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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27. 2024

로마인 이야기 4권 (3)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갈리아 전쟁기 5년째부터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까지

갈리아 전쟁 5년째
(기원전 54년, 카이사르 46세)
[갈리아 전쟁 5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기원전 54년 봄, 알프스를 넘어 군단의 겨울철 숙영지인 아미앵(Amiens)으로 돌아간 카이사르는, 그가 지난해 겨울에 아미앵을 떠나면서 내려둔 명령을 부하 병사들이 그동안 착실히 수행한 것을 보고 만족했다.


지난 번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낭패를 겪었던 사실을 기억하며, 상륙작전과 기상 변화를 고려하여 브리타니아 원정용 수송선의 높이를 낮게 만들라고 명령해두었는데, 이것도 완벽하게 실행되어 있었다. 수송선의 수는 600척. 노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결 기동력이 높은 갤리선 28척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아미앵 대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트레베리족 진압


하지만 출항지로 가기 전에 끝내두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바로 라인강 근처에 사는 트레베리족이다. 이 부족은 갈리아 전체 부족장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로마에 복종을 맹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게르만인에게 라인강을 건너와 함께 로마와 싸우자고 호소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들어와 있었다.


트레베리족은 기병 전력으로는 갈리아에서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로마군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 이 부족은 많은 군소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합하는 중심 인물은 킨게토릭스와 인두티오마루스였다. 카이사르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안 킨게토릭스는 재빨리 카이사르에게 복종의 뜻을 전했다. 강경파였던 인두티오마루스도 이것을 알고,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종을 맹세했다.


이 정도로 트레베리족 대책을 끝내고 카이사르는 이티우스 항구로 향했다. 이티우스항에는 바람 때문에 제때에 도착하지 못한 50척을 제외한 550척의 수송선과 갤리형 군선 28척이 집결해 있었다. 이번 원정에는 제7군단과 제10군단을 포함한 5개 군단과 2천 명의 기병대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기병대는 대부분 갈리아 부족에서 참가한 병사들이었다.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1차 접전


이번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브리타니아에 상륙했다. 카이사르가 나중에 포로한테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브리타니아인들은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배를 보고 놀라서 내륙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안에서 18킬로미터쯤 전진했을 때 로마 군대는 적의 대군과 마주쳤다. 적은 울창한 숲이 배후를 지켜주고 있는 강가에서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해오는 적에게 로마군 병사들도 용감하게 맞섰다. 브리타니아인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제7군단을 앞세운 적극 전법으로 로마군은 적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사자는 한 명도 없고 부상자도 적었지만, 카이사르는 더 이상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튿날 일찍 진격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적의 모습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선단 방어를 맡고 있는 아트리우스가 보낸 전령이 달려왔다. 전날 밤 엄청난 폭풍우가 몰려와 선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날씨와 너무 다른 북해의 바다와 기후가 의외의 복병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당장 배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피해는 심각했지만 카이사르는 선박 수리 요원 외에 1개 군단과 300기의 기병을 진영 수비대로 남겨놓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다시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


이번에 로마군은 첫 번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군을 만나게 되었다. 겨울 동안 갈리아 각지에서 대량의 선박이 만들어진 것을 알고 로마군의 침공을 예측했기 때문이겠지만, 브리타니아는 지난해와는 달리 각 부족들이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고, 총지휘는 ‘카시벨라우누스’라는 사내가 맡고 있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라고 한다.


[갈리아 전기의 ‘브리타니아 소개’]

전해오는 말을 믿는다면, 브리타니아 내륙지방에는 이 섬에서 생겨났다는 원주민이 살고 있다. 반대로 해안지방에는 전쟁이나 약탈을 목적으로 벨기에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이 대부분 고향의 지명을 따르고 있는 것이 그 것을 입증한다. 인구는 무수히 많다. 집들도 밀집해 있다. 이 점에서는 갈리아와 비슷하지만, 가축의 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화폐로는 동화와 금화, 무게가 일정한 쇠막대를 사용하고 있다. 내륙지방에서는 주석이 생산되고, 해안지방에서는 소량이지만 철이 생산된다. 구리는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수입한다. 너도밤나무와 전나무를 제외하면, 숲의 수목 구성은 갈리아와 같다. 토끼와 닭과 거위를 먹으면 죄가 된다. 그런데도 그런 가축들을 사육하고 있는데, 식용이 아니라 오락이나 위안을 얻기 위한 애완용인 모양이다. 기후는 갈리아보다 온화하다. 추위도 갈리아보다는 심하지 않다(아마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동부와 비교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섬의 지형은 세모꼴을 이루고 있다(이어서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와 에스파냐의 위치 관계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쯤에서부터 그의 지리 감각이 상당히 어설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오늘날의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있는 맨섬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어느 책에 따르면, 북쪽 끝에서는 겨울철에 받이 30일이나 계속된다고 한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로는 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물시계로 실험 해본 결과, 밤이 대륙보다 짧다는 것만은 밝혀졌다.

주민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문명적'이라는 뜻)인 것은 칸티움(오늘날의 켄트)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풍속은 갈리아인과 거의 다르지 않다. 한편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밀을 경작하지 않고, 우유와 고기를 먹고, 옷이라고는 모피를 몸에 결칠 뿐이다. 게다가 브리타니아인은 모두 푸른색 물감으로 몸을 물들인다. 따라서 전쟁터에서는 훨씬 무섭게 느껴진다.

장발이 보통이지만, 머리와 코밑을 제외한 곳은 모두 털을 깎아버리는 것이 습관이다. 남자들은 10명이나 12명의 아내를 공유한다. 특히 형제나 부자가 아내를 공유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가 생기는데, 여자가 처녀를 바친 남자를 자식의 아버지로 삼는 모양이다.


브리타니아인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로마군은 진영을 세우거나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습격당하거나, 숲속에서 불쑥 나타나 공격해오는 적에게 시달렸다. 또한 중무장한 로마 병사들은 온몸을 푸른색으로 칠하고 날쌔게 움직이는 반나체의 브리타니아 전사 앞에서 자신의 둔중한 몸놀림에 이를 갈 때도 있었다.


게릴라 전법을 피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여느 때처럼 기병대를 앞세워 행군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보병과 기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진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해놓고 적의 습격이 있을 때마다 확실히 적군을 죽이고 나머지는 패주시키는 일을 되풀이했다.

[카이사르 진격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브리타니아인이 자랑하는 전차부대가 카이사르의 보병과 기병에게 참패를 당하여 뿔뿔이 흩어졌을 때, 부족들의 이반은 결정적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타메시스(오늘날의 템스강) 북쪽에 펼쳐져 있다는 총대장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는 오늘날의 버킹엄셔(런던 북서부 근교) 일대였다니까, 도하 지점은 런던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마군이 강가에 도착해보니, 건너편에는 이미 도강을 막기 위한 방책이 세워져 있고, 그 저편에는 적의 대군이 집결해 있었다. 카이사르는 우선 기병대를 건너게 하고, 뒤이어 보병의 도강을 명령했다. 그것도 몇 사람씩이 아니라 떼를 지어 건너게 한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던 적은 신속하게 떼를 지어 건너온 로마군에게 저항할 수 없어서 강변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버킹엄셔주와 템스강 출처 구글 지도, 구글 이미지]

카시벨라우누스는 4천 명의 병사만 남기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해산한 뒤 숲속에 숨어서 기다리는 게릴라 전법을 택했다. 이 전법으로 한동안은 로마군을 괴롭힐 수 있었지만, 상대가 로마군인 이상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카시벨라우누스는 본거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본거지라 해도 브리타니아인이 요새로 생각한 것은 울타리와 도랑으로 둘러싸인 숲이다. 그들은 로마인 특유의 끈기를 발휘하여 두 방향에서 줄기차게 공격해오는 카이사르와 그의 병사들한테는 견디지 못했다. 수많은 브리타니아 전사가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는 숲에서 도망쳐 나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켄트 지방의 부족장에게 해안에 남아 있는 로마군 진영을 공격하도록 명령해놓았지만, 이것도 로마군 병사들의 능숙한 방어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실패와 카시벨라우누스 자신의 패주는 브리타니아인의 전투 의욕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여 카시벨라우누스의 강화 요청도 받아들였다. 카시벨라우누스에 대해서는 복종의 증거로 인질을 제공받고, 연공 액수를 정한 뒤, 다른 부족들에 대한 침략행위를 금지했다.


[카이사르의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인질과 포로 때문에 수가 늘어난 로마군은 두 차례로 나뉘어 도버해협을 건너야 했다. 카이사르 자신은 두 번째로 귀로에 올랐다. 갈리아로 갔다가 되돌아올 수송선단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떠난 것은 추분이 가까워서였다. 돌아올 때는 배도 사람도 무사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로마인들에게 속주로 남겨주기보다는 그 존재를 알리는 데 만족하고, 그러면 그 가치를 이해하는 후세의 누군가가 언젠가는 브리타니아의 속주화를 이룩해주리라고 확신한 게 아닐까. 카이사르가 지적한 이 가능성은 1세기 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어받아 현실화했다.


15개 대대 궤멸


여덟 군데로 분산된 겨울 숙영지


갈리아 전쟁이 시작된 이래, 로마군은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지방에 한데 집결하여 겨울을 보냈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방침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54년부터 기원전 53년에 걸친 겨울에는 부득이 군대를 분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갈리아 전역의 밀 작황이 좋지 않아, 한 지방에서 조달하는 식량만으로는 그 많은 식구를 먹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겨울철 숙영지는 여덟 군데로 나뉘었고, 각 숙영지에서 평균 1개 군단이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와 네덜란드 남부와 독일 서부로 이루어진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겨울 숙영지 출처 본문]

율리아의 죽음


이 무렵 카이사르는 딸 율리아 카이사리스(Jula Caesaris, 카이사르와 코르넬리아 킨나 사이의 유일한 자식)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게 시집간 지 5년, 정략결혼이긴 했어도 부부 사이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였지만, 지난해 아이를 유산하여 쇠약해진 몸은 두 번째 임신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태어난 아이도 며칠 만에 죽어버렸다. 카이사르는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 이어 두 번째로 상을 당한 셈이다.


폼페이우스도 사랑하는 젊은 아내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고, 아내와 둘이서 보낸 추억으로 가득 찬 알바의 별장에 아내를 묻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로마의 일반 시민들은 직무상 올 수 없는 아버지 카이사르의 심정도 헤아려 마르스 광장에 있는 역대 위인들의 묘소에 율리아를 장사지내기로 했다. 아무리 로마를 지배하는 두 실력자의 딸이자 아내라 할지라도 한낱 아녀자에 불과한 개인에게는 유례없는 특별대우였다.

[율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에부로네스족의 속임수


사비누스와 코타가 이끄는 15개 대대 9천 명은 목적지인 라인강의 에부로네스족의 땅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두 족장한테 군량 제공을 요구하여 승낙을 받고, 진영 설치를 끝내고, 두 족장이 일부러 거기까지 가져온 군량도 받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을 때 우호적이었던 에부로네스족이 별안간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사비누스와 코타가 지키는 진영을 공격해왔지만, 로마군 병사들의 강고한 수비 앞에서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흩어지지 않고 진영 밖에 사람을 보내 앞으로의 우호관계 회복을 위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며 두 명의 사절을 내보냈다. 그들은 로마 공격은 자신들의 본의가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게르만인이 갈리아인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라인강을 건넜다. 그들이 여기에 도착하는 데에는 이틀이면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그전에 키케로의 진영이나 라비에누스의 진영에 가서 그들과 합류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냐. 우리 땅을 지나 이동할 때의 안전은 우리가 보장하겠다."


