워 읽었던 오소희의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전부 다시 경험하기 힘든 순간들일 것이다. 그래서 여행 갈 때 읽을 책은 더더욱 신중하게 고른다. 이번 여행의 메이트는 이슬아의 <끝내주는 인생> 


이미 읽었지만 여행지에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아 또 가져왔다. 그래, 프롤로그부터 좋았지. 어느 강연이 끝난 후, 자신의 삶을 궁금해하는 할머니 독자의 이야기에 슬아 씨는 이렇게 말한다.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 할머니도 나도 모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할머니의 백발과 나의 흑발이 동시에 살랑인다. 건물 부서지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무대에 서서 수십 갈래로 뻗어나가는 내 인생을 본다. 그중 살아볼 수 있는 건 하나의 생뿐이다.”


그중 살아볼 수 있는 건 하나의 생뿐이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속절없이 책을 덮게 된다.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나 멋대로 흘러간다. 지금의 워홀러들도 그렇겠지만 그때도 워킹홀리데이를 1년 더 연장하거나 학교에 입학하거나 이런저런 방법으로 어떻게 든 영주권을 따 그곳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라고 외치며 쿨하게 돌아선 사람이었고. 


그런데 그때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더 오래 머물렀다면, 그러다 아예 자리를 잡았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게 가끔 궁금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여기서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럼 내 옆의 이 예쁜 아이는 아니겠지?) 정원 딸린 이층 집에 살고 있으려나? 세계 최고의 해변 본다이 비치에 서핑보드를 들고 주말마다 달려가는 삶도 괜찮겠지. 이제 물 따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말이다. 기왕지사 이런 곳에 산다면 날 좋을 때 시드니 하버에 띄울 보트도 한 대 있으면 좋겠군. 그렇게 갑자기 시드니 갑부가 된 삶을 상상하다가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던 적이 있어? 친구를 보며 저게 내 삶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적?


글쎄, 별로 없는데? 아, 완전 부자로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한 적은 있어.

(역시 너도 시드니 갑부가 되고 싶구나?)


솔직하고 애답다. 그래, 아직은 다른 생을 꿈꿀 만큼 삶이 힘들지 않나 보다. 다행이라 치자. 심플한 아이는 두고 어쩌면 인생 2회 차가 아쉬운 나만 혼자 또 생각에 빠진다. 되돌아가 바꿀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삶을 어디서부터 바꾸고 싶은지, 어느 순간부터 되돌리고 싶은지 말이다. 


몇 번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그랬어야 했어. 그때! 그러지 말걸! 


하지만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결론은 하나다. 나는 내게 주어진, 아니 내가 선택한 지금 이 삶을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생이 내 단 하나의 생이다. 


이쯤에서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질문을 또 던진다.


배 안 고파? 


계획 없는 여행자들의 고민이 또 시작된다. 배가 딱히 고프진 않지만 여행 중 소중한 한 끼를 스킵할 수도 없고 소중한 육개장을 첫날부터 해치워버릴 수도 없다. 갑론을박 끝에 메뉴는 피자. 에어비앤비가 있는 동네는 서리힐, 이십 년 전 살던 집에서 멀지 않았지만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동네다. 요즘의 서리힐은 시드니에서 가장 재미있는 동네라고 한다. 다양한 미술관과 갤러리, 극장, 창의적인 공간들, 예술가들의 영감이 넘치는 곳, 파인 다이닝과 나이트 라이프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피자를 향해 겨울밤 냄새가 나는 서리힐의 밤거리를 걷는다.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양 옆의 벽을 공유하며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라스하우스들을 지나 걷는다. 이 많은 집들에 다 누가 살고 있을까. 집세는 그때보다 많이 올랐을까. ‘라떼는’ 일주일에 작은방 90달러, 큰방 110달러였는데. 그렇게 옛날 생각에 빠져 걷는데 밤은 낮보다 더 춥다. 내일 당장 겨울옷부터 사야겠다. 이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아, 맞다. 우리 아무 계획도 없었지!





이전 02화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맛있는 집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