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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잔 Sep 19. 2022

연봉 1억 새언니가 부럽다

왜 전업주부냐고 묻지 마세요

 

“야, 너희 새언니 연봉이 1억이야. “


이종사촌 오빠 부인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병원의 간호사다. 늘 민낯에 티셔츠, 운동화 차림. 누가 봐도 수수하다. 언니는 시어머니가 손주 장난감이라도 하나 사줄라치면 “어머님, 이런 건 금세 질리니 새 거 살 필요 없어요. 돈 쓰지 마셔요.”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단다. 그런 새언니라서 1억은 더 놀라웠다. 나는 꽤 오랫동안 1억에 대해 곱씹었다.


‘오빠는 무슨 복이야. 우리 남편도 1억 벌어오는 와이프 만났으면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나를 만나가지구.’

‘오빠랑 언니네는 얼마 전 집 대출도 다 갚았다던데. 앞으로 오빠 아들 OO 이는 우리 아이보다 더 좋은 학원도 다니겠지?’

‘언니는 살림 같은 건 당연히 안 하겠구나. 나도 전문직이었다면 주부습진 안 걸렸을 텐데…….’


취업관문을 통과하기 전까진 내가 꽤 똑똑하고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여자가 능력이 없으면 불행해진다고 자주 말했다. ‘그래. 나도 장윤정처럼 성공하고 가정적인 도경완 같은 남자 만나 완벽하게 살아야지.’했다. 그 꿈 때문이었을까. 나는 고작 3개월 된 아이를 지방의 친정집에 맡겨두고 다시 일을 하러 올라왔다. 연봉은 새언니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비영리단체 홍보팀, 광고대행사 AE로 고생 끝에 얻어낸 마케팅팀 팀장 자리였다. 대학원까지 17년 동안 길어진 가방끈도 무용하게 만들긴 싫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여파로 회사 매출이 뚝 떨어진 상황인데, 육아휴직 1년 후 내 자리가 사라지는 것쯤은 이상하지 않았다. 엉덩이 찰싹 붙이고 버텨야 했다.     


하지만 내가 버틴 건 고작 3개월이었다.

출퇴근 버스에 오르면 친정엄마가 아이 사진이며 동영상을 여러 개 보내왔다. 휴대폰 화면 속 아이는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데 내 마스크 속은 매일 같이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툭하면 죄 없는 남편에게 신경질을 냈고, 어떤 날은 아동학대 뉴스를 읽고 화장실에서 몰래 울었다. 내게 평일은 회색의 시간이었다. 맥주를 준비해놓고 치킨을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내 연봉이 1억이었다면 어땠을까? 휴직 후에도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장됐다면? 3개월이 아니라 30년을 버텼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추석이었던가. 나는 전과 튀김이 가득한 식탁에 앉아 따끈한 고구마튀김을 맛보고 있었다. 친정집에 들른 새언니가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떻게 블로그로 돈을 버는 거예요? 부러워요, 그런 능력.”

육아휴직 중에 우연한 기회로 시작하게 된 아르바이트 덕분에 나는 재택근무 프리랜서가 되었다. 언니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듯 이것저것 구체적으로 물어왔고, 말끝마다 나를 능력자라 추켜세웠다. 연봉 1억이 나를 부러워한다니. 나는 금세 우쭐해져 버렸다.


언니는 곧 보건교사 임용고사를 칠 거라고 했다. 간호사 일은 노동 강도가 높고, 승진도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보건교사는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고 정년이 보장되니 합격만 한다면 지금보다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 후 언니가 퇴근 후에나 주말에 독서실에서 콕 박혀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고시생 엄마라니. 어휴, 나는 못해.’ 그렇게 나는 1억의 충격을 빠르게 지워갔다. 이전처럼 언니가 부럽지가 않았다.



친정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건 초봄이었다.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에 가는 대신, 매일 유모차를 끌고 나가 아파트 단지며 공원, 하천변을 걸었다. 꽃의 모양이 시시각각 바뀐다는 것도, 그렇게 갑자기 피고 금세 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해 봄엔 아이 사진만큼이나 많은 꽃과 나무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이제 막 일을 관둬서 그렇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생활? 티도 안 나는 집안일? 가을쯤이면 답답해서 백기들 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어느 가을날, 차를 몰고 수목원에 갔다. 나는 단풍나무 아래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는 낙엽을 밟는 느낌이 신기한지 뒤뚱뒤뚱 잘도 걸어 다녔다. 그런데 소리를 잘 들어보니 아이가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와자작 감자칩 씹는 소리가 났다. 바싹 마른 낙엽이 정말 많았다. 아이도 그게 재밌는지 활짝 웃어 보이며 내게 걸어와 안겼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코끝이 시큰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아이 곁에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구나.



서울에 사는 전체 가구 중 35%가 1인 가구라고 한다.

결혼 5년 차 이전의 신혼부부 중 무자녀 비율은 무려 44%다.

2010년, 그렇게 철옹성 같던 4인 가구의 숫자가 3인 가구에 역전 당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이렇게 다양해져서인지 “왜 결혼 안 해?”, “왜 아이 안 가져?”, “왜 둘째 안 낳아?”같은 질문은 사상이 촌스러운 사람들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유독 엄마들의 일에 대해선 이런저런 간섭들이 끼어든다. 잔소리를 일절 하지 않으시는 시아버지조차 복직을 앞둔 어느 날 “어릴 때는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해.”라며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친정엄마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여자도 벌어야지. 아이는 엄마가 봐줄게. 나가서 돈 벌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혼란스러웠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생긴 모습만큼이나 다양하고, 아이의 기질도 제각각 다르다. 그리고 이건 아이를 낳고 길러봐야만 정확히 알 수 있다. 또, 일도 연애와 같아서 그만둬봐야 그 진짜 가치를 알게 된다. 그래서 대학원 공부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전업주부가 천직일 수 있고, 오랜 경력단절로 자포자기했던 사람이 이전보다 더 일에 애착을 갖고 성공하게 되기도 한다. (전업주부였던 박완서 선생님은 40세에 다섯 아이를 다 키우고 데뷔해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 식구들만의 내밀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구는 시험관 시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내기도 하고, 다른 누구는 출산 후 부부관계가 급격히 나빠져 이혼 후 양육권 다툼에 대비해 꾸역꾸역 일을 해나간다.  


그래서인지 문화센터나 놀이터에서 만난 ‘맘’들끼리는 “지금 일을 하세요?,”, “취업 계획이 있으세요?” 같은 질문은 잘 하지 않는다. 그렇게 결정하고 살게 된 데까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아이가 몇 개월이에요?”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도 수다의 가지가 수 백 개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띵동’

컴퓨터를 그만 끄려는데 키즈노트 알림장이 도착했다.

3시는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걸까.

오늘은 바람도 선선하니 아이 데리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 봐야겠다.

감귤도 좀 챙기고 돗자리도 가져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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