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y강성 Oct 09. 2024

로마인 이야기 2권 (1)

한니발 전쟁 - 제1차 포에니 전쟁과 그 이후

제2권 『한니발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33년에 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과 ‘제2차 포에니 전쟁’의 130년 세월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마인에게 이 시대는 대외 전쟁의 시대였다. 이 전쟁은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와 시리아에까지 영향이 미쳤다.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241년


메시나의 구원 요청


기원전 265년, 로마 원로원은 전례없는 난제 앞에서 고심하고 있었다. 구원을 청해온 메시나의 대표에게 회답을 주어야 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시나는 시칠리아의 최강국 시라쿠사(이탈리아어 Siracusa)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카르타고와 로마 중 어느쪽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로마파가 우세하게 되었다. 바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레조가 ‘로마연합’에 가입해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전 카르타고(짙은 색)와 로마(회색) 지배 지역 출처 본문]

그러나 지원을 요청받은 로마는 망설이고 있었다. 로마인은 법을 존중한다. 동맹관계에 있는 우방이라면 구원을 요청받았을 때 응하는 것이 의무지만, 메시나와는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메시나에 가려면, 좁은 해협이라고는 하지만 바다를 건너야 한다. 로마 군단은 군선(軍船)은 있지만, 수송선단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가 지원 요청을 거절하면, 메시나는 카르타고에 의지할 게 뻔하다. 더구나 기원전 3세기 중엽인 이 무렵, 카르타고는 이미 시칠리아의 서쪽 절반을 자기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동쪽 절반에 건재한 시라쿠사와 메시나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완충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출처 본문]

원로원은 여전히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시민권 소유자, 즉 병역 의무자들로 구성된 민회가 내린 결의는 메시나의 요청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참전을 결의했다고는 해도, 이 참전이 카르타고와의 정면 대결로 이어져 제1차 전쟁만도 23년 동안이나 계속되리라고 생각한 로마인은 하나도 없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첫해인 기원전 264년, 메시나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군을 이끌고 간 집정관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덱스(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카이쿠스의 동생)였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공화정 수립 당시부터 로마의 명문이다. 대대로 평민계급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해온 것으로도 유명한 가문이었다.


메시나에 도착한 뒤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환영 나온 메시나의 주민 대표를 만나 로마와 메시나의 동맹 협정을 맺었다. 메시나를 지원하기 위한 군사 개입이 명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 민족인 시라쿠사와 페니키아 민족인 카르타고는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용병을 주축으로 한 시라쿠사군은 비록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시민으로 구성된 로마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금방 격파당하고, 참주 히에론을 앞세워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군도 시칠리아에 있는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파견된 군대에 불과했다. 시라쿠사군과 마찬가지로 간단히 격파당하고 말았다.


시라쿠사와의 강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2년째에 해당하는 기원전 263년, 원로원은 시칠리아 전선에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발레리우스와 오타틸리우스를 둘 다 파견했다. 지난해의 집정관 클라우디우스는 후임자 두 사람에게 전선을 인계하고, 휘하 병사들과 함께 귀국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1년마다 총사령관과 병사들이 모두 교체되었다.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2세)은 세습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왕위를 획득한 사람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통찰력이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다. 그리스 민족과 페니키아 민족은 예부터 사이가 나쁘다. 히에론도 메시나와 마찬가지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했다.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과 아르키메데스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쪽에서 제시한 강화 조건은,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하고 병력 제공 의무도 없이 약간의 배상금만 지불하는 간단하고 관대한 것이었다. 싸우는 시늉조차 못하고 투항한 상대에게 제시한 조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은 로마와 강화를 맺기로 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동맹을 지켰다.

[시라쿠사 출처 구글 이미지]

아그리젠토 함락


로마와 시라쿠사의 강화로 위기감이 높아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로마와 맞붙을 것을 결의한다. 육군과 해군을 합쳐 4만이 넘는 대군이 시칠리아 남쪽에 있는 아그리겐툼(오늘날의 아그리젠토)에 상륙했다. 카르타고 본국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아그리젠토를 로마에 대한 전진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드디어 로마와 카르타고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곧 ‘포에니 전쟁’(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이라는 뜻이다)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시기에 들어선 셈이다. 기존까지는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으면 로마는 바다에서 손도 씻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카르타고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역학관계였다,

[제1차 포에니전쟁의 격전지 출처 본문]

당시 로마가 시칠리아에 남겨둔 병력은 1만 5천 명에 불과했다. 아그리젠토에 대규모 병력이 상륙한 사실을 안 로마 원로원은 4개 군단을 다시 시칠리아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집정관 두 명이 이끄는 로마군은 아그리젠토를 포위했지만, 그 후의 전황은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12월, 포위된 생활에 지친 카르타고 병사들이 밤중에 몰래 아그리젠토를 탈출하여 안전한 마르살라로 도망쳐버렸다. 주민만 남은 아그리젠토는 그로부터 며칠 뒤에 함락되었다. 승리자로 입성한 로마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2만 5천 명이나 되는 주민을 노예로 삼았다. 이로써 시칠리아 다른 도시들의 로마에 대한 태도를 경화시켰다.


