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이야기
‘바이킹’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사실 이 말은 그 시대에는 자주 쓰이지도 않았고, 꼭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모험가만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12세기 기록에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 자신이 외국에서 만난 도둑들을 ‘가공할 바이킹(fádýrir víkingar)’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 말은 떠돌아다니며 약탈을 하거나 다른 지배자의 용병 역할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민족주의 감정이 분출할 때 북유럽 주민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과거에 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용맹한 조상을 기리면서 바이킹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이킹, 중세 유럽의 역사를 확대하다
헬괴(Helgö)섬은 스웨덴 스톡홀름 서쪽 멜라렌 호수에 위치한 섬이다. 1950년대에 이곳을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놀라운 유물들을 찾아냈다. 그중에는 서기 6세기에 인도 북부에서 만들어진 작은 불상도 있다. 부처님은 어떤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온 걸까? 연구자들은 아마도 아시아에서 찾아온 어느 여행자가 안전을 기원하며 이 불상을 일종의 수호신으로 지니고 다녔을 것으로 본다.
헬괴에서는 이집트의 콥트(기독교 일파) 교도가 사용한 세례용 국자, 아일랜드 주교의 지팡이, 게다가 다량의 비잔티움제국 금화(solidi)도 출토되었다. ‘성스러운 섬’을 뜻하는 헬괴는 기독교 이전 이교異敎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상품 거래 중심지였다. 유럽 북단의 스칸디나비아와 발트해 연안 지역은 고립된 곳이 아니었으며, 아주 이른 시기부터 유라시아대륙 내 광범위한 원거리 교류 네트워크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문화적·경제적 접촉을 해왔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청동 재료와 청동기 제품은 멀리 중부 유럽과 영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대신 가죽, 모피 같은 특산물을 수출했을 것이다. 북유럽 산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호박(琥珀)이다. 고대 이집트인과 로마인 모두 발트 지역에서 나는 호박 제품을 좋아해서 상인들이 북유럽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튀르키예 남부 울루부룬(Uluburun) 근처 바다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의 침몰선에서 호박 제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런 점을 말해준다.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로운 교류를 하던 시기가 끝나고 8세기 중엽부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돌연 폭력적 성향을 띠고 해외로 나가는 바이킹의 시대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가까운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약탈하고 돌아오는 방식을 보이다가, 점차 현지에 정착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극히 먼 지역까지 찾아가서 교역을 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르웨이의 고크스타(Gokstad)에서 건져 올린 배(아래 그림 참조)를 들 수 있다. 길이 23.8미터, 폭 5.1미터 크기에 110제곱미터의 돛을 달고 32명이 노를 젓는 이 배는 현재 보존된 바이킹 선박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배는 전투, 교역, 사람과 상품 이송에 두루 사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똑같이 복제한 ‘바이킹’ 호를 타고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떠나 미국 시카고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바이킹 시대에 북아메리카까지 오가는 항해가 충분히 가능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편 발트해를 넘어 러시아와 비잔티움제국 방향으로 가는 배는 작고 가벼운 보트로서 강이나 호수 위를 오가는 데 사용했다. 1980년대 후반 고틀란드섬의 팅스테데(Tingstäde)에서 발견된 배를 복제해서 실험 항행을 한 적이 있는데, 러시아의 강을 따라 약 3개월 동안 내려가서 이스탄불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바이킹의 남동쪽 모험도 가능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바이킹이라 하면 대체로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 지역으로 습격해 들어가서 약탈·방화·살인을 저지른 후 도주하는 건장한 야만인을 떠올린다. 대략 8~9세기에, 특히 영국과 프랑스 지역을 공격할 당시에는 이런 이미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브리튼 침공
약탈 행위로 꼽히는 최초의 사례가 793년 잉글랜드 북동부의 린디스판(Lindisfarne)섬 수도원 공격인데, 당시의 만행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잘 나와 있다. 살해한 사람 머리를 잘라 꼬챙이에 꿰서 들고 다녔을 정도이니, 당시 잉글랜드인들은 말세에 이르러 북쪽의 악마들이 용과 함께 들이닥친 것이라고 해석했다.