소집된 작전회의에서 의견이 둘로 갈라졌는데, 코타는 카이사르의 훈령도 없이 함부로 이동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진영의 최고 지휘관인 사비누스는 월동지를 떠나 이동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이유는 어물거리다가 때를 놓칠까봐 두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사비누스의 의견대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출발하여 월동지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깊은 계곡에 들어갔을 때 매복하고 있는 적의 기습에 군단은 처참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로서는 3년 전에 편성한 제14군단 10개 대대와 그것을 보강하려고 각 군단에서 차출한 5개 대대를 모두 잃은 것이다.


로마군 9천 명을 피의 제물로 바친 에부로네스 족장 암비오릭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아투아키족과 네르비족에게, 로마 군단장 두 명을 죽이고 겨울철 숙영지를 초토화시킨 사실을 알리고, 힘을 합하면 키케로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라고 설득했다.

[벨기에의 암비오릭스 동상과 로마군과의 전투를 묘사한 조각 출처 구글 이미지]

퀸티우스 키케로의 사투


이리하여 모두 6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 퀸티우스 키케로의 겨울철 숙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숙영지는 1개 군단 6천 명도 채 안 되는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간단히 함락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끈질긴 저항을 받은 벨기에군은 사비누스를 상대로 성공한 수법을 다시 한번 시도했다.


그들은 키케로를 회담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갈리아 북동부 전역이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게르만인도 대거 라인강을 건너오고 있으며, 카이사르와 다른 숙영지도 습격당하고 있고, 사비누스와 코타가 전사하였으니 진영을 걷어 아군한테로 가는 편이 좋지 않은가, 이동하는 도중의 안전은 보장하겠다"고 회유하였다.


하지만 키케로가 속아 넘어가지 않자 벨기에인들은 이제 공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보고 배운 로마인의 방식대로 포위망을 만들고, 역시 로마군의 공성법을 본받아 높은 망루와 이동식 장갑차를 제작했다. 하지만 키케로의 로마군은 며칠간 이 공격을 필사적으로 잘 견뎌냈다.


카이사르의 반격


카이사르가 위급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것은 해가 설핏해지고 있던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카이사르는 당장 22.5킬로미터 떨어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숙영하고 있는 회계감사관 크라수스, 모리니족의 땅에서 숙영하고 있는 군단장 파비우스 그리고 부장 라비에누스를 아트레바테스족의 땅으로 모이도록 훈령을 급파했다.


카이사르가 이끄는 1개 군단과 400명의 기병대는 강행군하는 도중에 파비우스가 이끄는 1개 군단과 합류했고, 이들은 강행군을 계속했다. 네르비족을 비롯한 벨기에군도 척후병의 보고를 통해 카이사르가 도착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포위망을 풀고 모두 카이사르 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10배 가까운 적과의 대결을 서두르지 않았다. 전투에 유리한 지점을 탐색하여 거기에 진영을 설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병력이 7천 명인데다 수송부대가 없기 때문에 진영은 자연히 소규모가 된다. 카이사르는 이 불리함을 거꾸로 이용했다. 천막과 천막 사이 통로도 여느 때보다 좁게 했다.


네르비족과 에부로네스족을 합한 6만 명의 대군은 카이사르의 책략에 멋지게 걸려들었다. 이튿날 아침, 적은 대열도 짜지 않고 앞다투어 시냇물을 건너왔다. 시내를 건너면 로마군 진영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 된다. 여전히 로마군 진영에서는 아무도 싸우러 나오지 않자 갈리아 병사들은 이제 완전히 로마군을 얕잡아보았다.


적이 방심한 틈을 보이자 카이사르는 그제서야 진문 네 개를 모두 열고, 전투개시 나팔을 불게 했다. 허를 찔린 적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내를 건너 도망치려던 적병들은 앞길을 가로막은 로마군 기병대와 뒤에서 공격하는 보병 사이에 끼어 무기를 내던지고 투항했다.


갈리아에서 보낸 첫 번째 겨울


카이사르가 승리했다는 소식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갈리아 전역에 퍼졌다. 부장 라비에누스의 월동지로 접근하고 있던 트레베리족도 그것을 알자마자 발길을 되돌렸다. 로마의 동맹자인 레미족도 그것을 알고는 라비에누스의 진영에 축하하러 찾아갔을 정도였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올 겨울에는 갈리아에 남아 있기로 했다. 갈리아 원정이 시작된 이래 갈리아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이사르는 겨울철 숙영지를 각지에 분산한다는 방침은 바꾸지 않았지만, 본영을 둔 아미앵 주변에는 3개 군단을 배치했다.


그 사이 유일하게 반항을 멈추지 않은 트레베리족을 라비에누스가 패주시키고, 족장인 인두티오마루스를 자결로 몰아넣은 탓도 있어서, 그 겨울 갈리아 북동부 지역에서는 서로 상대의 동태를 살피는 상태로 지나갔다. 하지만 이듬해야말로 갈리아에서 가장 호전적인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는 해가 되어야 했다.


한편, 그 동안 로마에서는


원로원파의 반격은 끈질겨서 기원전 54년에는 원로원파 한 명을 집정관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듬해인 기원전 53년도 집정관 선거에서는 원로원파 후보자가 둘 다 당선되었다. ‘삼두’가 추천한 후보는 모두 낙선했다. ‘삼두’는 이제 야당으로 전락한 셈이다.


이 시기에 ‘삼두파’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수뇌진은 양쪽 다 정치력이 없음을 드러냈다. 특히 집정관을 둘 다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말해 여당이면서도 통치력의 결여를 드러낸 원로원파는 무참했다. 이 시기에 로마는 클로디우스와 밀로가 제각기 멋대로 조직한 ‘원외단’(院外團)에 우롱당했기 때문이다.


로마 도심에서는 선거철이 아닐 때도 폭력이 난무하여 유혈사태로 끝날 때가 많았다. 온건하고 양심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의 장래를 걱정하며 속끓였지만, 그들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도 없었고 그것을 실행할 의지도 없었다.


갈리아 전쟁 6년째
(기원전 53년, 카이사르 47세)


카이사르의 병력은 원래 8개 군단이었는데, 기원전 54년 말에 암비오릭스에 의해 제14군단과 5개 대대를 합친 9천 명의 병사가 군단장 두 명과 함께 전멸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지금까지의 희생자를 더하면, 카이사르는 2개 군단에 2개 대대를 합친 1만 3천 명 가량의 병력을 잃은 셈이니 이제 남은 것은 사실상 6개 군단뿐이다.


아미앵에서 월동에 들어가자마자, 카이사르는 군단장 세 명을 키살피나 속주에 파견했다.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하는 것이 그들 세 사람의 임무였다. 동시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1개 군단을 빌려달라고 부탁했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요청에 응해서 자기 이름으로 편성한 1개 군단을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3개 군단은 겨울이 끝날 무렵 아미앵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도착했다. 새로 편성된 3개 군단이 정원을 채웠다면 1만 8천 명. 나머지 7개 군단이 6분의 5로 줄어들었다 해도 3만 5천 명 남짓. 합계 5만 3천 명 정도의 보병 전력이다. 기병은 4천 기쯤 되었을까.

[갈리아 전쟁 6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기원전 53년의 전쟁은 병사들에게는 복수전이었다. 어쨌든 속임수로 로마군을 진영에서 끌어낸 장본인인 에부로네스 족장 암비오릭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목적은 이 기회에 갈리아 북동부를 완전히 평정하고, 그 지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인에게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네르비족 진압


카이사르는 10개 군단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아미앵 부근의 4개 군단 2만 명을 소집하여 아직 겨울도 끝나기 전에 진격을 개시하였다. 목표는 작년에 키케로의 겨울철 숙영지를 궁지에 빠뜨린 네르비족이었다. 5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는 네르비족도 허를 찔리자 이리저리 도망쳐 다닐 뿐이었다.


이 문제를 재빨리 결말지은 카이사르는 4개 군단을 겨울철 숙영지로 돌려보내 휴식을 취하게 하고, 그동안 갈리아 전체 부족장 회의를 소집했다. 갈리아 전쟁 초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해에는 카이사르가 직접 회의를 소집하고 의장 역할까지 맡았다. 갈리아 중북부에서도 총독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 회의에는 갈리아 전역의 부족장들이 참석했지만, 참석하지 않은 부족도 있었다. 갈리아 중부의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 그리고 라인강 근처에 살면서 강 너머의 게르만인과 호응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트레베리족이었다.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 진압


그는 우선 회의장을 세노네스족의 땅과 가까운 루테티아로 옮겼다. 루테티아는 '파리시'족의 본거지로, 오늘날의 파리다. 이탈리아어에서는 지금도 파리를 ‘파리지’라고 발음한다. 회의장을 루테티아로 옮긴 이튿날, 카이사르는 당장 세노네스족의 땅으로 군대를 보냈다.


로마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 세노네스족은 하이두이족의 중개로 카이사르에게 불참을 사죄하고 복종을 맹세했다. 카르누테스족한테는 구태여 군대를 보낼 필요도 없었다. 카이사르가 군대를 보내기도 전에 스스로 알아서 레미족을 통해 볼모를 바치고 강화를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트레베리족 정복


카이사르는 양면작전을 폈다. 2개 군단과 수송부대 전체를 트레베리족의 땅과 가까운 레미족의 땅에 눌러앉아 있는 부장 라비에누스에게 파견했다. 카이사르 자신은 수송부대 없이 5개 군단만 이끌고 암비오릭스가 몸을 의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메나피족의 땅으로 갔다.


이 때 트레베리족도 부장 라비에누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트레베리족은 라비에누스와 함께 월동한 1개 군단만 공격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라비에누스의 월동지까지 불과 이틀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카이사르가 파견한 2개 군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개 군단의 로마군과 단독으로 싸우기를 꺼린 그들은 게르만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미루기로 하고, 진영을 짓고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라비에누스는 이 가운데 5개 대대를 수송부대를 호위하도록 남겨놓고, 나머지 25개 대대를 이끌고 적진으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바싹 접근했다. 게르만 지원부대가 강을 건너오기 전에 승부를 결정짓고 싶은 라비에누스는 적을 유리한 지점으로 끌어낼 생각이었다.


트레베리족의 척후병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강 건너편에 있는 로마군은 3개 군단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태도가 강경해진 트레베리족은 안전한 진영에서 나와 로마군 쪽으로 다가왔다. 라비에누스는 적을 유인하기 위해 슬금슬금 후퇴했고, 트레베리족은 라비에누스가 퇴각하는줄 알고 계속 따라 나왔다.


그러자 라비에누스는 3개 군단을 돌려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적을 뒤쫓고 있는 줄만 알았던 트레베리족은 갑자기 발길을 돌린 로마군의 공격에 버텨내지 못했다. 그들은 부대를 재조직할 여유도 없이 숲속으로 일제히 도망쳤다.


그리고 며칠 뒤 트레베리족의 강화 사절이 라비에누스를 찾아왔다.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던 게르만 부대가 로마군의 승리를 알고는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원군이 곧 도착할 거라는 희망도 사라지자 트레베리족에게 남은 길은 항복밖에 없었다.