오랫동안 카르타고 세력권이라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그리젠토의 함락으로, 로마는 이제 되돌아설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버렸다. 시칠리아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카르타고와 전면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그리젠토의 '콘코르디아'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리파리섬에서의 패배


기원전 261년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에서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는 한 시칠리아를 제패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제해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은 해군이 없이는 실현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에는 카르타고의 전함에 필적하는 5단층 갤리선 따위는 한 척도 없었다. ‘로마 연합’에 가맹한 항구도시가 소유하고 있던 군선은 기껏해야 3단층 갤리선이 고작이었다.


100명의 노잡이가 필요한 3단층 갤리선에서는 전투원이 한 척당 100명이었다. 5단층 갤리선의 노잡이 수는 300명, 전투원의 수도 역시 300명이었다. 5단층 갤리선은 노잡이 단이 5층이나 되기 때문에 배의 높이도 훨씬 높아진다*(이 부분은 좀 잘못된 것 같다. 5단층도 노잡이가 5명이지만 3단이었다고 한다).

[3단 노잡이와 5단 노잡이 출처 본문과 나무위키]

군선 건조술이 전혀 없는 로마는 카르타고를 모방하기로 했다. 메시나해협을 처음 건넜을 때 노획한 카르타고의 5단층 갤리선이 있었다. 로마인은 그것을 해체하여 하나하나 복제하는 방법으로 군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5단층 갤리선 100척과 3단층 갤리선 200척으로 이루어진 로마 최초의 해군이 탄생했다.


기원전 260년 로마 해군의 지휘를 맡은 것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후세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였다. 육전에서는 눈부신 공훈을 쌓은 그도 해군을 지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해에 로마는 스키피오에게는 해군을 맡기고, 두일리우스에게는 육군을 맡겨, 모두 시칠리아 전선에 파견하였다.


스키피오는 뒤처진 아군 선박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 가지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가까이에 있던 17척만 이끌고 리파리섬을 점령하러 간 것이다. 이 정보를 파악한 카르타고 함대는 재빠르게 밤중에 리파리섬 앞바다에 도착해 항구 출입구를 봉쇄했다.


이튿날 아침,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위에서 눈을 뜬 로마군 병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을 알았다. 선원들은 산으로 달아났지만, 집정관 스키피오를 비롯한 로마 병사들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후속 함대는 카르타고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모두 무사히 메시나에 입항했다.

[리파리 제도와 리파리섬 출처 구글 이미지]

최초의 해전 승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쩔수 없이 육군 담당 집정관인 두일리우스가 해군 지휘관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는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 그때까지 어떤 민족도 배 위에 설치한 적이 없는 신무기를 고안해냈다. 로마 병사들은 그것을 ‘까마귀’라고 불렀다.


‘까마귀’는 항해 중에는 뱃머리와 가장 가까운 돛대에 로프로 고정되어 있는 일종의 잔교다. 뱃머리부터 적선에 접근하면, 돛대에서 풀려난 ‘까마귀’는 적선 갑판으로 떨어진다. ‘까마귀’ 끝에 붙여놓은 날카로운 철제 갈고리가 낙하할 때의 힘으로 갑판에 꽂혀 고정된다.

[출처 본문]

두 함대는 밀라초 앞바다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군선의 수만으로도 카르타고는 로마 해군의 1.5배가 된다. 또한 항해술의 차이는 문외한이 보아도 명백했다.


하지만 뱃머리가 부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해온 로마 군선에서 큰 소리를 내며 ‘까마귀’가 떨어졌다. 카르타고 선박의 갑판에 파고든 ‘까마귀’를 따라 로마 병사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로마 군단의 중추라고 일컫는 중무장 보병들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전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서 전개되었다. 침몰한 카르타고 선박이 15척. 노획된 카르타고 선박이 30척. 그중에는 카르타고 해군의 총사령관이 타고 있던 장선(將船)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총사령관은 전령용 쾌속선을 타고 도망쳤기 때문에 포로가 되는 것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3천 명. 포로는 무려 7천 명에 이르렀다.


두 번째 해전 승리


기원전 257년에는 로마가 해전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때의 전쟁터는 시칠리아 북쪽 바다에서도 팔레르모에 가까운 해역이었다. 오늘날 시칠리아 자치지역의 수도인 팔레르모는 당시에는 시칠리아 서해안의 항구 도시인 트리팔리와 마르살라와 더불어 카르타고 세력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 로마는 이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타고의 손실은 분명치 않지만, 밀라초 앞바다에서 입은 손실만큼 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로마인에게 자신감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로마는 전쟁터를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 본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해전 승리


기원전 256년 봄이 찾아오자, 로마는 새로 건조한 230척의 군선을 진수했다. 카르타고는 250척을 바다에 내보냈다. 로마도 카르타고도 거의 모든 선박이 5단층 갤리선이다. 이만한 전력이 한 해역에 투입되는 것은 지중해 해전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칠리아 남쪽의 리카타에서 승선을 마치고 아프리카를 향해 남서쪽으로 항로를 잡고 있던 로마 함대 앞에, 이미 전열을 갖춘 카르타고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250척의 카르타고 함대는 카르타고 선원의 우수한 항해술을 과시하며 중앙과 양쪽 날개로 나뉘어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해전의 정석에 충실한 활 모양의 진형이었다.


