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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Aug 01. 2023

죽어가는 시간에 문병하러 온 사람을 위로한 임종 환자

침묵을 능가할 언어는 없다

아름다운 임종이란? 

  생애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말씀이 없으십니다. 자아가 말의 영역인 의식보다는, 그가 돌아갈 곳 침묵의 영역인 무의식으로 진입하니 말수가 적어집니다. 그러나 임종 초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려는 욕망이 너무 강해 말수가 많아집니다.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어떤 것입니다. 아직 떠날 준비가 안 됐다는 겁니다. 


  막상 떠나려니 세상에 대한 미련도 한둘이 아닙니다. 놔두고 가니 미련이 있고, 아직도 돌볼 사람이 있어 슬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무의식 세계에 깊이 진입할수록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무의식이 준비시키는 죽음은 살려는 욕망이 아무리 강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아직 의식이 뚜렷할 때 죽음을 받아들이고, 뚜렷한 의식으로 가족과 지인에게 그가 돌아갈 곳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임종이 됩니다. 아름다운 임종은 임종의 시작부터 말수는 적고, 메시지는 강하게 남깁니다. 


부귀영화가 사라지고 남긴 것들

25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있던 지방 중소도시에 크게 성공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70대 후반인 그분의 아내와 잠깐 인연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소문을 들어보니, 그분 남편은 그 지역 산부인과 명의로 소문났었습니다. 지역 유지였습니다. 제가 이분을 알게 됐을 때, 노부부는 30평대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들이 사업한다고 아버지 돈을 끌어 쓰더니, 크게 부도가 나서 부부는 거의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합니다. 부인은 가진 재산만큼 당차기로도 유명했는데, 돈이 무너지자 그 당참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주변에서는 돈의 위력을 행사할 수 없으니 많이 약해지고 소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녀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던 저는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부귀영화를 경험한 사람이, 그 부귀영화가 사라진 후에 찾아오는 ‘속 깊은 겸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깊게 팬 눈은 사려 깊었고, 좀처럼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태도는 어떤 사람이라도 있는 그대로 다 이해하고 수용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즐겼으나, 특정 주제에 몰입하여 감정을 손상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끔 인생을 깊게 꿰뚫어 보는 예지도 돋보였습니다. 자녀 양육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선생인 줄 알았으면, 할 일을 다 한 거야.”   

   

  그분은 실패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잃은 그분을 겉으로는 동정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그분의 추락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그런 헛된 동정이나 뒷담화로 들려오는 비아냥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 받아야 할 것들”이라고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분은 없어질 것들을 미리 버리고 영원한 자산인 겸손을 얻었습니다. 그분의 아들은 탕자가 아니라, 부모님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영적 자산을 선물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에 의존하지 않고 바닥에서 제 인생을 다시 시작함으로 진한 인생 공부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가 목적인 사람에게 이런 해석은 잔인하고 받아들이기 힘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는 평생을 원망과 불평만 하다가 그만 화병에 걸리고 말 겁니다. 인생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에게, 부귀영화는 정말 아침 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죽어가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그분과 몇 주 동안 연락이 끊겠습니다. 그분은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주치의는 가족들에게 마지막을 준비하라 했습니다. 당뇨가 있긴 했어도 비교적 건강하셨는데, 저는 아내와 함께 그분이 입원해 있던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을 찾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그분이 평소 좋아하던 찬송가를 불러 드렸습니다. 그분은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찬송이 끝나자 말했습니다. “꿈속에서 당신들 부부가 지금 찬송을 감동적으로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꿈이 생시가 되네요.”


  이분은 다른 임종을 맞이하는 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어서 쾌차해서 다시 일해야 한다, 곧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족 걱정, 의료진에 대한 불만, 그리고 말기 암 환자의 두려움. 이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병환에 대하여 가족이나 병문안을 오는 분들에게 한마디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옅고 잔잔한 미소와 침묵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됐음을 알려줬고, 오히려 병문안 손님들을 위로해줬다고 합니다. 그분은 할 일을 다 했고 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남은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날 병실에서 나오면서 든 생각입니다. “죽어가는 시간에 그를 문병하러 온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는 가장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의 의지가 아닌, 인생의 깊은 연륜과 깨달음으로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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