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단편 - 윤이형의 '루카'
사랑이 지나간 자리. 그 자리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황량함만 남는다. 그 풍성하고 아름다웠던 '주관'의 세계가 사라지고 냉기마저 서린 '객관'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지나온 사랑의 자리에 빛을 불어 넣고 채색이 시작되는 것은 '시간'의 마법. 그러니 그 마법이 시작되기 전 차가워진 그 세계를 돌이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로 인해 돌이킬 수 없게 된 실수. 실수인줄 알았던 일들이 다시는 담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너'에게 박혔다는 사실. 그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관계에 무지하였던 것인지,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착취하고 학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지금 그는 자신이 머물렀던 사랑의 자리를 냉철하게 돌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지라기 보다는 불쑥 찾아온 손님. '너'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 루카.
루카는 '예성'이의 예명이다. '딸기'는 루카의 동성 애인이었다. 이야기는 '딸기-나'의 시선에 포착된 루카의 이야기다. 루카와 딸기는 영화 소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은 퀴어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 알게되었고 이를 인연으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사랑에 빠진다.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베개에 멀를 대고 옆으로 누운 채 나는 음, 하고 소리를 내보았다. 음, 음, 음? 음. 몇 번이나 그렇게 계속하는 동안 세상의 다른 모든 음들이 무음으로 변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침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해주지 않고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싼 공기는 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루카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기독교식 교육으로 자랐다. 딸기는 여전히 자신이 이성애자로 변할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의 반응에 힘겹다. 그러나 루카와 달리 딸기는 자신을 조금더 당당한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가족들 앞에서 커밍아웃했으며,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확인받으려는 뚜렷한 자아가 딸기다. 반면 루카는 나약하다. 아니, 딸기가 보기에 그렇다. 커밍아웃을 한 것도 아니고 얼떨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당당한 성적 주체라고 말하기 조금 어렵다. 그래서일까? 딸기는 아무래도 루카보다 조금 더 당당해보이고 자기 자링 뭔가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가까운 사람과의 인연이 끊기고 이제 세상에는 오로지 둘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래도 한때는 그 둘만으로도 충만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의외로 쉽게 균열된다. 예를 들어 루카가 딸기의 전화를 받지도 않고, 그에게 경로를 얘기해주지도 않고, 딸기가 아흔 여섯번이나 전화를 건 날이었다. 딸기는 자신의 궁금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사랑'.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사랑은 '정당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 사랑은 윤리가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간혹, 서로에게 잔혹한 법이다. 그러니 루카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때 끝까지 추궁하던 딸기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욕망과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잔잔한 폭력의 얼굴을 찾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딸기." 나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결국, 루카와 딸기의 관계는 저녁 해가 어스름에 지쳐 어둠 속에 풀어지듯, 사라진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 할 이야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폭포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새들의 절박함과 시리고 날카로운 열정이 아니라 생활이 만들어내는 무해하고 보드라운 거품들과 건강한 웃음이 더 많았으면 해. 네가 말없이 하고 있는 말들이 나를 기쁘게 했고 나는 너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너는 어땠을까. 너는 가족과 신앙, 가장 민감한 사춘기의 시간들을 같이 보내준 교회 공동체 사람들도 포기해야 했다. 정체성의 절반이 넘는 것을 버리고 나온 너의 마음이 나는 짐작되지 않았다.
너는 그런 적이 없니, 너는 물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 본 적이, 없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때가, 너에게는 정말로 한 번도 없었니.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는 잘못 깎은 연필심처럼 끊겨나갔따.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따위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말이 나온다 한들 거기서 허망하게 대화가 끝나버리는 일도 없었으며 방에서 음악을 들을 때 서로에게 방해가 될까봐 이어폰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네가 나를 떠나려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너에게는 나 말고도 신이, 부서진 부분이 많을지언정 가족이, 어떤 공동체가, 다른 삶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었다.
너는 나를 유일한 시민으로 갖는 사회가 되어야 했다. 네가 내 사회의 유일한 시민이었으니까. 너는 나를 온전해지게 하는 가족이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단 한 명의 친구였으며, 주기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지인이었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좀 더 나은 삶이었다.