로마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두 집정관은 이 카르타고 함대와 싸우기 위해 전례없는 원뿔 모양의 진형을 편성했다. 장선 두 척을 앞세운 집정관 레굴루스의 제1선단과 집정관 불소의 제2선단이 적의 중앙부를 공격하는 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세번째 해전의 대형도 출처 본문]

로마의 제1선단과 제2선단의 공격은 카르타고의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 두 선단의 집중 공격을 받은 카르타고 해군의 중앙부는 어느덧 패주하기 시작했다. 육지로 인해 퇴로가 막힌 상태로 로마 함대에 둘러싸인 카르타고의 좌익은 침몰하거나 사로잡혀 전멸하고 말았다.


로마가 잃은 배는 24척. 카르타고 쪽의 손실은 침몰한 배가 30척에 사로잡힌 배가 63척이었다. 카르타고는 세 번째 해전에서도 로마에 패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패배


아프리카 북해안으로 바싹 다가온 로마군은 적군 함대가 배치되어 있는 수도 쪽의 카르타고만(灣)을 피해, 거기서 곶을 돌아 동쪽에 있는 클루페아해변에 상륙하여 이곳을 아프리카 전선의 기지로 삼았다.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몰타섬과 판텔레리아섬도 이미 로마군에 점령되어 있었다.

[출처 두산백과]

기원전 255년, 봄이 막 찾아온 그 전쟁터에 우선 카르타고군이 투입되었다. 보병 1만 2천 명에 기병 4천 명, 그리고 코끼리 100마리. 군대 규모로는 중간 정도지만, 총지휘는 용병으로 불러 들인 스파르타인인 크산티포스가 맡았다.


도전에 응한 집정관 레굴루스의 로마군은 보병 1만 명에 기병이 500명. 보병은 로마군의 중추인 중무장 보병만으로 구성된 정예부대다. 다만 코끼리는 한 마리도 없다. 레굴루스는 신임 집정관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공을 세우려고 무리하게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대의 코끼리는 근대전의 전차와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 집정관 레굴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아무리 정예부대라 해도 보병 수에서 이미 열세인데다 기병의 수는 8분의 1밖에 안 되고, 게다가 ‘전차’는 한 대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로마군은 제1차 포에니 전쟁 10년째에 처음으로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해군이 기다리고 있는 클루페아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한 병사는 2천 명에 불과했다. 8천 명이나 되는 로마 병사들의 시체가 전쟁터에 방치되었다. 집정관 레굴루스를 비롯한 500명의 병사가 포로로 붙잡혔다.


네 번째 해전 승리와 해난 사고


이미 로마를 떠난 신임 집정관 두 명은 아프리카로 가는 길에 들른 시라쿠사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상황이 완전히 변했는데도, 그대로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클루페아에 있는 7천 명의 병력과 40척의 군선과 선원들을 방치해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만에서 북동쪽으로 돌출해 있는 헤르마이움곶(오늘날의 봉곶) 앞바다에서 로마와 카르타고의 네 번째 해전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로마군이 이겼다. 카르타고는 114척이나 되는 군선을 침몰이나 화재로 잃었다. 기원전 3세기의 카르타고는 해운국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강력한 해군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칠리아로 철수하던 로마군도 시칠리아 남해안까지 왔을 때 엄청난 태풍을 만났다. 230척으로 이루어진 로마 함대는 절대 금기사항을 어기고 바람과 비와 거센 파도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해안으로 접근해갔다. 결과는 지중해사상 최대라고 일컫는 해난사고였다. 이 해난사고로 로마는 6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카르타고의 강화 제안


로마에는 최악의 결과로 끝난 그해 겨울, 카르타고에서 강화 사절이 로마를 찾아왔다. 지금이야말로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화 사절은 카르타고인이 아니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포로로 잡은 레굴루스를 강화 사절로 보냈던 것이다.


로마에 도착하여 원로원 의원들 앞에 선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의 감시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카르타고 쪽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 되는 행동을 취했다. 카르타고와 강화를 맺으라고 설득한 게 아니라, 오히려 맺지 말라고 설득한 것이다.

[카르타고로 돌아가는 레굴루스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원로원은 레굴루스의 참뜻을 이해하고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약속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간 레굴루스를 카르타고인은 동그란 바구니 속에 가두고, 코끼리들이 그것을 축구공처럼 걷어차게 하는 방식으로 죽였다.


팔레르모 함락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도 이제는 필요없다고 해고해버렸다. 군사력으로 시칠리아를 제패하기로 결정한 카르타고는 로마군과의 싸움에서 위력을 보인 코끼리를 140마리나 시칠리아에 상륙시켰다.


기원전 254년 봄, 로마도 두 명의 집정관과 두 명의 전직 집정관이 이끄는 병력을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파견했다. 로마군의 집정관 한 명은 로마가 해군을 가진 첫해에 리파리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그 후의 포로교환으로 귀국한 스키피오였다. 또한 전직 집정관은 둘 다 시칠리아 남해안에서 일어난 해난사고의 책임자였다.