라인강을 다시 건너다


라비에누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하여 8개 군단을 거느리게 된 카이사르는 여기서 두 번째 라인강 도하를 결행했다. 그 이유로 카이사르는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1. 트레베리족의 요청에 호응해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쳐들어오려 한 게르만인에 대한 대책.
2. 강 너머로 달아난 에부로네스 족장 암비오릭스에 대한 추격.


라인강 바로 동쪽에 사는 우비족은 로마와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트레베리족의 요청에 응해 갈리아를 침공하려 한 부족이 역시 수에비족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비족에게 수에비족의 땅에 척후병을 보내 현재 상황을 조사해 줄것과 게르마니아 땅에서의 군량 보급을 부탁했다. 우비족은 이 모든 요청을 받아들였다.


며칠 뒤에 정보가 들어왔다. 수에비족은 로마군이 라인강을 건넌 것을 알자마자 사람과 가축을 데리고 영토의 동쪽 끝으로 후퇴하여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바케니스라고 불리는 깊고 넓은 삼림지대를 등지고 있어 마치 자연이 만든 천연 성벽 같은 느낌을 주는데, 오늘날의 튀링거발트(오늘날의 튀링겐 숲)였던 것 같다.

[튀링거발트 출처 구글 이미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비교론


갈리아전기의 두 민족의 비교론은 "'여기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풍습을 이야기하고, 두 민족의 차이에 관해 서술하는 것도 반드시 부적당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갈리아인


갈리아에서는 도시나 마을마다 반드시 둘 이상의 파벌이 존재한다. 심지어는 가정 안에도 파벌이 있다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런 파벌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고, 파벌 내의 일은 무엇이든 우두머리가 책임지고 관리한다. 파벌에 속하는 하층민은 이 우두머리의 보호를 받는 대신 그에게 복종한다.


이 할거 지향은 갈리아의 모든 부족에 공통된 경향으로, 카이사르가 오기 전에 갈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두 부족은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었다. 세콰니족이 강력해진 원인은 게르만인을 자기편으로 삼았기 때문이고, 하이두이족까지도 한때는 세콰니족에게 복종하는 상태였다. 그것이 일변한 까닭은 카이사르가 갈리아에 왔기 때문이다. 쇠퇴한 세콰니족을 대신한 것이 레미족이다.


갈리아에서는 두 계급이 주민들을 지배하고 있다. 평민계급은 거의 노예와 같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거운 세금을 내고 있다. 두 지배계급 가운데 하나는 ‘드루이드’라고 불리는 ‘사제’들인데, 종교만이 아니라 교육과 사법도 이들이 담당한다. 언어는 그리스어가 아니지만, 문자는 그리스어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의 지배계급은 ‘기사’들이다. 이들은 물론 군사를 담당한다. 여기에 속하느냐 아니냐는 출신으로 결정된다.


갈리아에서는 인신공양제가 온존해 있어서, 대개는 죄인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지만, 죄인이 부족하면 무고한 사람도 희생될 수 있다. 이들이 섬기는 신으로는 우선 메르쿠리우스가 있다. 이어서 아폴로, 마르스, 유피테르, 미네르바 등이 신앙의 대상들이다. 갈리아인의 달력은 밤부터 시작된다. 날도 달도 해도 낮이 아니라 밤부터 세기 시작 한다.


아내의 지위에 관해서 말한다면, 아내의 지참금은 존중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권리는 인정받고 있지만, 남편은 자식과 마찬가지로 아내에 대해서도 생사여탈권을 갖는다. 영혼불멸을 믿는 그들의 장례식은 갈리아인의 문명도를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호화롭게 치러진다. 얼마 전까지는 죽은 사람의 신변용품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측근에서 모신 하인이나 노예들까지 망자와 함께 화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잘 다스려지고 있는 지방에는 법률이 있다. 남에게 얻어들은 말은 멋대로 퍼뜨리면 안 되고, 반드시 통치자에게 알려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통치자는 그것을 부족민에게 알릴 것인지를 결정하고, 알려도 좋은 것만 공표한다. 부족 전체에 관한 일은 회의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게르만인


게르만인은 갈리아인과는 크게 다른 풍습을 갖고 있다. 갈리아인의 드루이드처럼 제사를 관장하는 사제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산 제물을 바치는 것에 관해서도 그다지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섬기는 신들도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실한 은혜를 베푸는 것들뿐이다. 태양, 화산, 달 등이 그것이고, 이것이외의 신앙 대상은 이름조차 없다.


게르만 남자는 사냥과 전투에 인생을 바친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는다. 그들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다. 여자와 교접하지 않음으로써 건장한 육체를 갖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강인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가 되기 전에 여자를 아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는 명예로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게르만인은 성 자체를 숨기지는 않는다. 강에서는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고, 의복도 짐승 가죽이나 모피로 국부만 가리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농경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식생활은 우유와 치즈와 고기로 이루어져 있다.


일정한 토지를 사유하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각 지역의 우두머리들이 해마다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 어느 땅에서 사냥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 씨족 연합체 또는 그보다 규모가 더 큰 공동체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그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정착생활은 전투보다 농경에 열의를 쏟게 되는 원인이고, 사유지를 인정하면 빈부격차가 생긴다. 빈부격차는 추위와 더위에 대해 쾌적한 집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낳게 된다. 그리고 빈부격차의 가장 큰 폐해는 금전에 대한 집착과 사회 불안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평민계급도 불만을 느끼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다.


게르만인의 가장 큰 긍지는 넓은 황무지로 영토 주위를 둘러싸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첫째 이유는 주변 부족들을 배제하고 교류할 의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둘째 이유는 불의의 기습을 피함으로써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전시에는 지휘관을 선출하여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사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른다. 반대로 평시에는 부족 전체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한 통치기관을 두지 않는 것이 게르만인의 방식이다. 따라서 공동체마다 서로 다른 재판이나 조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밖에서 이루어진 도둑질은 죄가 되지 않는다. 죄가 되기는커녕 젊은이가 게을러지는 것을 막기 위한 훈련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약탈하러 가기로 결정되면 모두 따라 갈 의무가 있고,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탈주병이나 배신자로 간주되어 그 후로는 아무한테도 신뢰받지 못한다. 어디서 왔든, 무슨 이유로 왔든 간에 방문객한테는 모든 집이 문을 열어주고 식사도 함께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그러지 않으면 관습을 어긴 자로 간주된다.


옛날에는 갈리아인이 라인강을 건너 게르마니아 땅으로 쳐들어가, 적은 경작지와 부족한 식량 때문에 미처 다 부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을 확보하곤 했다. 헤르키니아의 대삼림지대(오늘날의 슈바르츠발트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일대)까지 프로빈키아에서 일부러 이주했을 정도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게르만 민족은 옛날 그대로 가난하고,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식사와 집에 만족하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갈리아 민족의 생활수준은 높아졌다. 로마 속주와 가깝고, 바다를 활용하여 외부와 통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쾌적한 생활에 익숙해진 그들은 게르만인과 싸우면 계속 지게 되었다. 그들의 열등감은 지우기 어려워서 이제는 자기들과 게르만인을 비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헤르키니아의 대삼림은 남북의 폭이 아흐레 거리다. 동서의 길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헬베티족이 사는 땅에서 시작되어 다누비우스(오늘날의 다뉴브 강 또는 도나우강)를 따라 동쪽으로 뻗어서, 다키아인이 사는 지방으로 들어가면 강을 떠나 북쪽으로 펼쳐진다. 우리 로마인이 아는 한, 게르만인조차도 이 대삼림의 끝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모르고 거기까지 가본 사람도 없다. 60일 동안 걸은 사람은 있었지만, 그 사람도 삼립 끝까지는 가지 못했다.


도나우강까지 진출한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기원전 52년부터 기원전 50년 말에 임기가 끝날 때까지 도나우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이루어진 일리리아 속주도 그의 관할 지역이었다.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시야에 넣은 카이사르에 의해 유럽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 문예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도 하고 작전도 짜고 일개 졸병의 역할까지 맡은 이 전쟁의 달인에게 전쟁이란 거대한 창작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럽’을 창작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대삼림지대로 도망쳐 들어간 수에비족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난 것은 아니다. 라인강 도하의 의도는 명쾌했다.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에 침입한 자는 로마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는 라인강 서쪽으로 돌아간 뒤 다리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동쪽 연안에서 60미터 되는 곳까지만 파괴했다. 이것은 로마군이 또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것을 게르만인에게 경고하고, 그들이 라인강을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절반만 부서진 다리의 갈리아 쪽 강기슭에 4층 높이의 망루를 세우고, 이 망루를 수비하도록 하기 위해 12개 대대 6천 명을 주둔시켰다. 그들의 숙영지로 견고한 진영도 건설했다.


이 일이 끝났을 무렵에는 계절도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암비오릭스에 대한 추격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게르만인의 발을 묶어놓은 이 기회를 놓치면 갈리아 북동부를 완전히 제압할 기회는 없었다.


암비오릭스를 추격하는 일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암비오릭스의 부족은 전멸 상태가 되었고, 지금까지 로마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지 않았던 다른 부족들도 비로소 카이사르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군단과 함께 레미족의 본거지인 두로코르토룸(오늘날 랭스(Reims))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이곳에 갈리아 전역의 부족장들을 소집했다. 카이사르는 이제 의장을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면서, 지난봄에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제압당한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주모자를 재판하여 족장들을 처형했다.


부족장 회의를 해산한 뒤, 카이사르는 기원전 53년부터 52년에 걸친 겨울철의 숙영지를 결정했다. 2개 군단은 트레베리족의 땅, 즉 라인강에 인접한 오늘날의 독일 서부에서 월동하고, 2개 군단은 링고네스족의 땅(오늘날 디종 부근). 나머지 6개 군단의 월동지는 세노네스족의 본거지인 아케딩쿰(오늘날 상스)으로 정해졌다.

[랭스대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크라수스


기원전 55년 60대에 들어선 크라수스는 초조해 있었다. 로마 제일의 부호인 그에게 부족한 것은 군사적 명성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미 군사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카이사르도 꾸준히 명성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시리아 총독을 5년 동안이나 맡게 된 것이다. 시리아 동쪽에는 대국 파르티아가 버티고 있는데 파르티아를 원정하여 속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총독인 크라수스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그런데 크라수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로마 시민들은 이 원정에 반대했다. 파르티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못 미더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막료들 가운데 특히 유능했던 크라수스의 맏아들 푸블리우스에게 5천 기밖에 안 되는 기병 중에서 1천 기를 떼어주고 아버지와 동행하게 했고, 폼페이우스도 자신의 옛날 부하로 군사의 베테랑인 옥타비우스와 카시우스를 동행시켰다.


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55년 11월 말,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 그리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이듬해 봄을 기다리지도 않고 시리아에 들어간 크라수스는, 전임 총독인 가비니우스한테서 물려받은 2개 군단과 스스로 편성한 6개 군단을 합하여 모두 8개 군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파르티아


당시 동방 무역으로 부를 쌓은 파르티아 왕국은 과거의 페르시아 제국 영토에 육박할 만큼 광대한 땅을 영유하는 대국이 되어 있었다. 서쪽 경계는 유프라테스강인데, 이쪽은 시리아 사막이 가로놓여 있어서 경계가 선을 그은 것처럼 뚜렷하지 않아 서쪽의 대국 로마와의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북쪽 국경의 3분의 1은 아르메니아 왕국과 접해 있는데, 이 무렵에는 아르메니아도 로마의 동맹국이 되어 있었다.


