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이야기
작은 다락방에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청년 병수가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간 지 두 시간째였다. 방 안의 눅진한 공기는 불안감과 희미한 숯 냄새로 가득했다.
“조직이 노출됐어.”
세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기대어 혹시 모를 감시를 살폈다.
“병수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문제야.” 영희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핵심 자료를 없애야 해. 특히 인쇄에 썼던 활자판과 연락책 명부.”
활자판은 무게가 나가고, 명부는 너무나도 민감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순사 손에 들어가면 이 작은 독서 모임을 넘어 경성 전체의 연락망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누가 가져가지?” 세진이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신뢰하는 동지들조차 지금은 추적당할 위험이 컸다. 그들 모두는 이미 순사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내가 갈게요.” 가은이 나섰다.
어깨에 걸친 낡은 담요 아래로, 그녀의 눈빛은 전에 없이 단단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라’는 그녀와 상관없는 시험 과목일 뿐이었지만,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넌 안 돼.” 세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옷차림은 너무 눈에 띄어. 게다가 일본어조차 제대로 못 하잖아.”
“하지만 그게 오히려 안전해요.” 가은이 반박했다.
그녀의 현대적인 복장과 외계인 같은 생김새는 이곳 사람들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난 조직원이 아니잖아요. 나를 끌고 가봤자 나올 이야기가 없어요. 미친 사람 취급하겠죠.”
영희가 조용히 세진의 팔을 붙잡았다.
“세진아, 가은이가 맞아. 우리 쪽 애들보다 차라리 가은이가 안전해.”
그녀는 가은에게 낡은 보자기를 건넸다. 안에는 묵직한 금속 활자들과 기름종이에 싸인 명부가 들어 있었다.
“폐기 장소는 알아? 남대문 밖, 진고개 흙담 옆에 쓰레기를 모아 태우는 구덩이가 있어. 해가 뜨기 전까지 모두 태워야 해.”
가은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등에 멨다. 그 무게가 마치 조선의 수백 년 역사를 짊어진 듯 무거웠다.
새벽의 경성 거리는 춥고 축축했다. 매캐한 연탄 연기와 콩기름 냄새 대신, 오늘은 매캐한 긴장감만이 가은의 코를 찔렀다. 그녀는 익숙지 않은 흙바닥을 걸으며, 최대한 주변을 살폈다.
'진짜 총알도 진짜고, 체포도 진짜'라는 영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은 더 이상 ‘체험학습’이나 ‘VR 게임’이 아니었다. 어제 병수가 끌려갈 때, 책을 움켜쥐려던 그의 손끝이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진고개 흙담까지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좁은 골목을 돌아 나오는 순간, 가은은 숨을 들이켰다. 골목 모퉁이에 순사 두 명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장날 아침 가은을 의심했던 그 순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검은 제복과 허리에 찬 칼집은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가은은 몸을 벽에 바싹 붙이고 지나가려 했다. ‘나는 그냥 길 잃은 학생이야. 아무것도 몰라.’
그녀의 행색은 어둠 속에서도 튀었다. 게다가 발밑에 뒹굴던 깡통을 잘못 밟아 ‘쨍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순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이! 소코노 쇼죠! 나니 오 시테이루!” (거기 소녀! 뭐 하고 있는 거냐!)
순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가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세진처럼 능숙한 일본어로 거짓말을 꾸며낼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와… 와타시와…”
“헤이! 코노 후쿠와 난다?” (이봐! 이 옷은 뭐냐?)
순사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상하다는 듯 가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순사는, 가은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등에 짊어진 묵직한 보따리를 꽉 붙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따리 안에 뭐가 있나?”
가은은 순간적으로 보따리를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의 필사적인 행동은 오히려 순사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코레와 다레노 모노다!” (이거 누구 물건이야!)
순사가 거칠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가 몸을 비틀자, 등 뒤의 보자기가 풀리며 활자판 몇 개가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철컥.’ 금속이 흙바닥과 부딪치는 소리.
순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떨어진 활자를 주워 들더니, 그것이 격문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는 조선어 활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가은은 저항했지만, 강한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다른 순사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양 팔을 뒤로 꺾어 붙잡았다. 고통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놓아주세요!”
그녀의 필사적인 조선어 외침은 순사들에게 더 큰 의심을 안겨주었다. 순사는 다른 순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부로 이송! 이 아이… 뭔가 수상하다. 아니, 이 아이는 분명히 그들 중 하나다.”
손목에 차가운 쇠고랑이 채워지는 순간, 가은은 깨달았다. 자신이 현실을 외면하며 피하려 했던 이 차갑고 냉혹한 역사 속에, 진짜로 갇혀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