로마는 일찌감치 메시나와 팔레르모 중간에 있는 체팔루 공략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메시나에서의 보급로가 확보되었다. 로마군의 팔레르모 함락은 이듬해에야 이루어졌다. 팔레르모 주민들 가운데 친로마파가 대세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팔레르모 출처 구글 이미지]

이제 시칠리아 전체에서 카르타고 쪽에 남은 것은 남해안에 있는 헤라클레아, 그 서쪽에 있는 셀리누스(오늘날의 마리넬라 셀리눈테), 릴리바이움(오늘날의 마르살라), 드레파눔(오늘날의 트라파니)뿐이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시칠리아 서쪽의 항구도시여서,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두 번째 해난 사고


기원전 253년 겨울철 휴전기를 이용하여 시칠리아를 떠나 모국으로 돌아가던 로마 함대가 이탈리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을 때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다. 또다시 로마 해군은 150척 가까운 배와 수많은 인명을 잃었다.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53년에 바다에서 잇따라 일어난 참사로, 그처럼 대단한 로마인도 기가 꺾여버린 모양이다.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는 해군 재편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북해안 사이에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해 60척의 군선을 파견한 것이 고작이었다.


팔레르모 공방전 승리 - 코끼리 부대 격퇴


반면에 로마의 두 번째 해난사고를 알게 된 카르타고는 지금이야말로 팔레르모를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카르타고는 150마리로 늘어난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마르살라를 떠나 팔레르모로 진격했다. 바다에서는 태풍을 무서워하고,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무서워 벌벌 떠는 형편이니, 이해의 로마군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이듬해의 집정관 선거를 위해 수도로 돌아간 동료를 대신해서 팔레르모 방어를 맡고 있었던 사람은 집정관 메텔루스였다. 그는 코끼리에 대한 병사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판단했다. 팔레르모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바깥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메텔루스는 이 해자를 더 깊고 더 넓게 팠다. 그리고 바닥은 사람조차 걸어다니지 못할 만큼 좁게 팠다.


코끼리떼와 뒤따라오는 적의 주력부대가 시내를 건너자마자, 적병이 아니라 코끼리떼를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을 다 던진 뒤에는 쏜살같이 성벽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코끼리는 일단 내닫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다. 화가 잔뜩 나서 쿵쿵 지축을 울리며 흙먼지 속을 돌진해온 코끼리들은 대부분 해자 속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팔레르모 공방전은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포획한 코끼리 10마리 외에는 대부분의 코끼리가 목숨을 잃었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2만 명을 헤아렸고, 지휘관과 함께 마르살라로 도망칠 수 있었던 병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팔레르모 대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전투를 지휘한 카르타고 장군은 본국으로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지휘관이 사형에 처해진 건 두 번째였다. 카르타고인은 패전 책임을 묻지 않는 로마인과는 정반대 방식을 취하는 민족이었다.


첫 번째 해전 패배 - 집정관 풀케르


코끼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로마인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잊기 시작했다. 기원전 250년, 이탈리아 각지의 조선소에서 200척의 군선이 진수되었다. 그해에 로마는 새로 편성된 함대와 4개 군단을 마르살라 공략에 투입했다.


이 마르살라를 방어하기 위해 카르타고는 1만 명의 용병을 파견했다. 트라파니에는 대함대를 파견했다. 또한 본국에서는 10만 명의 용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 본국에서 본격적으로 병력이 투입되는 바람에, 로마군의 마르살라 공략은 난항을 거듭했다.

[마르살라 출처 구글 이미지]

이듬해인 기원전 249년, 제1차 포에니 전쟁도 어언 16년째를 맞이했다. 이해에 준비를 갖추고 출정한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다. 포에니 전쟁 첫해에 과감한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는 같은 가문에 속한다.


풀케르에게는 220척의 군선으로 편성된 함대를 이끌고 바다 쪽에서 트라파니를 공격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가 카르타고군을 트라파니에 묶어두고 있는 동안, 또 한 명의 집정관인 유니우스는 마르살라 공격을 맡게 되었다.


로마 함대가 트라파니 항구 근처에 도착할 때를 기다려, 마침내 카르타고의 함대가 수평선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항구에서 대기 중인 트라파니 함대를 포위할 작정이었던 로마 함대는 오히려 벼랑으로 둘러싸인 해안선을 등지고 포위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와 벌인 해전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220척 가운데 93척이 포획되고 30척이 침몰했으며, 2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과 선원들이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집정관 풀케르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도 로마로 소환되어 1만 2천 데나리우스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전쟁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출전 하기 전에 상례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 의식을 소홀히했다는, 지휘관에게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것이다.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 귀족인 그도 막대한 벌금을 냈기 때문에, 대대로 살아온 저택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파견


기원전 247년에 카르타고는 젊고 유능한 장수를 시칠리아 전선에 파견했다. 바르카-페니키아어로 번갯불이라는 뜻이다-라는 성을 가진 하밀카르가 바로 그였다. 30대 초반이었던 하밀카르는 나중에 로마인의 악몽이 된 한니발의 아버지다. 하밀카르가 시칠리아 전선을 담당하게 된 기원전 247년은 전쟁사상 최고의 전술가로 꼽히는 한니발이 이 세상에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능한 사령관을 파견해놓고는, 그를 계속 강력하게 지원해야 할 본국 정부가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비옥한 땅이었고 카르타고인의 영농기술은 뛰어났기 때문에 카르타고 국정을 담당하는 경제인들이 늘상 ‘국내 중시파’와 ‘해외 진출파’로 분열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국내파의 리더가 한노 가문이라면, 하밀카르나 한니발이 속해 있는 바르카 가문은 해외파의 리더로 간주되었다. 이런 국내 사정 때문에 좋은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을 제공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2개 군단 정도의 병력이 주어졌는데, 시칠리아 서해안까지 밀려난 카르타고의 세력을 일거에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충분한 병력을 갖지 못한 하밀카르는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카르타고 세력하의 두 항구도시-마르살라와 트라파니-를 거점으로 삼지 않고 팔레르모 근교에 우뚝 솟아 있는 산(오늘날의 펠레그리노산) 위에 거점을 두었다. 기원전 247년부터 기원전 243년까지 4년 동안, 포에니 전쟁은 하밀카르의 뜻대로 전개되었다. 펠레그리노산에 대한 로마군의 공격도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하밀카르와 로마군의 펠레그리노산 공격 출처 구글 이미지]