중무장 기병이 주요 전력이고, 그들의 주요 무기는 창이었다. 고원 기마민족의 후예인 만큼 기병 개개인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등자가 없는 시대, 기마민족의 전통을 갖지 않은 기병의 공격력은 어깨와 팔의 힘을 합친 것에 불과하지만, 말의 옆구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는 데 익숙한 경우에는 기사의 어깨와 팔 힘만이 아니라 말 자체의 돌격력까지도 기병의 공격력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르티아에서는 페르시아 시대의 전차도 활용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기원전 54년에 파르티아를 침공했는데, 이것이 뜻밖에도 간단히 성공을 거두었다. 적이 침공에 대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파르티아 영토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성공의 원인이었는데, 이 승리 때문에 모두 파르티아인을 얕보게 되었다.


게다가 크라수스의 경우에는 8개 군단 가운데 6개 군단이 신병이다. 엄격하고 충분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전력이 되지 않는다. 크라수스의 임기는 아직 4년이나 남아 있었다. 파르티아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원정을 강행하겠다는 것이 크라수스의 결심이었다.


파르티아 원정 경로


사료는 원정 시기에 관해 찬반 양론이 있었는지는 전해주지 않지만, 원정에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크라수스가 택한 길에 대해 격렬한 반대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전해주고 있다. 크라수스가 노리는 파르티아의 중요 도시 셀레우키아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 경로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한 뒤 곧장 동쪽으로 나아가 유프라테스강에 도달한다. 이 강을 따라 티그리스강 서쪽에 있는 셀레우키아와 같은 위도까지 남동쪽으로 행군한다. 그리고 티그리스강을 향해 동쪽으로 곧장 사막을 가로지른다. 여기서는 횡단거리가 10킬로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는 유프라테스강에 이르자마자 남동쪽을 향해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지대를 가로지른다. 티그리스강에 도착한 뒤에는 이 강을 따라 셀레우키아로 간다. 크라수스는 길안내를 맡은 아랍 귀족의 건의를 받아들여, 두 번째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겠다고 말해온 아르메니아 왕과 합류하는 데에는 확실히 이 길이 편리하긴 했다. 아르메니아군은 북쪽에서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모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지대를 횡단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격론 끝에 결국 총사령관의 의견이 다른 의견을 제압했다.

[크라수스 이동 가능 경로와 시리아 사막 지대 출처 구글 이미지]

파르티아의 수레나스


크라수스를 맞이하는 파르티아 쪽에는 갓 서른 살이 된 한 청년 귀족이 있었다. 역사에서는 그리스식 호칭인 '수레나스'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는 그는 파르티아에서도 최고의 가문 출신으로, 즉위하는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지위에 있었다. 오로데스 2세가 동생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힘이 컸다고 한다.

[오로데스 2세 출처 나무위키]

수레나스가 이끄는 병력은 기병 1만에 불과했다. 보병 3만 4천과 기병 4천을 거느린 크라수스에 대해 기병 1만으로 어떻게 싸울 작정이었을까. 당시 수레나스가 거느린 사병은 소수의 중무장 기병을 제외하면 활을 무기로 삼는 경기병(경무장 기병)이 대부분이었다. 오리엔트 국가들이 경기병을 전력으로 중시하지 않는 이유는, 어깨에 짊어진 화살통의 화살을 다 쏘아 버리면, 아무 쓸모도 없는 비전투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수레나스는 이 문제점을 해결했다. 1천 마리의 낙타 등에 화살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동행시킨 것이다. 화살통의 화살이 다 떨어지면 낙타한테 달려가 다른 화살통을 집어들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간다. 이것을 되풀이하면 종래처럼 경기병이 금방 비전투원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경기병의 활은 말 위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무게를 가볍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사정거리가 짧아지고 꽂히는 힘이 약해진다. 로마군 병사들이 사용하는 견고한 방패에 맞으면 튀어나올 뿐이다. 파르티아의 귀공자는 이 결점도 개선했다. 보통 활과 크기도 같고 무게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활의 구부러진 부분을 하나가 아니라 둘로 하고, 쇠붙이를 붙여 활시위를 강하게 개량했다.


카레(Carrhae) 전투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자마자 벌써 난관에 부닥쳤다. 우선 희망을 걸고 있었던 아르메니아 왕이 참전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러자 길안내를 맡은 아랍 귀족이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일설에 따르면 그 아랍인은 로마군을 사막지대로 유인하는 임무를 띤 첩자였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부터 불안한 요소가 많은 진격이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가로놓인 사막지대를 횡단하는 것도 상책이 아니었다. 아르메니아군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되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사막지대에 발을 들여놓은 크라수스의 머릿속에는 그 사막을 빨리 횡단할 생각밖에 없었다. 강렬한 햇빛을 가려주는 것도 없는 건조지대를 40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짊어지고 행군하는 것이다. 행군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시리아 사막지대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300킬로미터도 채 가기 전에 벌써 적군이 모래언덕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크라수스는 당장 진형을 폈다. 좌익에는 회계감사관 카시우스가 이끄는 기병 2천, 중앙에는 군단장 옥타비우스가 이끄는 보병, 우익에는 아들 크라수스가 이끄는 갈리아 기병 1천을 주력으로 한 2천 기가 포진했다. 로마군은 오리엔트 군사력의 주력으로 알려진 중무장 기병의 공격을 기다렸지만 막상 공격해온 것은 말을 탄 궁병이었다.


파르티아 경기병의 위력


로마군에서 궁병은 경무장 보병에 속한다. 주력부대가 아니라 전투 초기에 화살을 쏘아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사정거리도 기껏해야 50미터에 불과하다. 그런데 파르티아 기병의 화살은 그 세 배나 되는 사정거리를 갖고 있었다. 아군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적군은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온다.


게다가 로마군 병사들은 잠시만 참으면 적군 궁병의 화살이 다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화살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화살은 끊임없이 비오듯 쏟아지고, 영문을 모르는 로마 병사들은 불안해졌다. 이 끝없는 화살과 불안이 로마군의 견고한 정사각형 진형을 여기저기서 무너뜨렸다.


이렇게 되자 전투의 주도권은 완전히 파르티아 쪽으로 넘어갔다. 파르티아 경기병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군과 떨어져 싸우고, 게다가 활이 무기이기 때문에 떨어져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은 사막을 종횡으로 질주하면서, 한데 뭉쳐서 방어하는 로마군 병사들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렸다. 수레나스의 고안으로 개량된 활은 돌파력도 강했다. 로마군의 방패마저 꿰뚫을 정도니까 갑옷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수레나스의 병법 앞에서는 보병보다 기동력이 휠씬 뛰어난 기병조차도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무기는 창과 칼이다. 접근하지 않는 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적군은 화살을 비오듯 퍼부어 로마군 기병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군의 기병 4천 기도 방어에만 급급한 보병과 다름없는 고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카레 전투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젊은 크라수스의 죽음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 승부를 가르는 것은 총사령관의 임기응변이다. 그런데 크라수스는 이때도 정석대로의 전술을 답습했을 뿐 거기에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우익을 지키는 아들에게 기병 2천 기를 모두 이끝고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아군이 숨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도 록 적군 경기병의 공격을 방해하는 임무만 부여하고, 그 이상 깊이 추격하는 것은 강력하게 금지했어야 한다.


그런데 총사령관의 아들 크라수스는 추격을 자제하기에는 너무 젊었고, 게다가 파르티아군의 예기치 못한 전술에 우롱당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파르티아의 귀공자는 로마의 젊은 장군이 2천 기와 함께 공세로 나온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휘하의 모든 기병에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퇴각으로 위장한 후퇴는 교묘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깊이 추격한 청년 크라수스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되돌아가려 해도 되 돌아갈 수 없는 거리까지 유인되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파르티아군 기병 1만 기가 로마군 기병 2천 기를 포위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하는 갈리아의 정예 기병도 수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나누어준 갈리아 기병이 모두 전사했다. 청년 크라수스는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모래언덕 너머로 간신히 피신했지만, 포위 망을 돌파할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 채로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한 젊은 장군은 자결을 선택했다. 부하 장교들도 그 뒤를 따랐다.


파르티아 기병의 총퇴각으로 한숨 돌린 로마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전사자를 치우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그것도 일단 끝나, 로마군이 진형을 정비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 적군이 무언가를 던져왔다. 그것은 젊은 크라수스의 목이었다. 로마군은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혔고, 총사령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혼란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카시우스의 이탈


밤의 장막이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을 때에야 일방적인 살육도 마침내 끝났다. 오리엔트 병사들은 밤에는 절대로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 파르티아 기병대도 모래언덕 저편으로 물러났다. 결국 옥타비우스와 카시우스는 고개만 끄덕인 크라수스의 승인을 언어, 야습은 커녕 한밤종의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의 목적지는 현재 위치보다 조금 북쪽에 있는 카레(오늘날 터키의 하란)였다. 오래전에 파르티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의 도시다. 카레에 들어박혀 저항하기도 어려워진 로마군은 5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시나카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도시가 농성에 더 적합하다고 판 단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우스는 5천 명을 이끌고 떠났다. 크라수스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뒤따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크라수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카시우스가 이탈했다. 기병 500기를 데리고 북쪽이 아니라 서쪽의 안티오키아를 향해 달아나버린 것이다. 옥타비우스가 이끄는 5천 명은 시나카성에 들어갔지만, 크라수스가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다. 카시우스의 이탈이 다른 병사들한테까지 전염되어, 총사령관을 따라가는 병사가 갈수록 줄어들었던 것이다.


크라수스와 옥타비우스의 죽음


기원전 53년 6월 12일, 크라수스와 수레나스가 처음 대결한 지 사홀째에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참모장 옥타비우스는 5천 명의 병사와 함께 시나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사령관 크라수스는 3천 명으로 줄어든 나머지 병사와 함께 겨우 시나카에 접근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수레나스가 나타났다. 1만 기에 달하는 적의 기병을 보고 크라수스는 가까운 언덕으로 피신했다.


수레나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로마군 총사령관에게 강화를 제의하면서, 강화 조건을 의논하기 위해 직접 만나 회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제의의 참뜻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크라수스도 물론 눈치챘다. 그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며 회담에 나가라고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만약 자기가 죽더라도 그것은 적의 속임수 때문이지 아군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전해달라는 말을 참모들에게 남기고, 진영을 떠나 혼자 적을 향해 걸어갔다. 옥타비우스는 총사령관을 혼자 보낼 마음이 나지 않아서, 장교들을 데리고 그 뒤를 따랐다.