나는 너라는 한 사람 속에서 그 모두를 찾고 구했다. 그 일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퀴어였고 어떤 식으로든 나와 닮은 말투와 표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비슷비슷한 상처와 흉터, 문화와 예술이라는 취향과 관심사, 세상을 좀더 재미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 실망스러운 가정환경과 좌절된 꿈이 적힌 소박한 목록을 지닌 사람들. 하지만 루카, 너의 얼굴은 누구와도 달랐다. 나는 누구에게도 너의 그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너는 내 세계에서 소수자였고 나는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싶어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활절 달걀을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먹었다. 오직 헤어진 사람들만이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다정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의 절반은 루카와 딸기의 이야기이지만, 이야기의 또다른 절반은 루카의 아버지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사랑에 관한 소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끝내 같아질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루카와 딸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이 여타의 사람들과 다른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은 사랑의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보이지만, 종래에 가서는 그 다름마저 동일성의 지옥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결국 사랑의 맨살임을 씁쓸하게 응시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낭만따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의 언어를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동일성의 지옥에 빠트리는 1차 집단은 가족이다. 그리고 이 가족은 동일성을 통해 정체성을 만들고, 동일성은 하나의 질서가 되어 서로를 단단히 묶어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족의 구성원들은 종래에 만들어진 그 동일성의 밧줄을 벗어나고, 어긋나면서 주체가 된다. 그러니 가족 모두와도 다른 동성애자를 만나야 하는 아버지의 충격은 가부장제의 충격과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지점에서 강한 양념을 하나 더 뿌린다. 종교. 루카의 가족이 기독교적 질서로 묶여 있었고, 기독교적 질서는 루카의 세계와 대치되면서 루카를 혼란과 절망으로 빠트린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신-권력-가부장 (뭐든 좋다)의 반성을 불러 온다. 그것은 루카의 죽음 혹은 동일성의 세계에서 아들을 추방한 아버지의 회한이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사자와 아이들이 평화롭게 한 공간에 앉아 있는 동물원 루한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지워져 있는 그 공간을 아버지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여정은 마치 순례와도 같다. 사막 한 복판에서 길을 잃고, 구원은 없을 것 같은 깊은 절망에 빠져들고, 그러다가 이 외로움의 사막에서 홀로 견뎠을 아들을 떠올리고,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기적처럼, 구원의 길이 열리며 루한이 나타난다. 그리고 루한은 사실, 동물원보다도 기도의 도시로 더 유명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연하게도, 루한에서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한평생 속해 살아온 교횔는 두 세계를 그는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느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것으로 그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그의 건강을 염려한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애도했고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그러나 이제 그는 갑자기 알게 된 것이었다. 살아 있는 아들을 죽은 사람이 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한평생 그토록 소중하게 지켜온 자신의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연한 수순으로 아들을 찾으려 할 것이고 자신의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딸기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딸기에게 아버지-목사는 권력/종교의 이름이고 딸기에게 이들은 억압이며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성과 참회를 받아들이기에 딸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루카에 대해서 딸기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였던 너는.
딸기는 자신의 삶과 생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나 루카를 잃었다. 딸기와 아버지는 모두 루카를 잃었으며 그 경로는 동일하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비슷한 게 아닐까. 그저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런 것이다. 하고 돌아서지만, 입에 남는 그 씁쓸한 맛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동일성에 대한 신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은 정중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정중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질적이지 않으며 이성애자들의 사랑과 그들의 사랑이 다르지 않음을, 또 다름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어떻게 같음으로 귀결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가 어떤 방식으로 상실을 다루는지 면밀하게 살피는 중인데, 그것은 이 세계가 아이들을 통째로 잃었을 때 어떤 식으로 애도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기억해야 하는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을 통해 잃어버린 그 언어를 되찾아야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상실과 기억을 붙잡아보고 싶은 것이다. 루카와 딸기를 에두르고 있는 세계는 이 소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소수자의 투쟁과 좌절이 소설에 배어나왔다면 오히려 이 소설은 사랑이 어떤 식으로 사랑을 배반하는지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스스로 자식을 버린 혹은 잃은 후에야 비로소 깨달은 세계의 참모습을 이보다 섬세하게 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고, 세계를 응시해야 한다. 응시된 세계는 여전히 사막과도 같고 좁은 갓길과도 같으며 도저히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들. 어째서 이들은 믿음 아니면 포기라는 구조에 매몰되어 있는 것일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어째서 양립하지 못할까? 어재서 그들의 신념과 사랑은 타자에 대해 맹목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배제적인가? 그것이 작가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의 관계인가? 소수자들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인 질문들이 정말 정중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이야기는 모호하다. 윤이형의 서사가 그렇듯 뭔가 핵심적인 사건이 생략된 채 동일성과 차이의 서사가 나선처럼 휘휘 꼬여서는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째서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세상에 살게 되었는지 탄식할 수 밖에 없다.
학생들과 이 이야기를 읽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성소수자이야기일 것이고, 종교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일 것이고,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루카/딸기와 예성/아버지라는 관계 속에서만 주인공 루카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혹은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두를 지우고 그냥 학생들이 발견한 이야기를 두고 철학적인 선문답을 주고 받을 지도 모른다.
가령 예를 들어
자신의 취미를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갈등,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는 데 결국 아버지가 내 취미와 진로를 인정하지 않을까요? 라고 묻는 학생들의 간절한 표정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들이 쓰던 시나리오의 결말을 이어쓰게 하고 싶다. 어떤 이야기들이 완성될까? 그 시나리오는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왕따가 된 두 소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가 뇌를 공유하는 세상에서 뇌를 공유하지 못해 취직도 진학도 불가능해져 버린 두 소년이 끝내 뇌를 공유하는 수술을 거부하는 이야기. 그리고 어째서 뇌를 공유하는 수술을 거부했는가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학생들은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