마르살라 함락


로마는 교착상태에 빠진 지 오래된 시칠리아 전선을 타개할 길을 찾고 있었다. 그 결과 마련된 전략은 카르타고 본국과 하밀카르를 잇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42년 로마는 전시국채를 발행하여 200척의 5단선 갤리선을 새로 건조했다.


바다에서 공격하는 대규모의 로마 함대 덕분에 마르살라 항구는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리하여 로마 함대도 마르살라라는 천연의 양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식이 카르타고에 전해지면, 카르타고도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카르타고 수송선 격침


기원전 241년 3월, 카르타고는 국내파를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는지 본격적인 함대를 파견했다. 이 함대는 함대라기보다 수송선단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시칠리아의 카르타고군이 반년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군량과 무기를 가득 싣고 있었다.


집정관 카툴루스는 불리함을 무릅쓰고 싸움을 걸기로 결심했다. 로마 군선들이 가진 이점은 군량을 가득 실어 무거운 적선보다 가볍다는 것이었다. 격전이었지만, 승부는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카르타고의 배는 50척 이상이 침몰했고, 70척 이상이 로마에 나포되었다.


나머지는 때마침 방향을 바꾼 바람의 도움으로 본국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본국으로 달아난 총사령관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카르타고에서는 극형으로 되어 있는 책형(磔刑, 죄인을 나무기둥에 묶어놓고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제 사형 당한 사령관은 세 명이 되었다.


카툴루스와 하밀카르의 강화


카르타고 정부는 겨울철 휴전기도 기다리지 않았다. 하밀카르에게 전령을 급히 파견하여, 로마에 강화를 제의하라고 명령했다. 집정관 카툴루스도 하밀카르의 제의에 응했다. 카툴루스와 하밀카르가 동의한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에서 철수하고,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2.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포함한 로마 동맹국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기로 약속한다.
3. 포로는 양국 모두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한 배상금으로 2,200탈렌트를 10년 분할로 지불한다.
5.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


이런 내용의 강화에 대해 찬반의 의사표시를 요구받은 민회에서는 반대표가 다수를 차지했다. 23년에 걸친 전쟁에 단순 계산으로도 희생은 로마가 훨씬 컸다. 그런데 이것이 승자가 맺을 강화인가. 로마 시민은 석연치 않았다.


로마에서는 조사단이 꾸려졌는데 시칠리아에 도착한 후 카툴루스의 의견에 동의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상금 액수만 3,200탈렌트로 증액되고 로마는 상대가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귀국한 조사단의 보고를 들은 로마 시민도 이번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기원전 264년에 시작하여 23년 동안 계속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 끝났다. 카툴루스는 그해 6월에 로마로 개선했다. 기원전 673년부터 줄곧 열려 있던 야누스 신전의 문도 무려 432년 만에 닫혔다. 전쟁의 신 야누스 신은 이제 그만 쉬시라는 뜻이다.


카르타고는 이렇게 시칠리아에서 400년 동안 쌓아올린 기득권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말았다. 그것은 지중해 서쪽 바다를 잃은 것이기도 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기원전 241년~기원전 219년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원전 241년에 끝난 제1차 포에니 전쟁과 기원전 218년에 일어난 제2차 포에니 전쟁 사이에 23년의 세월이 막간처럼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 23년을 로마인과 카르타고인은 각각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문제다.


카르타고의 23년


기원전 241년에 맺어진 로마와 카르타고의 강화는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에 불과하다. 로마가 패권 국가가 되고, 카르타고가 그 세력하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카푸아나 타란토처럼 패전 후에 ‘로마 연합’에 가맹한 동맹국이 아니다.


시칠리아에 있는 시라쿠사처럼 15년마다 동맹 경신을 고려한 우방국도 아니다. 카르타고는 전쟁을 해서 졌다. 그래서 시칠리아에 가지고 있던 영토를 포기하고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지만, 독립된 자주국가라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긴 쪽보다 진 쪽이 더 많은 압박에 시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로마가 전쟁의 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고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카르타고 본국은 불온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하밀카르의 용병 반란 진압


전쟁이 끝났으니까, 이제 필요가 없게 된 용병들은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도 귀국에는 동의했지만, 그 이전에 카르타고 정부가 용병료를 지불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패전으로 말미암아 재정 긴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카르타고 정부는 전쟁이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이 되기도 전에 끝났으니 절반만 주겠다고 주장했다.


용병들은 출국할 때까지 머물러 있던 시카를 떠나 수도 카르타고로 갔다. 2만 명의 무장병이 20킬로미터 앞까지 몰려오자, 카르타고 정부는 교섭에 응할 것을 승낙한다. 처음에는 타당한 요구를 내걸었던 용병들이 교섭에 나선 카르타고 고관의 태도에 화가 나서 요구 조건을 끌어올렸다.