결국 수레나스를 만난 후 크라수스도 옥타비우스도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다. 크라수스는 로마 군단병의 글라디우스 검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아마 옥타비우스나 참모 가운데 누군가가 로마군 총사령관이 포로가 되는 것을 막고 싶어서 그를 찔렀을 것이다. 단 며칠 동안의 전쟁에서 로마는 7개 군단 병력을 은독수리의 군단기와 함께 몽땅 잃어버렸다(수레나스가 크라수스가 탐욕스럽다고 그의 입에 황금을 녹인 물을 부어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크라수스의 죽음 출처 구글 이미지]

파르티아가 로마에 이긴 것은 오리엔트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지금까지 로마 편이었던 아르메니아 왕국이 파르티아 쪽으로 돌아셨다. 또한 기세가 오른 파르티아군은 로마 속주인 시리아를 공격해았다. 카시우스의 노력으로 파르티아군의 침공은 저지되었지만, 그것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폐잔병이 잘 싸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파르티아 쪽에 수레나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셀레우키아로 개선하여 한창 의기양양해 있던 수레나스는 축하연에서 마신 술도 채 깨기 전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의 명성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오로데스왕이 사고를 위장하여 죽여버린 것이다. 경기병을 전력화한 젊은 장군은 이리하여 30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파르티아인들은 낙타와 경기병을 짜맞춘 독창적이고 효율적인 전술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수도의 혼미


크라수스의 죽음을 알게 된 원로원 의원들은 설욕전을 강구하기보다는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한 모퉁이가 무너져버린 삼두정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관심을 쏟았다. 남은 '이두'가 앞으로도 동맹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의 존재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민중파’를 외치는 클로디우스 일파와 ‘원로원파’를 내세우는 밀로 일파의 싸움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기원전 53년 여름에 실시되어야 할 이듬해 집정관 선거도 계속 연기되었다.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민회가 폭력으로 얼룩지는 바람에 회의조차 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52년도 집정관은 폼페이우스 한 사람으로 한다는 원로원파와 카이사르의 타협으로 겨우 해결을 보았다.


이렇게 얼버무려서라도 일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클로디우스가 밀로 일파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밀을 싼값으로 배급하던 것을 아예 무료 배급으로 바꾸어 서민층에 인기가 높았던 클로디우스의 뜻밖의 죽음에 서민층의 분노는 폭발했고, 포로 로마노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가한 서민들은 폭동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클로디우스를 잃은 서민층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같은 원로원파라는 인연 때문에 밀로의 변호를 맡은 키케로가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실패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죽일 생각은 없이 우연히 만나서 싸움이 붙었고, 클로디우스의 죽음은 그 우발적인 싸움의 결과일 뿐이라는 키케로의 변호를 배심원조차 납득하지 않았던 것이다. 밀로는 마르세유로 자진 망명하여 사형을 면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카이사르 48세)
[갈리아 전쟁 7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기원전 52년의 갈리아인의 봉기는 역사상 갈리아 민족이 처음으로 대동단결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준비 끝에 모든 부족이 총궐기하여 카이사르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계기를 만든 것은 지난해 족장 아코가 극형에 처해진 일로 원한에 사무쳐 있던 카르누테스족이었다.


그들은 겨울 동안 주변의 부족장들과 접촉하여, 내일은 당신들도 아코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거라고 부추겼다. 로마군이 이기는 것은 카이사르가 지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지금 이탈리아 북부에 머무르고 있으니 갈리아에서 월동하고 있는 10개 군단과 카이사르의 합류를 저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망도 충분하다는 것이 첫 번째 요인이었다.


또한 두 번째는 수도 로마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카이사르가 쉽사리 갈리아로 돌아올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카이사르에게 밀려 라인강 너머로 쫓겨난 게르만인들이 갈리아로 쳐들어오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여 일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카르누테스족의 본거지는 케나붐(오늘날의 오를레앙)이다. 케나붐에는 카이사르의 교역 장려책에 따라 사업차 찾아온 로마 시민들이 많이 체류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카이사르의 명령을 받고 군량을 구입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카르누테스족은 이 민간인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로마인, 그중에서도 특히 카이사르는 이런 짓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결행한 것이다.

[오를레앙 전경 출처 구글 이미지]

베르킨게토릭스


아르베르니족은 산악지대를 사이에 두고 프로빈키아 속주와 접해 있는 ‘장발의 갈리아’에서는 가장 남쪽 지방에 사는 부족이다. 강력한 부족이지만, 지금까지는 카이사르에게 반항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친로마파인 현부족장의 형으로서 반로마파 활동을 하다가 사형당한 인물에게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베르킨게토릭스.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동지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하여 숙부인 친로마파 부족장을 추방하고, 그 자신이 아르베르니 족장 자리에 앉았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아르베르니 족장의 이름으로 갈리아의 모든 부족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에 대한 궐기를 촉구했다. 카르누테스족을 비롯한 봉기파가 우선 이 호소에 응했다. 그밖에 중부 갈리아의 많은 부족도 호응해왔다. 주요 부족들 가운데 응하지 않은 것은 하이두이족뿐이었다.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들어가기 전에, 카이사르는 여기까지 정보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군단과 합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세 곳에 나뉘어 월동하고 있는 군단을 모두 남쪽의 프로빈키아 속주에 집결시키면 중부 갈리아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베르킨게토릭스와 그 군대에 습격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카이사르가 직접 군단의 겨울철 숙영지로 가자니 급히 편성한 1개 군단밖에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이때 적이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를 받게 된 중부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프로빈키아 속주를 공격해온 것이다. 프로빈키아를 공격함으로써 카이사르가 그곳의 방위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 카이사르와 군단의 합류를 늦추는 것이 베르킨게토릭스의 의도였다. 확실히 이 전략은 옳았다. 하지만 상대는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의 군단 합류


적이 프로빈키아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은 카이사르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모두 버리고 나르본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거기서 당장 방어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수비에 전념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세로 나왔다. 베르킨게토릭스한테서 병력을 나누어 받아 프로빈키아 공격을 전담하고 있던 룩테리우스는 로마군의 신속한 대응에 깜짝 놀랐다. 그는 프로빈키아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휘하 병사들과 함께 북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적이 등을 돌린 것을 알자마자 카이사르는 다음 행동으로 옮아갔다. 기병대만 이끌고 눈덮인 산맥을 넘는 모험을 결행했다. 총사령관이 몸소 반격에 나선 것이다. 한 길 높이로 쌓인 눈을 헤치고 길을 뚫으면서 어렵게 행군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아르베르니족은 동쪽에도 설마했던 적이 출현했기 때문에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산을 넘은 기병대에게 카이사르는 되도록 야단스럽게 주변을 약탈하고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아르베르니족은 갈리아 중부에서 월동 중인 로마 군단을 공격하려 하고 있던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냉정한 베르킨게토릭스도 동족의 애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군 숙영지 공격을 일단 중지하고,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세는 카이사르가 예측한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 틈에 카이사르는 소수의 기병만을 이끌고 재빨리 비엔으로 들어가 작년 겨울에 고용해 두라고 명령한 게르만 기병 400기를 인수한 다음 하이두이족의 땅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하여 링고네스족의 땅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2개 군단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당장 라인강 서쪽 연안의 트레베리족의 땅에서 월동하고 있는 2개 군단에 전령을 보내, 아게딩쿰(오늘날의 상스)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그 자신도 방금 합류한 2개 군단을 이끌고, 6개 군단이 월동하고 있는 상스로 갔다.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의 합류가 끝난 뒤에야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의 10개 군단이 모두 카이사르의 지휘하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카이사르의 군단 합류 경로 출처 본문]

갈리아 총궐기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중부의 모든 부족을 봉기에 끌어들이자. 그게 실현되면 카이사르의 군사력보다 10배나 많은 전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식량을 무기로 삼아 적지에 고립된 로마군을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전략을 짰다. 그래서 먼저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는 하이두이족의 보호를 받고 있던 보이족의 본거지 고르고비나를 공격하러 갔다. 추운 겨울이라 카이사르가 보이족을 구원하러 오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움직임을 알자마자, 보이족에게는 전령을 보내 되도록 빨리 구원하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고 방어에 전념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상스에는 2개 군단과 모든 수송부대를 남겨놓고, 순수 전투원만 8개 군단을 이끌고 숙영지를 떠났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의도를 저지하려면 로마의 군사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상스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몽타르지에 도착했는데 겁을 먹은 상대가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미 카르누테스족의 본거지인 오를레앙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 살해된 로마 민간인의 원수를 갚는 것도 적에게 주는 효과와 아군 병사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비투리게스족의 요새인 상세르로 갔다. 여기 역시 겁을 집어먹고 공격당하기 전에 항복했다.


카이사르가 접근하는 것을 알고 고르고비나 공략을 포기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를 맞아 싸울 셈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카이사르 휘하에 들어온 게르만 기병대의 선전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카이사르는 계속 적을 향해 진격했다. 다음 목적지는 비투리게스족의 본거지인 부르주(Brouges)였다. 봉기한 갈리아의 중심부로 쳐들어가는 셈이다.


잇따라 패배를 맛본 반란군은 부족장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고,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하게 되었다. 여기서 베르킨게토릭스가 주장한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초토화 작전’이었다. 갈리아 중부를 초토로 만들어, 로마군이 군량을 조달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도 곧 용두사미가 되었다. 부르주도 초토가 될 터인데, 베르킨게토릭스가 주민의 탄원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공격 진로 출처 본문]

부르주 공격


고대에 아바리쿰이라고 불린 부르주는, 주민들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탄원할 때 자기네 도시는 수비가 견고해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을 테니까 불태울 필요는 없다고 장담한 것을 실증하듯, 천연의 요해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요새화된 도시는 강으로 둘러싸이고, 그 강의 양쪽 연안은 늪지로 뒤덮여 있고, 도시에 이를 수 있는 통로는 딱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아주 좁은 통로였다.

[프랑스 부르주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요해지를 공략하기로 결정한 카이사르는 앞쪽의 적만 고려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부르주에서 24킬로미터쯤 떨어진 숲과 늪지대에 진영을 짓고, 로마군 병사들이 군량을 조달하러 나오면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태에서는 외부에서의 군량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요청을 받은 하이두이족과 보이족은 동맹자의 의무를 수행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비축해 둔 식량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황에서도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사는 계속되었다. 주변 지형 때문에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공성용 울타리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통행할 수 있는 유일한 지대에 두 개의 탑이 우뚝 솟은 울타리를 세우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르주 공방전은 로마군의 공성 준비가 끝난 것을 보고 절망한 농성자 쪽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2개 군단이 항상 보초를 서고 있던 로마군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투는 한밤중에 시작되었다. 날이 밝을 무렵에는 전투 결과가 분명해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남기고 성안으로 쫓겨 들어간 농성자 쪽은 그날 밤의 전과와 계속되는 농성에 절망해 있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세차게 비가 퍼부었다. 카이사르는 이런 날씨야말로 총공세를 펴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다. “오늘이야말로 길고 괴로웠던 날들의 열매를 거두는 날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병사들의 전투 의욕이 이날 한꺼번에 폭발했다. 병사들은 모든 전선에서 앞다투어 성벽에 달라붙었다. 4만 명이었다는 부르주 주민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총공세가 시작된 초기에 성을 빠져나와 달아난 800명뿐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지도력


갈리아인의 성향으로 보면, 그들은 여기에 동요하여 베르킨게토릭스의 지도력을 의심하고, 그 결과 갈리아의 통일전선이 무너져야 마땅했다. 그런데 갈리아 진영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결과는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


첫째 이유는 베르킨게토릭스가 고식적인 변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부르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부족장들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셋째, 로마군이 승리한 요인은 그들의 용맹함이 아니라 기술력이고, 갈리아인도 그것을 모방하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여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는 베르킨게토릭스에게서 자신들보다 뛰어난 정력과 퉁찰력과 지도력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해도, 장기판 저쪽에 앉아 있는 상대는 베르킨게토릭스 한 사람뿐이다. 장기판 저쪽에 하나뿐인 상대를 갖게 된 것은 갈리아처럼 여러 부족이 난립해 있는 지방을 제패하는 데에는 오히려 바람직한 변화라는 것을 카이사르가 깨닫지 못했을 리는 없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조국 아르베르니아의 수도 게르고비아(현재 클레르몽페랑 근처)를 다음 목표로 결정했다.

