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문학, 문학 읽어주는 선생님
플로베르의 '보바리'는 연애 소설을 읽는다. 그녀 안에 쌓이는 연애의 기억 혹은 조작. 그녀는 점점 자신의 현실이 상상했던 것, 그리고 책에서 읽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요히, 하지만 숨길 수 없이 쌓이는 격정과 비례하는 불만과 불안.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떠나 새로운 여정을 결단한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알만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보바리'의 비극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그녀가 읽고 있던 그 소설. 연애에 대한 환상을 끊임없이 쌓아가게 만들었던 허구의 이야기들. '보바리'는 자신의 욕망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소설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스스로를 '대상화'한다.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과 소설 속 허구의 시선에 옭매었던 '보바리'. 그리고 파멸.
김영하는 그의 책 <읽다>에서 이 보바리를 현대적 의미의 오타쿠(일명 오덕)라 명명했다. 또한 문학의 역사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후예라고 평가했다.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세계- 내- 존재의 의미를 오로지 소설에서만 발견한 사람. 그/녀들은 소설을 읽으며 소설을 읽고 있는 현존하는 자아를 지우고 가상의 자아에 몰입했다. 소설 속 인물에 자신을 덧씌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여기의 자아가 소설 속으로 돌진하여 이곳/현실과 그곳/가상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을 거부한 셈이 된 것이다. 지워진 나, 덧씌워진 소설 속 인물.
이렇게 현실에서 지워진 나는 '나'만을 지운 것이 아니라 '현실'마저 함께 지워버린다. 조금 친절하게 말해보자면 '나'를 둘러싼 현실이 진정한 현실이 아니라고 믿게 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읽혀진 시공간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의 현실에서 배제되거나, 조롱당하거나, 비난을 받고, 도덕적 파멸의 길로 걸어가거나, 현실의 서사를 완성하지 못한 채 쓸쓸한 고독속으로 소멸한다. 이들은 실패한 것일까? 우리가 소설을 읽는 그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이러한 저주받은 경이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마담보바리'를 읽으며, '돈키호테'를 읽으며 그들을 조롱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소설을 읽는 우리는, 나-보바리, 나-돈키호테의 미묘한 긴장을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것을 '필요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학교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설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 우리가 은폐하는 것은 소설이 곧 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학생들은 소설읽기에 저항한다. 이 쓸모없는 일에 가담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고 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은 서사적 동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할 지 모른다. 세계는 서사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러니 학생들이 이야기를 거부할 리 없지 않은가. 그것이 아무리 쓸모없다손 치더라도 학생들에게 이야기란 미지의 섬이고 새로 개척해야 할 땅이 아닌가. 그러나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서사의 영토의 영주는 드라마와 영화라는 사실 말이다. 소설은 '적어도' 현실 세계에서 패배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해외에서 역수입되어 다시 인기를 끌더라도 그것은 한강의 인기이지 소설의 인기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서점에 가지 않는다.
영화와 드라마는 안전하다. 영화관과 거실의 소파는 안락하며, 당신과 드라마 혹은 영화 속 인물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해준다. 당신은 기꺼이 이 이야기들을 관전할 수 있다. 그것은 스포츠를 관전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아이언맨을 응원하고, 캡틴 아메리카를 응원하며, 유시진과 강모연을 응원한다.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없으며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소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역시 소설독자와 운명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이야기는 안전하게 소비된다. 소설이 끊임없는 몰입을 요구하는 반면, 영화와 드라마는 멀리 떨어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안전한 이야기들은 영화관을 나서거나, 드라마가 종영하면 안전한 방식으로 페이드 아웃된다. 당신과 내 삶을 침해하는 법 없이. 암전.
문학교사들은 간혹 학생들에게 선전포고하듯 말한다.(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소설 속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소설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소설은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소설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며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그러나 우리도 이것이 일종의 기만술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배운 문학-소설은 사실 수능 지문에 불과했다. 우리가 가르치는 문학-소설도 시험의 지문에 불과하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라고 한다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때로 학생들에게 '문학은 비극적 세계에 대한 전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문학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숨어 있고, 그 인간 군상들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 학생들은 대개 모두 믿지 않는다. 우리는 소설의 시점과 표현법과 인물의 유형을 가르친다. 인물에는 유형만이 있을 뿐 영혼이 없다. 우리의 문학 수업도 대부분 그러하다. 문학 수업에서 살아 있는 문학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소설 속 인물을 마치 유령이나 종이 인형인것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문학은 그러니까 일종의 수수께끼인 셈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일까요?'
문학 수업을 충실히 받은 학습자가 문학을 지루해 하는 것은 몰입이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배웠기 때문이다. 몰입이 불가능한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들을 이미지화하여 눈앞에 펼쳐 보이는 영화와 드라마의 서사가 더 입체적이다. 같은 의미로 소설은 영화와 드라마에 견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거의 유일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몰입이 필요하다. 그래서 등장인물과 나를 구분하지 못해야 한다. 보바리슴. 소설 읽기는 '관람'이나 '관찰'이라기 보다는 '체험'에 가까운 행위이다. 그래서 독자는 존재를 걸고, 자신을 등장인물에 덧씌워나가야 한다. 그 위험한 경험을 두고 우리는 보바리슴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래야 한다.
우리가 자꾸 거리를 두고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소설은 갑자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문학 수업 시간에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소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석이 아니고 몰입이다.
김영하의 <읽다>를 다시 인용해 보자. 소설 속 인물에 내 존재를 덧씌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다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67쪽)
다시 말해 몰입은 우리의 존재 일부를 등장인물로 바꾸어 놓는다. 혹은 존재에 덧씌워진다.
이제 우리는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몰입하고 경험하고 한탄하거나 내 존재를 다시 써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쓰잘데기 없는 책들을 읽고 말하고 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