그러는 동안 용병들의 출신지 가운데 하나인 리비아가 이들에게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카르타고의 전후 대책에 불만을 품은 것은 리비아만이 아니었다. 수도 카르타고에 이은 제2의 도시 우티카우티카마저 불만파 쪽으로 기울어질 무렵에는 처음에 2만 명이었던 반란군이 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기원전 240년, 카르타고 정부는 이미 그들을 반란군으로 단정하고 무력 진압을 결의했다. 1만 명의 병력이 조직되었고, 총지휘는 하밀카르가 맡았다. 그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던 누미디아 기병 2천 명도 진압군에 가담했다.


하밀카르는 전체 병력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전투를 피하고 소규모 전투를 되풀이하면서, 마침내 높직한 산마루로 반란군을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코끼리떼에 둘러싸인 반란군은 산 위의 분지로 쫓겨들어가 코끼리떼에 짓밟혀 전멸했다. 사망자는 4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반기를 들었던 우티카도 이것을 알고 항복했다. 3년 4개월의 세월이 흐른 기원전 238년 여름, 카르타고에 대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샤르데냐와 코르시카


해안지방만 카르타고의 식민지가 되어 있던 사르데냐섬의 주민들이 본국 카르타고의 혼란을 알고 반기를 들었다. 카르타고인 총독을 죽인 그들은 사절을 로마에 보내 지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제해권의 중요성을 깨달은 로마는 물론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개 군단만을 파견하여 카르타고군을 제압하였다.


사르데냐가 수중에 들어오면, 바로 북쪽에 있는 코르시카섬도 자동적으로 로마의 것이 된다. 이리하여 로마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에 대한 지배권을 얻어, 이탈리아 남쪽과 서쪽 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샤르데냐섬 출처 구글 이미지]

하밀카르의 에스파냐 정착


해외파의 리더인 하밀카르는 국내파가 우세한 카르타고를 떠나 에스파냐에 거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에스파냐에는 이미 카르타고 식민지가 있었지만, 카디스를 중심으로 하는 에스파냐 남해안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좀더 넓고 본격적인 식민지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하밀카르는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장년의 나이였다. 이런 그를 따르는 카르타고인도 적지 않았다.


에스파냐로 이주할 때 하밀카르는 아홉 살 난 맏아들 한니발을 데려갔다. 한니발이 나중에 말한 바에 따르면, 그가 에스파냐에 같이 데려가달라고 부탁하자, 하밀카르는 한니발을 바알 신전으로 데려가서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서약시킨 뒤에야 에스파냐로 함께 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바알 신전에서 맹세하는 한니발 출처 구글 이미지]

과거에는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라고 불렸던 오늘날의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에스파냐로 이주한 하밀카르는 이곳에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한다. 지배 지역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그 땅은 카르타고인 특유의 영농기술에 의해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농장으로 변모했다.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중 하나라고 불리는 모로코의 제벨 무사 산 출처 구글 이미지]

에스파냐에 많은 광맥도 풍부한 광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특히 은광 개발로 하밀카르의 식민지 경영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세력권은 하밀카르가 이주한 지 9년 뒤에는 에스파냐 동남부를 제패할 만큼 확대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이익은 자활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본국의 농장 경영에 투자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상실을 만회하고도 남는 식민지를 획득한 셈이다. 하지만 이곳 에스파냐 식민지는 본국과는 거의 독립해 있어서, 바르카 가문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주한 지 10년째가 되는 기원전 228년에는 에스파냐 동해안에 ‘신(新)카르타고’라고 이름지은 도시가 건설되었다. 하밀카르 자신은 신도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년 전에 전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오랫동안 하밀카르의 부장으로 일했고 하밀카르의 사위이기도 한 하스드루발이었다. 직계 후계자인 한니발은 아직 18세에 불과했다.


로마와 하스두발루의 협정


기원전 226년에 로마는 하스드루발과 협정을 맺었다. 에스파냐 북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에브로강 이북으로는 카르타고가 세력권을 넓히지 않는다는 협정이었다. 이것은 비록 에브로강 이남으로 한정하긴 했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의 에스파냐 지배를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이 협정의 목적은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로마의 우방이었던 마르세유의 세력권을 지키는 데 있었다. 이해에 마르세유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엠포리아이도 로마의 동맹도시가 되었다. 마르세유와 엠포리아이는 둘 다 그리스인의 식민지로 건설된 도시국가다.


로마의 23년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23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이 시기에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테네가 건재했던 시절부터 그리스 문화의 일대 근거지였던 시라쿠사의 문화 수준은 타란토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로마의 양갓집 자제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습득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스 희극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라틴 희극이 로마에서 처음으로 상연되기 시작했다. 작자는 리비우스 안드로니코스. 그의 희극이 로마에서 상연된 기원전 240년부터 라틴 문학사가 시작된다고 여겨질 정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최초의 라틴 희극작가로 되어 있는 플라우투스(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가 활약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두 희극작가는 둘 다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 안드로니코스는 그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인이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코스와 풀라우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시칠리아의 프로빈키아(속주)화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 끝에 얻은 시칠리아는 로마에는 완전히 새로운 사례였다. 첫째, 카르타고의 복귀를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 둘째, 시라쿠사 외에는 엇비슷한 군소 도시국가들이 할거하고 있는 시칠리아에는 ‘로마 연합’ 방식을 적용할 수 없었다.