[클레르몽페랑 출처 구글 이미지]

게르고비아 전투 - 카이사르 철수하다


해발 700미터 고지에 자리잡은 게르고비아는 이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그 성채 바깥쪽에, 고지가 평야와 맞닿는 지점보다 조금 위쪽에 높이가 2미터나 되는 돌담을 둘러치게 했다. 게르고비아는 오늘날의 클레르몽-페랑에서 남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는데, 그 성을 바라본 카이사르는 공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한눈에 깨달았다.


게다가 아르베르니족의 땅과 하이두이족의 땅은 알리에강을 경계로 나뉘어 있는데, 아르베르니족의 수도를 공격하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바로 북동쪽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하이두이족이 책임지고 군량을 보급해주면 장기적인 포위전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하이두이족이 적군 쪽으로 기울어지면, 군량 보급이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큰일난다. 그런데 그 큰일이 사실로 되어가고 있었다.


하이두이족의 내분은 원래 권력 다툼에 불과했지만, 갈리아의 민족의식을 둘러싼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시점에서 이미 병력 제공도 군량 보급도 하이두이족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이두이족을 믿을 수 없다면, 부르주 때보다 훨씬 장기전을 각오해야 하는 게르고비아 공략전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은 당장 갈리아 전역에 퍼졌다.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부족들도 이제 태도를 분명히 정했다. 하이두이족에서도 민족파가 승리를 차지했다. 이제 중부 갈리아 전체가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전후좌우로 느끼면서 강행군을 계속한 카이사르와 6개 군단은 역시 위급을 알고 집결지로 달려온 부장 라비에누스의 4개 군단과 상스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만약 베르킨게토릭스의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면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 속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카이사르에게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부르주 때와는 달리, 어떤 부족이 초토화 작전에 반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원인은 갈리아의 젊고 유능한 지도자 자신에게 있었다.


일단 카이사르는 라인강 동쪽에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고 있던 우비족에게 기병을 보충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우비족의 기병을 보충받은 뒤 상스를 떠나 남동쪽으로 행군했다. 프로빈키아 속주를 구원하러 가려면 남동쪽으로 이동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로마군의 진로를 알고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뻐 날뛰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은 남쪽으로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내버려두면 나중에 더욱 강력해져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공격하여 철저히 쳐부술 필요가 있다”고 갈리아 부족들을 설득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전략가로 이름높은 카이사르와 정면 대결하는 것을 애써 피해왔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는 전술의 묘를 다투는 회전에서는 카이사르의 적수가 못 되었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세 방향에서 공격했는데도, 또한 우세한 갈리아 기병을 모두 투입했는데도, 카이사르는 세 방향의 적을 모두 무찔러버렸다. 게르만 기병대가 기대 이상으로 활약해준 덕분도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보병한테는 참전조차 허락하지 못한 채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여 고지대에 있는 알레시아로 들어가버렸다.


알레시아 공방전


로마군에 대한 소모작전이 성공하고 있었는데, 왜 베르킨게토릭스는 그 작전을 포기하고 도박 같은 결전으로 나왔을까. 알레시아는 만두비족의 도읍이지만, 주변의 어느 부족한테도 귀속되지 않은 탓도 있어서 갈리아인들은 이곳을 성지로 숭배하고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여기에 틀어박힌 채 갈리아 전역에 구원을 호소하면, 갈리아인의 민족의식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알레시아로 들어간 그는 카이사르의 제1차 포위망이 완성되기 훨씬 전에 대부분의 기병들에게 각자 고향으로 보내 사정을 호소하고 최대한 군사를 많이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기병들에게 이 역할을 맡긴 이유는, 군량이 30일분밖에 없기 때문에, 구원 요청이 한시라도 빨리 전달되기를 바랐고, 갈리아에서는 기병이 상류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각 부족의 결정에 좀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알레시아 포위망 구축


카이사르의 군단은 오늘날의 공과대학처럼 군단병들을 엔지니어로 키우기도 했고, 『갈리아 전쟁기』에는 그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갈리아 전쟁기』의 서술은 이보다 1,800년 뒤에 나폴레옹 3세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로 정확성이 실증되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알레시아 포위망 구축 작업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우선 포위망은 동시에 방어망이어야 했다. 안쪽(알레시아에 농성 중인 갈리아군)의 반격과 바깥쪽(외부에서 도착할 지원군)의 공격에 각각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안쪽 진지는 전체 길이가 11로마마일(16.5킬로미터), 바깥쪽 진지는 주변 고지대의 능선을 전략적인 관점에서 활용했기 때문에 길이가 14로마마일(21킬로미터)이었다. 안팎 양쪽이 방어진지로 둘러싸인 중간지대는 폭이 120미터에 이르렀다.


바깥쪽 진지에도 안쪽과 같은 일곱 겹의 방책 공사가 같은 순서로 되풀이되었다. 전사(戰史)에서도 전대미문인 이 포위망은 완성하기까지 최소한 한 달은 걸렸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한 뒤에야 병사들에게 휴식을 허락한 카이사르는 한 달 이내에 승부가 결정되리라 예상하고, 30일분 식량과 말의 사료를 비축해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갈리아 구원군의 도착


알레시아에 틀어박힌 갈리아인들은 대기할 형편이 아니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배급제를 시행했는데도 식량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봉쇄가 완벽하여, 갈리아인들은 외부로 식량을 조달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8만 명의 병사에다 주민들까지 먹여야 한다. 그런데 구원병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알레시아 주민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베르킨게토릭스의 호소가 통했다. 구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부족의 수는 50개에 달했고, 부족별로 할당된 병력의 합계는 보병 25만 명과 기병 8천 기에 이르렀다. 아퀴타니아 지방을 제외하면, 갈리아 전체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일어난 셈이다. 헬베티족도 8천 명을 제공했고, 브리타니아 원정에 같이 참전했던 콤미우스까지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갈리아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전략이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첫 대결


기원전 52년 9월 20일, 구원군은 마침내 알레시아가 눈앞에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카이사르는 5만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안과 밖을 합하면 34만 명에 가까운 적과 싸우게 되었다.


카이사르와 갈리아 전체의 첫 대결은 기병전으로 시작되었다. 양군의 보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병전은 정오부터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갈리아 기병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탓도 있어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선전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휘하의 게르만 기병대는 수에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했는데도 그 활약이 눈부실 정도였다.


또한 알레시아에서 기세좋게 몰려나온 보병들도 로마군 진지에는 접근하지도 못했고, 무모하게 접근을 시도한 자들은 방벽 너머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모조리 죽었다. 그들은 바깥쪽 기병이 퇴각한 것을 알자마자 알레시아 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첫 대결은 로마군의 우세로 끝났다.


제2차 공격


이튿날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갈리아가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 사다리나 갈고리 같은 공성기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뒤, 한밤중에 평원 쪽에서 로마군 진지를 향해 쳐들어왔다. 베르킨게토릭스도 성벽을 넘어 보병대를 내보냈다. 그러나 로마군은 한밤중에도 허를 찔리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수비 지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 배치해둔 투석기에 달라붙어 돌멩이나 납덩어리나 말뚝을 적에게 쏘아댔다.


갈리아군은 방벽 바깥쪽을 몇 겹씩 둘러싸고 있는 장애물 때문에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안전한 지대에서 화살을 퍼붓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워낙 수가 많기 때문에 화살도 비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결국 갈리아군은 바깥쪽에서도 안쪽에서도 로마군 진지를 돌파하지 못했다. 새벽이 다가오자 그들은 진영으로 물러났다. 로마군의 손실에 비해 갈리아군의 손실은 엄청났다. 카이사르는 두 차례에 걸친 안팎의 협공을 두 번 다 물리친 셈이다.


제3차 공격


바깥쪽 갈리아군의 수뇌진은 공격이 두 번이나 실패하자, 다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작전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을 불러서 지형과 로마군 진지의 상태 따위를 캐물었다. 그 결과, 완벽해 보이는 로마군의 포위망에도 딱 한 군데 허술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알레시아의 북쪽을 흐르는 강 건너편, 즉 알레시아의 배후에 있는 언덕이었다. 그 언덕은 포위망으로 둘러싸기에는 너무 넓어서, 카이사르도 어쩔 수 없이 전략적으로 불리한 언덕 중턱에 보루를 쌓아 지키고 있었다. 갈리아군은 카이사르의 '아킬레스 힘줄'인 그 부분에 제3차 공격을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가이사르도 그 부분이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2개 군단 1만 명의 병력 즉 그가 가진 전체 병력의 5분의 1이나 되는 전력을 이곳에 집중 배치해놓고 있었다. 갈리아군은 정예병력 6만을 여기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지휘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인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쟁터가 된 남쪽과 동쪽의 평원에서는 나머지 병력이 동시에 공세를 편다.


또한 알레시아에서도 8만 명이 공세로 나올 게 분명 하니까, 갈리아군은 이튿날 정오에 세 방향에서 동시에 로마군을 공격하는 작전을 펴게 되었다. 6만의 정예부대를 지휘하게 된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밤 9시에 몰래 진영을 나와, 로마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 길을 우회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예정지에 도착한 것은 이튼날 동이 트기 전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정오가 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면서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정오, 알레시아 공방전 최대의 격전이 세 군데에서 동시에 막을 올렸다. 이날의 중대함을 재빨리 알아차린 카이사르는 세 방향을 모두 시야에 넣 수 있는 망루 위로 올라가 총지휘를 했다. 카이사르의 진홍빛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하면 그의 부하들에게는 결전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전쟁터를 시야에 모두 넣으면 전투의 성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다.

[알레시아 공방전 양상 출처 구글 이미지]

최대의 격전지가 북쪽 언덕이라는 것은 공격 개시와 동시에 분명해졌다. 그곳을 공격하는 갈리아군은 구릉의 높은 곳에서 치고 내려온다. 이와는 반대로 로마군은 낮은 곳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보루나 참호에서 진지를 지키는 상태가 되었다. 6만 명의 갈리아 정예병력은 일제히 돌을 쏘아 로마군의 기를 꺾어놓고, 방패를 나란히 늘어세운 거북등 대형으로 쳐들어왔다.


카이사르는 이 최대 격전지에 부장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6개 대대를 보냈다. 라비에누스는 도저히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병사들을 보루나 참호에서 내보내 반격으로 나가되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최후의 수단으로 그 방법을 택하라는 카이사르의 엄명을 받았다.


이제 전쟁터를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장소에서 총지휘를 맡을 단계는 지났다. 망루에서 내려온 카이사르는 말에 올라타고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방어에 열심인 병사들을 독려했다. 총사령관은 지금까지 치른 그 모든 전투의 성과가 오늘의 이 한판 싸움에 달려 있다고 큰 소리로 격려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알레시아 농성군의 반격도 그날은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 늑대를 잡는 함정은 이미 시체로 메워져 있었다. 바깥쪽 갈리아군의 공격도 격렬함에서는 지난번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대군이 갈고리를 방책에 걸고 잡아당겼다. 그래서 방책이 쓰러지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일곱 겹의 장애물을 둘러친 포위망은 로마군 병사의 수를 고려하면 경이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잘 버터냈다.


