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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Dec 08. 2019

45. ‘갈대’와 ‘억새’가 죽어가며 드러내는 삶

12월. 소멸의 계절인 겨울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낙엽이 썩어서 다가올 봄을 위한 자양분으로 거듭나듯, 탄생은 소멸이란 기반 위에서 이뤄집니다. 이 같은 순환의 원리를 잘 알면서도, 당장의 소멸은 늘 헛헛한 기분을 남기곤 합니다. 지나간 것은 그립고 아쉬운 법이죠.


찬바람에 흔들리는 건 사람의 마음만이 아닙니다. 바깥의 너른 공간으로 눈을 돌리면 함께 흔들리고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죽어가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들. 겨울이 덜 외로운 까닭은 갈대와 억새가 사람의 마음과 함께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촬영한 갈대.


갈대와 억새는 벼과 여러해살이풀입니다. 갈대와 억새는 같은 과에 언뜻 보면 생김새도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식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혼동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갈대와 억새를 서식지의 차이로 구분합니다. 억새는 주로 산과 들에서, 갈대는 주로 물가에서 자라기 때문이죠. 하지만 물가에서 자라는 물억새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서식지로 둘을 구별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갈대와 억새는 자세히 살펴보면 모양새로 확실하게 구별됩니다. 갈대의 색은 갈색에, 억새의 색은 흰색에 가깝습니다. 갈대의 키는 3m 내외로 1~2m인 억새보다 큰 편이죠. 기자는 둘을 사람의 머리카락 모양과 비교해 설명하곤 합니다. 갈대는 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억새는 잘 빗어 넘긴 부드러운 머릿결을 닮았습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어수선해 보이는 쪽이 갈대이고 정리돼 보이는 쪽이 억새입니다. 이름은 억새가 갈대보다 억세 보이는데 모양은 반대이니 재미있지 않나요?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촬영한 억새


어원을 살펴보는 일은 둘의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갈대는 굵고 단단한 줄기를 가지고 있는데, 속이 마치 대나무처럼 비어있습니다. 여기에 색이 갈색에 가까우니 갈색 대나무라는 말이 줄어들어 갈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듯합니다. 억새의 어원에 대해선 확실한 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억새에 손가락 베었다”(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상대에게 뜻밖의 손해를 보는 경우를 가리킴)는 속담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질기고 날카로운 잎 때문에 억새라는 이름이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이맘 때 갈대와 억새를 완성하는 것은 햇살입니다. 갈대와 억새가 머금었던 겨울햇살이 일제히 지평선에서 흩어지는 풍경은 찬란해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풍경입니다. 죽어가는 것들이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눈부신 삶. 하지만 잊지 마세요. 갈대와 억새는 여러해살이풀이란 사실을 말이죠. 죽어가는 것들 아래에서 뿌리는 겨우내 고요하게 또 다른 삶을 예비합니다. 우리가 다가올 봄을 준비하듯이. 겨울은 그런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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