로마인은 시칠리아를 ‘프로빈키아’(속주)로 삼기로 결정했다. 속주는 지금까지 로마의 지배 개념에는 없었던 새로운 개념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시칠리아 전체를 속주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로마인은 사례별로 대처했다.


우선, 로마가 독립과 자치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시라쿠사가 있다. 로마와는 대등한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이고, 속주가 아니다. 두 번째 예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발단이 된 메시나다. 통치계급의 기반이 약한 이 도시국가를 로마는 나폴리와 같은 동맹국으로 삼았다.


시라쿠사의 통치지역은 시칠리아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메시나와 팔레르모 같은 자유도시의 영토를 합하면 4분의 1이 되기 때문에 로마가 속주로 삼은 지역은 시칠리아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속주를 통치한 것은 집정관과 같은 ‘임페리움’이다. 시칠리아의 경우에는 통치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은 법무관(프라이토르)이 로마에서 파견된다. 법무관의 주재지는 시칠리아 서부의 마르살라로 결정되었다.


속주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의 직할통치를 받는다는 것 외에 영토 전체가 로마의 직할령이 되었다는 데 있었다. 토지는 모두 몰수되어 로마의 공유지가 되었고, 주민들은 이 토지를 빌려서 농업이나 목축을 했다. 토지 임차료는 지주인 로마 정부에 낸다.


속주의 세 번째 특징은, 속주민의 별명이 ‘납세 의무자’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만은 직접세 납부가 의무화되어 있었다. 수입이나 수확의 10퍼센트를  세금으로 로마에 납부한다(‘십일조’라는 별명). 속주민은 로마 시민이나 동맹국 시민에게 부과된 병역 의무를 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로마 시민과 동맹국 시민이 직접세 대신 내고 있던 ‘혈세’는 낼 의무가 없었다.


가격이 이탈리아산 밀의 절반 내지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시칠리아산 밀이 들어오자, 넓은 농경지가 없는 로마 근교의 농업이 맨 먼저 경쟁력을 잃었다. 로마 근교의 농지가 밀밭에서 포도밭이나 올리브밭으로 바뀐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일리리아 정벌


로마는 패권국가였다. 패권국가는 세력하에 있는 나라들을 방어할 의무를 지는 동시에, 그런 나라 주민들의 이익을 지킬 의무도 진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고 평화를 자축한 로마인이 10년도 지나기 전에 다시 그 문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동맹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탈리아반도의 동부는 아드리아해에 면해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와 현재의 알바니아에 해당하는 이 일대는 고대에는 일리리아라고 불렸다. 일리리아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리리아 일대는 복잡한 후미가 많아서, 예부터 해적의 소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일리리아 왕국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229년, 두 집정관이 이끄는 2만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기병은 200척의 군선을 타고 브린디시를 떠났다. 로마군의 첫 번째 그리스 침공이다. 로마의 정규군이 쳐들어오자, 해적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그들의 거점 가운데 하나인 아폴로니아도 함락되었다. 로마군은 이 아폴로니아를 기지로 삼았다.


로마는 일리리아인을 제압함으로써 동쪽 방어선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남쪽과 서쪽의 방어선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획득함으로써 확고해졌다. 방어선을 확고히 한다는 생각에서 보면, 남은 것은 북쪽뿐이다. 이탈리아 북쪽에 사는 민족은 갈리아인이다.


갈리아 정벌


이듬해인 기원전 225년, 5만 명의 보병과 2만 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갈리아군이 포강을 건너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맞아 싸우는 로마군은 이번 기회에 북쪽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집정관 두 명에게 각각 2개 군단씩을 주어 파견했다.


집정관 파포스는 북부 전선에서도 동쪽에 있는 리미니로 향했고, 집정관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서쪽에 있는 피사로 갔다. 갈리아군은 약탈하면서 남하해왔다. 도중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은 갈리아군을 양쪽에서 협공했다. 격전이었다. 레굴루스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래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기원전 222년, 알프스산맥을 넘어온 원군을 포함하여 5만 명의 갈리아군이 로마군에게 공세를 취했다. 로마군은 두 명의 집정관과 4개 군단으로 그 공격을 격퇴했다.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포강 상류까지 치고 올라가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인 거점이었던 오늘날의 밀라노까지 공략했다.


로마는 국경을 루비콘강에서 포강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218년에는 포강에 면한 피아첸차와 크레모나에 ‘라틴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수도 로마에서 리미니까지는 그보다 4년 전에 플라미니우스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건설했다. 로마는 포강 이남의 이 일대를 로마화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그럴 시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포강과 피아첸차 출처 구글 이미지]

군제 개혁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241년, 로마인은 참으로 의미있는 개혁을 단행했다. 기원전 6세기 중엽의 왕정 시대에 제6대 임금 세르비우스가 완성한 세제와 선거제 및 군제를 무려 300년 만에 개혁한 것이다.



두 제도를 비교해볼 때 눈에 띄는 변화는 우선 로마 사회의 중산계급화다. 왕정 시대에는 제1계급이 가진 표만으로 민회에서 충분히 과반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제1계급과 제2계급 및 제3계급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과반수가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투표권으로 나타나는 권리의 확산은 병역으로 나타나는 의무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로마 군단을 구성하는 시민병도 더욱 광범위한 시민권 보유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군단 지휘관에게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더불어, 로마라는 국가의 거국일치체제를 강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로마 군단


우선,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누구나 35개의 행정구 가운데 하나에 소속되어 있다. 각 행정구에 소속된 17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무산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병역 해당자로서, 소유하는 자산에 따라 5계급으로 나뉜다. 이들은 다시 현역과 예비역으로 구분된다.