카이사르는 고전하고 있는 곳에 차례로 지원군을 보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몇 개 대대와 함께 파견되었다. 다른 곳에는 군단장 파비우스가 역시 몇 개 대대를 이끌고 지원하러 갔다. 카이사르 자신도 휘하 병사를 이끌고 지원하러 달려갔다. 적절하고 신속하게 유격대를 파견한 덕분에, 고전하고 있던 아군 병사들도 기운을 되찾았다. 위태로워 보인 곳에서도 로마군이 적을 물리치는 추세로 바뀌었다.


카이사르는 이제 자신도 라비에누스를 파견해둔 최대 격전지로 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까운 진지를 지키고 있던 4개 대대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또한 기병대를 양분하여, 절반은 그가 이끌고, 나머지 절반은 포위망 밖으로 나가서 갈리아 정예부대를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명령과 함께 북쪽 전선으로 보냈다.


카이사르의 진홍빛 망토 때문에, 6만 명의 갈리아 병사들도, 그들을 지휘하는 베르카시벨라우누스도 당장 카이사르가 도착한 것을 알았다. 전투는 카이사르의 도착으로 더한층 치열해졌다. 적군과 아군이 지르는 함성은 하늘을 찌르고, 반격으로 돌아선 로마군 병사들은 창을 버리고 칼로 싸웠다. 카이사르를 따라온 4개 대대도 당장 전선에 투입되었다.


백병전이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 카이사르가 배후에서 공격하도록 내보낸 로마군 기병대가 적의 배후에 모습을 나타냈다. 6만 명의 갈리아군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로마군 기병대가 덤벼들었다. 앞뒤에서 협공당하게 된 갈리아군에게는 이제 더 이상 6만 명의 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장은 전사했고, 대장인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다. 6만 명의 갈리아군이 전멸했다. 극소수의 병사들만이 본영으로 달아날 수 있었을 뿐이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8만 명도 눈앞에서 벌어진 완패에 기가 꺾여, 사령관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성안으로 돌아가버렸다. 남쪽 평원에서 로마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격투를 벌이고 있던 갈리아군 본대도 북쪽 전선에서 완패한 것을 알자마자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밤중이 지났을 때 기병대가 추격에 나섰다. 로마 기병대는 패주하는 적의 후미를 습격했다. 많은 병사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것을 모면한 갈리아 병사는 각자 고국으로 달아났다. 5만 명도 채 안 되는 전력으로 안쪽 8만 명, 바깥쪽 26만 명을 합하여 34만 명이나 되는 적을 격파한 것이다. 앞뒤 양쪽의 적에 대해 거둔 승리로는 전쟁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의미를 누구보다도 이해한 것은 구원군의 패주를 직접 목격한 베르킨게토릭스였을 것이다. 이튿날 그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렇게 말했다. “카이사르와의 대결에 갈리아 전체를 끌어들인 것은 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갈리아인의 자유를 위해서였다“고.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제안했다. “운명에 거역할 수는 없으니까, 나를 죽이든가 산 채로 넘겨주고 다른 사람들의 구명을 카이사르에게 요구해라.”


로마군 진지 앞에, 갈리아군 총사령관의 화려한 복장을 갖춘 베르킨게토릭스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말에서 내린 베르킨게토릭스와 야전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카이사르는 여기서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셈이다. 카이사르는 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음 한 줄을 기록했을 뿐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진해서 포로의 몸이 되었다. 긍지 높은 갈리아인은 무기를 버리고, 로마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끓은 것이다.‘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레시아 공방전에 참가한 갈리아 유력자들 가운데 포로 신세가 된 것은 베르킨게토릭스 한 사람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희생하여 동포를 구하려 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충정을 존중한 것이다. 수도 로마로 압송된 베르킨게토릭스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내전때문에 부득이하게 연기된 카이사르의 개선식이 기원전 46년에 거행되었을 때, 개선식에 참석한 뒤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얼굴임이 확실한 초상은 화폐 한 개에 돋을새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카이사르의 개선식을 기념하여 발행된 화폐에 갈리아인이라고만 적힌 남자의 옆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6년 동안의 감옥 생활로 초췌해졌을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역시 갈리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카이사르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베르킨게토릭스의 6년 뒤 모습인지도 모른다.

[베르킨게토릭스 주화와 갈리아인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갈리아 전쟁 8년째
(기원전 51년, 카이사르 49세)
[갈리아 전쟁 8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갈리아 전쟁기』의 마지막 권, 즉 제8권은 히르티우스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이 서문은 갈리아 전쟁 8년째를 쓰도록 강력히 권유한 카이사르의 측근 발부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발부스, 당신이 그토록 열심히 권유하는데도 내가 매번 거절한 것이 이 어려운 작업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여겨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도 마침내 이 어렵기 짝이 없는 임무를 떠맡기로 결심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서 『내전기』에 이르는 서술 가운데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내전기』에 서술되지 않은 알렉산드리아 전쟁 이후의 내란-이것은 지금도 결말이 나지 않았지만-중에서도 카이사르의 죽음까지를 내 펜으로 메우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읽는 이들은 적어도 내가 이 임무를 떠맡을 마음이 얼마나 내키지 않았는지는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감히 카이사르가 쓴 책의 속편을 쓰는 내 어리석음과 자만심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주겠지요“


전후 처리 1


히르티우스가 쓴 『갈리아 전쟁기』 제8권은 알레시아 공방전 이후 카이사르의 전후 처리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약소부족까지 합하면 100개나 되는 부족이 난립해 있고 지휘계통이 서 있지 않은 갈리아에서는 페르시아 제국만을 상대로 싸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방법은 쓸 수 없었다.


먼저 갈리아의 4대 부족인 하이두이족, 아르베르니족, 링고네스족, 세콰니족은 알레시아 패배의 의미를 깨닫고 재빨리 카이사르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왔다. 카이사르도 지도자 계급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까지 허락하고, 다시 동맹 서약을 맺었다.


하지만 중간 규모의 부족은 원래부터 강대 부족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또한 알레시아 공방전에 참가한 병력도 적었기 때문에, 알레시아 패배로 입은 상처도 별로 깊지 않았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런 부족들의 문제를 되도록 빨리 해결하는 것이 전후 처리의 첫 단계가 되었다.


기원전 52년 12월, 갈리아 부족들을 정벌하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었다. 원정은 오를레앙을 중심으로 하여 갈리아 각지로 마치 부채꼴로 퍼져가면서 이루어졌다. 그해의 정벌 대상은 알레시아 공방전에 참전함으로써 이미 카이사르와 맺은 서약을 어긴 부족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정벌은 아녀자들이 길거리를 헤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불지르는 잔학한 것이 되었다. 성에 틀어박혀 저항을 계속하는 부족에게는 수공작전을 펴서 물길을 끊거나 강물로 침수시키고, 마침내 항복한 병사들의 팔다리를 잘라버리기도 했다. 카이사르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전후 처리 2


로마의 전직 집정관은 군사적으로 제패한 지방을 로마의 패권하에 재편성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원로원에 제출할 의무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생각한 갈리아 재편성안의 요점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프로빈키아 속주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의 경계는 남서쪽은 피레네산맥, 서쪽은 대서양, 북쪽은 도버해협, 동쪽은 라인강으로 정한다.
2. 하이두이족, 아르베르니족, 세콰니족, 링고네스족 등 4대 부족을 로마의 동맹자로 삼아 협약을 맺고, 이 4대 부족을 중심으로 갈리아가 통합되는 것이 현실적이다.
3. 중소 부족을 포함한 갈리아의 모든 부족에게 내정의 자치를 인정한다.
4. 사제, 기사, 평민, 노예로 나뉘어 있는 갈리아의 사회제도는 그대로 유지한다.


갈리아의 사회제도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으로 퍼져가는 그리스·로마식 도시국가와는 달랐다. 카이사르가 그 사회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게르마니아보다 갈리아가 로마화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 이유는 다음 세 가지였다.


1. 갈리아인에게는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전통이 있다는 점.

2. 갈리아인의 신들도 그리스·로마의 신들처럼 인격신이고, 따라서 로마인의 신들과 쉽게 융합할 수 있다는 점.

3. 갈리아인에게는 생활의 쾌적함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


반대로 게르만인은 토지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도 태양과 달과 불 같은 자연물을 숭배하고, 생활의 쾌적함을 추구하지 않고,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엄격하게 차별하여 양자의 융합을 싫어하는 성향이 있었다.


이리하여 갈리아 부족들은 제각기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로마의 지배하에 서서히 편입되었다. 로마인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갈리아에 로마식 도시를 새로 건설하지는 않았다. 각 부족의 도읍이나 본거지였던 곳이 로마의 패권하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 도시로 존속했다. 로마 문명을 누리면서 갈리아의 특징도 남아 있는 갈리아, 즉 로만 갈리아, 즉 후세의 프랑스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아스테릭스와 카이사르 출처 구글 이미지]

갈리아의 로마화


카이사르가 추진한 갈리아의 로마화는 구체적으로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시작되었다.


1. 로마가 늘 쓰는 방식이지만, 부족 지도자 계급의 자제들은 로마나 프로빈키아 속주로 보내 공부시킨다. 형식적으로는 볼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체재국의 가정에 머물면서 그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일종의 민박 유학생이다.


2. 갈리아의 사제(드루이드)들은 갈리아 전쟁에서 항상 반로마 운동의 발화점이었고, 로마에는 전문 사제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 사제계급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갈리아인의 종교와 일반 교육을 갈리아인 자신에게 맡긴다는뜻이었다.


3. 통상을 장려하고 광산 개발을 촉진하여 경제를 진흥한다. 이를 위해 카이사르는 로마 국내에서도 5퍼센트인 유통세랄까 물품세랄까, 요컨대 물류에 부과되는 간접세를 갈리아에서는 2.5퍼센트로 억제했다.


4. 마지막은 선정이냐 악정이냐를 주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직접세 문제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세액 자체를 낮게 책정하여, 갈리아 전체에서 1년에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정액으로 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세금을 무겁게 매긴 나머지 세무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이 늘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당하거나 그 이하의 낮은 세액을 책정하여 납세자들이 큰 부담 없이 세금을 낼 수 있게 한 것이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 전체 인구는 1,200만 정도였다고 한다. 인구가 뜻밖에 많은 것은 갈리아가 농경과 목축에 적합한 기후와 토질을 가진 땅이고,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게르만인도 항상 침입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런 갈리아에 책정한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가 과중한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갈리아는 그 이후 완전히 얌전해졌다.


이것은 군단이 주둔하여 군사적으로 제압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은 내전이 일어난 기원전 49년 이후,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떠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카이사르의 부름을 받고 모두 갈리아를 떠났다. 그런데도 갈리아인들은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 제정 시대가 끝날 때까지 갈리아는 ‘로마화’의 우등생이었다.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과 전후 처리도 끝낸 카이사르가 알프스를 넘어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로 간 것은 기원전 50년 여름이었다. 전투에 적합한 계절에 갈리아를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갈리아에서는 이미 전쟁이 끝나고 전후(戰後)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카이사르는 빨리 키살피나 속주 총독의 본영이 있는 라벤나로 돌아가, 그동안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수도 대책, 즉 원로원 대책에 본격적으로 맞붙을 필요가 있었다.

