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다

by 색감여행자

집에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원래 무언가를 할 때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단순히 스트리밍으로 듣는 것만으로는 아쉬웠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더해진다면, 유화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던 중, LP 플레이어와 LP 음반이 문득 궁금해졌다. 오래된 회화 작품들이 가지는 질감과 깊이처럼, LP 속 음악도 디지털과는 다른 감동을 줄 것 같았다.


첫 LP 음반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수많은 음악 중 어떤 것을 처음으로 선택해야 할까? 고민 끝에 클래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담긴 음반을 구매했다. 바늘이 턴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순간, 공간을 채우는 울림이 달랐다. (알고 보니 클래식 음반은 일반 대중 가요보다 훨씬 많고 재발매를 많이 한다.)


그 후로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을 때마다 클래식 LP를 틀었다. 처음엔 배경음악처럼 들었지만, 점점 음악 속으로도 깊이 빠져들었다. 시각적인 유화와 청각적인 클래식이 만나는 순간, 영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선율에 따라 붓질이 달라지고, 붓이 움직이는 속도도 변화했다. 음악이 그림에 영향을 주었고, 그림이 음악을 더 집중해서 듣게 했다. 이건 마치 귀로 들어온 선율이 마음에 와닿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문득, 직접 듣고 싶어졌다. 자연스럽게 클래식 공연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예술의전당 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신진 연주자의 공연을 보러 가기 시작했다. 미술관과 전시장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이제는 음악 공연장을 찾아가는 것이 또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림과 음악, 서로 다른 예술 분야를 경험하며 나는 예술을 더 다채롭게 느끼고 바라보게 되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예술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선택을 쉽게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지식이 있으면 제한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미술을 좋아하면 음악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 같았고, 음악을 좋아하다 보면 또 다른 예술의 형태도 궁금해졌다.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며 예술이 스며든 삶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본래 내향적인 성향이 강했다. 회사에서는 동료들과 협업해야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임감에 가까웠다.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동료들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해야 했지만, 내게 그 과정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업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일이라는 틀 안에서 관계를 맺어야 했고, 그 안에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로 인해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과 나는 예술이라는 ‘하나의 교집합’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우리가 공유하는 관심사는 업무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순수한 흥미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예술을 좋아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배경이나 직업, 성향과 상관없이 스스럼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안에서는 내향적이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더 솔직하게 꺼낼 수 있었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었고 몇몇은 나이를 초월한 예술친구가 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예술가이다. 그것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혹은 개발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는 관점 자체가 하나의 예술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예술로 인해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더 깊고 풍요로웠다.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유화와 클래식,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
그것들은 각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점점 더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있었다.

이전 06화개발자에서 예술가로, 그림을 시작한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