상비군 구성


자연 휴전기로 되어 있는 겨울에 로마의 마르스 광장에서 민회가 열린다. 거기서 우선 이듬해에 전선을 담당할 집정관 두 명이 선출된다. 이어서 24명의 장교 선거가 실시되고 6명씩 각 군단에 배속된다.


35개의 행정구는 추첨을 하여 이듬해 병력을 제공할 행정구를 결정한다. 4개 군단만 편성하는 해에는 8분의 7 이상의 행정구에 소속된 사람들이 즉시 귀가 조치를 받는다.


로마의 상비군은 4개 군단이고, 1개 군단에 속하는 로마 시민병의 수는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4,500명 안팎으로 정해져 있었다. 강력한 적과의 싸움이 예상되는 해에는 병력을 5천 명으로 증강한다. 4개 군단이면 1만 8천 명 내지 2만 명이 된다. 그래서 ‘일보 앞으로’도 이 숫자에 이르면 끝났다. 남은 사람은 예비역이 되어 귀가했다.


로마 시민병 편성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집정관 두 명은 ‘로마 연합’의 동맹국에 대해 이듬해 봄에 전선에 나갈 병력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한다. 각 동맹국이 다국적군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연합군’에 참가하는 비율은 로마와 맺은 협약에 따라, 각 동맹국의 성인 남자 인구에 비례하여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기원전 225년의 시점에서 로마의 병역 해당자 수는 28만 명인 반면, 동맹국 전체의 병역 해당자 수는 6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계산했다. 게다가 로마의 경우에는 현역과 예비역을 합한 수가 28만 명인 반면, 동맹국은 현역만 60만 명이었다.


로마 군단의 총지휘권은 언제나 로마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패권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보다 훨씬 큰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집정관의 요청을 받아,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곳에 집합한 로마 시민병과 동맹국 병사들은 로마의 군율에 따라 싸울 것을 최고사령관인 로마 집정관에게 맹세한다. ‘로마 연합군’은 비로소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무장 보병과 기병


로마 군단은 곧 중무장 보병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군의 주력은 상류층과 중류층의 로마 시민들로 이루어진 중무장 보병이었다. 중무장 보병은 3열 횡대로 늘어서서 싸우는데, 최전선에는 오늘날 중대 개념의 ‘하스탈리’부터 ‘프린키페스’, ‘트리알리’가 배치된다.


그리고 각각은 다시 소대 개념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로마 군단의 최소 전투 단위인 ‘백인대’(켄투리아)이고, 백인대를 지휘하는 자가 고대 로마를 소재로 한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백인대장’(켄투리오)이다. 백인대장’만은 그가 속해 있는 소대원의 투표로 선출된다. 말하자면 하사관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 선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병은 가장 많은 자산을 가진 제1계급에서 나오게 마련이었고, 4개 군단을 통틀어 1,200기였다. 기병의 경우는 수를 늘리거나 줄이지 않았다. 기병은 수가 적은 탓도 있어서, 각 군단에 대한 배속은 보병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1개 군단마다 300기씩 배속되었다.


중무장 보병이 주력으로 여겨지고 있던 로마 군단에서 기병은 수도 적고 전력으로서도 낮은 평가를 받았다. 고대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등자는 중세의 발명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마술이 전투력으로 활용되기는 어려웠다. 로마 군단에서 기병은 전령이나 척후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전쟁터에서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데 동원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로마 군단의 이런 기병 이용법이야말로 한니발에게 찔린 최대의 약점이 되었다.


숙영지


고작 하룻밤 사용할 숙영지도 우직하게 교본대로 건설했다. 교본도 잘 만들어져 있어서, 제정 시대가 된 뒤에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바꾸기는커녕, 로마인은 이 숙영지 건설법을 신도시 건설에도 적용했다.


로마군의 우직한 숙영지 건설은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여, 로마군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숙영지부터 건설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나중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평판을 이용하여 상대의 의표를 찌르게 된다.


로마인은 육식 인종이 아니었다. 생선은 좋아했지만, 고기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전투의 연속으로 밀 보급이 끊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은 고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로마인과 달랐다.


로마의 국고 수입은 국유지의 임차료와 간접세, 속주에서 들어오는 십일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접세는 속주민 외에는 ‘혈세’, 즉 병역으로 치르는 것이 규칙이었다. 병역은 참정권을 가진 자유시민의 책무였다. 경제적인 면만 생각하면, 차라리 십일조를 내고 군무를 면제받는 속주민이 훨씬 이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예보다 못한 일당을 받고 군무에 종사하는 로마 시민과 동맹국 시민 가운데 여기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단 평정한 포강 이남의 갈리아인 주거지역을 포함하여, 로마인의 ‘사회간접자본 정비망’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23년 동안 점점 넓게 뿌리를 뻗었고, 더욱 밀도를 높여갔다. 로마와 동맹도시들과 동맹민족을 결집한 ‘로마 연합’은 군사면에서의 운명 공동체에 머물지 않고, 경제면에서도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2편에서 계속>































<2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로마인 이야기 1권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