[라벤나 출처 구글 이미지]
루비콘 이전


법률투쟁


2년 전인 기원전 52년, 원로원파를 등에 업은 밀로와 민중파를 자처한 클로디우스의 원외단이 무력 충돌을 되풀이하다가 클로디우스가 밀로에게 살해당함으로써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단독 집정관’에 취임하여 이 무정부 상태를 수습한 것은 폼페이우스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도 로마에서는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가 접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정원이 2명인 집정관 제도에서는 이례적으로 집정관이 한 명뿐인 현재 상황을 되도록 빨리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의 의견를 존중하여 집정관을 한 명 더 두는 것을 승낙했다. 원로원파도 화답하듯, 또 한 명의 집정관을 선택하는 일은 폼페이우스에게 일임했다. 차석 집정관에는 폼페이우스가 재혼한 아내의 아버지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취임했다. 이 인물은 명문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이었기 때문에, 원로원파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파’의 눈에는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로 말을 갈아탄 것처럼 비쳤다.


원로원파가 폼페이우스를 포섭하는 데 집착한 것은 우선 카이사르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원로원파에는 일반 시민을 열광시킬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없었다. 게다가 정치적 야심이 없는 폼페이우스는 위험한 존재도 아니었다.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여 기세가 오른 원로원파는 우선 이듬해인 기원전 51년도 집정관을 둘 다 독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르켈루스는 당선되었지만, 카토는 낙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사르파는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마르켈루스에 이어 차점으로 당선된 사람은 중도파 법률가인 루푸스였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처음 취임한 것은 기원전 59년이다. 기원전 48년에 두 번째 집정관에 취임한다면, 집정관을 지낸 사람은 10년이 지나야 집정관에 재선될 수 있다는 ‘술라의 규정’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그런데 기원전 48년도 집정관 선거는 기원전 49년 여름에 실시된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공식적으로는 기원전 50년 말에 끝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6개월 동안은 부하 장병도 없는 장수가 되어야 한다. 즉 공인이 아닌 한 개인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를 노려서 원로원파의 법정 투쟁이 시작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로마에서는 공직에 있는 자에 대한 고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주 총독을 지내고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고발당하는 전직 공직자가 많았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임기를 기원전 49년 말까지 연장해 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했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전후 처리를 위해 충분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9년 여름에 실시되는 집정관 선거에 ‘부하 없는 장수’로 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에 대해 결의를 하지 않았고 그 사이 기원전 50년 집정관 선거에서는 원로원파 두 명이 모두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카이사르의 긴 손’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원로원과 집정관을 상대로 라벤나에 있는 카이사르의 ‘손’이 되어줄 수 있는 인물을 찾을 필요가 생겼다. 그럴 만한 인물로 카이사르가 점찍은 것은 평범한 발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피했을 인물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그 사람은 현직 호민관으로, 3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는 아버지가 강경한 카이사르 반대파였기 때문에, 그 자신도 원로원파로 간주되고 있었다. 청년 쿠리오는 논리적 사고방식과 그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웅변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키케로는 원로원파의 희망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쿠리오를 ‘카이사르의 긴 손’이 낚아올린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 청년이 정열적이며 무언가 해내고 싶어 하는 의욕과 강한 의지의 소유자임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 성격의 젊은이라면, 원대한 포부를 제시하고 그것을 공유하자고 설득하는 정공법을 택하면 성공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청년 쿠리오는 화려한 청년 귀족의 생활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총액이 6천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고 하는데, 카이사르는 이 막대한 빚을 대신 갚아주기로 했다.


기원전 49년도 집정관 선거에서는 원로원파의 전략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둘 다 강경한 카이사르 반대파인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였다. 원로원파의 두 번째 작전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를 빨리 결정하는 것이었다. 후임자만 결정하면, 그리고 그 후임자가 빨리 임지로 떠나면, 카이사르도 기원전 50년 말에 임기가 끝난 뒤까지 속주에 눌러앉을 수는 없게 된다.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면 군사력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변절’한 호민관 쿠리오의 임무는 갈리아 총독의 후임자 선정을 되도록 늦추는 것이었다. 그는 원로원파를 가장하면서, 갈리아 총독의 후임자 결정을 지연시키는 작전에 착수했다. 법이라는 법은 모조리 동원한 법률 논쟁이 벌어졌다. 쿠리오는 법률 논쟁으로도 원로원의 결의를 흔들 수 없게 되자, 마침내 호민관의 권리인 거부권을 행사하고 나섰고 이로 인해 원로원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호민관 쿠리오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영향력이 막강한 평민집회에서 쿠리오의 후임으로 당시 32세의 정치 신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내보내 당선시켰다. 그 역시 쿠리오의 임무를 이어받아 계속 원로원의 후임자 지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카이사르가 총독 자리에 계속 눌러앉아 있는 것은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후임자가 결정될 것 같으면 거부권이 발동되어 백지 상태로 돌아가버리는 것이 원로원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주둔 중인 8개 군단 가운데 제8군단과 제12군단에 겨울철 숙영지를 떠나 북이탈리아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라벤나에는 제13군단밖에 없었다.


원로원 최종 권고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는 호민관의 거부권 따위는 무시하듯, 일일이 거수 표결로 찬반을 물으면서 의사를 진행했다.

1.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귀국 명령에 복종할 것.
2. 후임자는 기원전 54년도 집정관인 도미티우스 에노발부스로 하고, 그에게는 당장 이탈리아 안에서 4천 명의 지원병을 모집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는 군단이 편성되는 대로 키살피나 속주로 부임한다.
3.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직접 집정관 입후보 등록을 할 것.


그리고 호민관 안토니우스가 거부권을 되풀이하자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제출했다. 이 비상사태 선언이 공포되면, 호민관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두 집정관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에게 무제한의 대권 수여를 인정하는 법안에 대한 찬반 여부도 결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국가의 적, 즉 반역자로 규정되어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운명이 된다.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역모사건’ 때 원로원에서 연설한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원로원 최종 권고’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분명히 해왔다. 그가 ‘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원로원파도 예상하고 있었다. 따르지 않으면 역적으로 간주되고, 그 역적을 따르는 군단도 반란군이 된다. 그러면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 정규군이 그들을 공격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이것이 원로원파의 수읽기였다.


다만 당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은 카이사르가 돌려보낸 2개 군단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카이사르 바로 곁에는 1개 군단밖에 없었고 막 겨울로 접어던 시기라 갈리아의 군단이 알프스를 넘어 이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더구나 그동안 법을 존중해왔던 카이사르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 본국까지 쳐들어올거라고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평생 동안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지향한 사나이기도 하다. 그의 신념은 로마 국가체제의 개조이고, 로마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으면, 즉 ‘원로원 최종 권고’에 굴복하여 군단을 내놓으면 내전은 피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질서 수립은 꿈으로 끝나게 된다.


게다가 명예는 이미 더럽혀졌다. 갈리아 전쟁 따위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원로원 최종 권고’에 복종하지 않으면 역적으로 규정하겠다는 원로원의 선언으로 그의 명예는 이미 충분히 더럽혀져 있었다. 이 무렵, 카이사르는 눈만 감으면 루비콘강이 떠올랐을 것이다.


두 사나이의 드라마


여기에 또 한 사람, 자신의 ‘루비콘’을 건널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한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이다.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역모사건’으로 대소동이 벌어진 로마에서 37세의 카이사르와 라비에누스는 원로원에 대한 공격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 사건을 일으켰고, 갈리아 원정을 시작할 때 카이사르가 직접 발탁한 유일한 부하가 바로 라비에누스였다. 전쟁터에서도 내내 가장 신뢰했던 인물이다.

[칭글리의 티투스 라비에누스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항구도시 안코나 근처의 칭글리(Cingoli)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지방은 대지주 폼페이우스 가문의 사유지였다. 그 때문인지 라비에누스도 폼페이우스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클리엔테스’ 관계에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17세였던 해, 폼페이우스 밑에서 처음으로 전투에 출정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클리엔테스 관계를 내세운 폼페이우스 쪽의 권유는 집요했다.


13년 전에 군대를 해산하고 부하들을 농민으로 만든 폼페이우스에게는 믿을 수 있는 실전형 장군이 필요했다. 뛰어난 무인인 폼페이우스는 『갈리아 전쟁기』만 읽어보아도 라비에누스가 장군으로서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이라는 말까지 들은 라비에누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 카이사르한테도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게 폼페이우스 쪽의 생각이었다.


라비에누스에게 폼페이우스가 접근했다는 소문은 기원전 50년 여름부터 이미 카이사르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갈리아 전쟁기』 제8권을 쓴 히르티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그 소문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원전 50년 가을부터 이 두 사람은 어쩌면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말하면 라벤나에 있는 총독 관저에서 ‘루비콘 이전’의 긴박한 석 달을 함께 보냈을지도 모른다.


라비에누스의 언행으로 미루어보건대, 이 무인(武人)은 카이사르와 원로원파가 다투는 이유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설령 폼페이우스 쪽에 붙는다 해도, 그것은 원로원파를 편들기 때문이 아니라 폼페이우스와의 ‘클리엔테스’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이사르 쪽에 남는다 해도, 그것은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새 질서 수립의 필요성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카이사르와의 우정을 지키는 것에 불과했다.


이러는 사이 그리고 마침내 1월 7일이 찾아온 것이다. ‘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르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역적이 된다. 폼페이우스는 2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데, 카이사르 곁에는 1개 군단밖에 없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처럼 그가 신뢰하는 정예부대는 아니었지만 제13군단을 소집하고 자기와 함께 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그동안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갈리아를 평정하고 게르만족을 몰아내어 국가에 지대한 공훈을 세웠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일파는 나를, 너희들의 총사령관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음모로부터 나의 명예와 존엄을 지켜달라.”


카이사르의 비장한 연설이 끝나자, 제13군단 병사들은 일제히 외쳤다.

“총사령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카이사르를 따라 루비콘강을 건넘으로써 병사들 자신도 역시 역적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들의 심경은 백인대장의 다음 말에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이 내전이 끝나면, 카이사르는 명예를 회복하고, 우리는 자유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강 도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카이사르 자신은 말하지 않았다. 『내전기』에서 그는 병사들이 결의를 외친 것을 기술한 뒤, 행을 바꾸어 “그들의 마음을 알고, 군단과 함께 아리미눔(오늘날의 리미니)으로 떠났다”고 적었을 뿐이다.

라벤나에서 리미니까지의 거리는 50킬로미터다. 왼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면서 남하하는 평탄한 길이다. 라벤나에서 30킬로미터쯤 왔을 때, 루비콘강이 앞을 가로막는다. 굳게 결심하고 이곳까지 달려왔지만 카이사르는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말없이 강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도 말없이 총사령관의 등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뒤를 돌아본 카이사르는 가까이에 있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그러고는 그를 쳐다보는 병사들에게 망설임을 떨쳐버리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가 50세 6개월 되던 날 아침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 또 한 사나이도 자신의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는 카이사르의 진로와 엇갈리지 않도록, 아드리아해와는 반대쪽인 티레니아해 쪽에서 국경을 넘었다. 아마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여, 로마에 있는 폼페이우스에게 가려고 했을 것이다. 라비에누스는 결국 카이사르를 따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루비콘강’을 건넜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그가 카이사르 휘하 병사들을 일부라도 데려와주기를 기대했지만, 라비에누스는 이 기대를 저버리고 짐도 다 놓고 아들과 노예들만 데리고 이탈했다. 이것이 정치 감각은 없었지만 진정한 무인이었던 라비에누스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처신이었다. 부장의 이탈을 안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두고 간 짐을 모두 그에게 보내주라고 명령했다. 13년 동안의 친구이자 동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카이사르가 한 일은 이것뿐이었다.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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