브리튼 섬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가까웠고, 아직 중앙집권화가 덜 이루어진 상태였기에 바이킹들이 노리는 제1순위 먹잇감이었다. 이때문에 바이킹 시대를 알리는 첫 번째 사건 역시 브리튼 섬에서 발생했는데, 바로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이었다. 793년 6월 8일 바이킹들은 3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섬브리아 왕국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침략했다. 아무 방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수도원은 무력하게 약탈당했고, 바이킹들은 수도사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거나 바다에 던져 익사시킨 다음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 참혹한 사건 이후 바이킹들은 본격적으로 브리튼 제도를 침공하기 시작했으며, 린디스판 수도원은 이후에도 약 80여년 동안이나 약탈에 시달리다가 버티지 못하고 875년에 도망치듯이 린디스판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바이킹들은 끊임없이 브리튼 섬을 공략하면서 브리튼인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공격은 865년 동앵글리아에 상륙한 덴마크 바이킹(데인)들의 공격이었다. 당시 바이킹들은 851년 웨식스의 군주였던 애설울프와 싸운 아클레아 전투에서 패퇴당한 뒤 약 14년 동안 소강 상태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설적인 바이킹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노섬브리아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이에 격분한 그의 아들들이 대규모로 브리튼 섬을 침공했던 것이다. 라그나르의 아들 '이바르 라그나르손'과 할프단 라그나르손이 이 바이킹들을 이끌었으며 브리튼인들은 이들을 이교도 대군세라고 불렀다. 이전의 바이킹들은 그냥 약탈만 하고 바로 떠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아예 노섬브리아 내륙까지 깊숙이 밀고들어와 노섬브리아의 수도였던 요크를 점령하고 아예 눌러앉아버렸다.
브리튼계 왕국이었던 동앵글리아, 웨식스, 노섬브리아, 머시아 등은 바이킹들을 쫒아내기 위해 총력을 다했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그들을 막을 만한 세력은 웨식스 왕국 밖에 없었는데, 웨식스 왕국은 다른 왕국들과는 다르게 기반이 탄탄했던 덕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웨식스의 애설레드 1세는 871년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지원군이었던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했고, 애설레드 1세가 승하하자 그 유명한 앨프레드 대왕이 즉위하면서 대바이킹 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바이킹들은 878년 치픈햄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앨프레드 대왕을 습격했고 웨식스 왕국마저 멸망 직전의 위기로 몰고 갔다. 당시 바이킹 군대를 이끌던 구트룸이 웨식스 왕국의 왕위요구자들을 꼬드겨 서로를 분열시켰고, 덕분에 손쉽게 웨식스 왕국의 대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도망쳤던 앨프레드 대왕은 군대를 규합해 반격에 나섰다. 결국 두 세력은 역사적인 에딩턴 전투에서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전투에서 앨프레드 대왕이 대승을 거두면서 웨식스에서 바이킹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미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머시아 등지는 여전히 바이킹 통치하에 있었는데, 886년에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바이킹들의 영유권이 인정되면서 완전한 바이킹들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브리튼 섬에 자리잡은 바이킹들의 세력을 데인로라고 부른다.
이러한 바이킹들의 통치는 94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944년에 다시 웨식스의 왕이 탈환했으나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를 왕으로 삼아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에이리크 1세는 요크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 다시 또다른 바이킹 세력인 더블린 왕국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952년에 에이리크 1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954년 이드리드가 에이리크 1세를 완전히 끝장내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잉글랜드 최후의 바이킹 왕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섬브리아가 7왕국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왕국에 복속되었다.
바이킹의 시대
8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소위 ‘바이킹의 시대’에, 이들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남서쪽으로는 영국, 프랑스 해안을 침략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그 범위를 넓혀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북서쪽으로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아메리카대륙에 상륙하여 한때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적도 있다(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넘어 비잔티움제국에 이르렀고, 어쩌면 아라비아, 심지어 인도와 중국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바이킹의 동진, 러시아와 비잔티움제국 너머의 세계로
역사의 변화와 발전이 늘 문명 중심부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주변부 민족들이 더 힘차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어붙이곤 한다. 바이킹이 대표적인 사례다.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노르웨이계·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루스Rus’(어원은 ‘노 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Varangoï(어원은 ‘선서를 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 중요한 현상이 러시아 국가의 형성이다. 바이킹이 키예프Kiev(키이우Kyiv)나 노브고로드Novgorod와 같은 러시아 초기 국가들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노브고로드 연대기》에는 주민들이 ‘우리를 다스릴 만한 주군을 찾자’고 결의한 후 루스에게 요청했더니 세 형제가 왔는데, 그중 류리크(Rurik)가 정착하여 왕조를 개창했다고 설명한다.
바이킹은 러시아 땅에 머물지 않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비잔티움제국에까지 들어갔다. 바랑고이 지배자 올레그(Oleg)가 큰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여 콘스탄티노플 근처를 황폐화하자, 황제 레오 6세(재위 886~912)가 그들에게 은화 100만 개(!)를 주며 엄청난 음주, 살벌한 전투용 도끼 등으로 유명한 이 가공할 전사들을 차라리 ‘바랑기안 경호대(Varangian guard)’로 고용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 황제 경호대는 비잔티움제국을 위해 여러 차례 중요한 전투에 나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바이킹의 여행은 비잔티움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 모험심 강한 사람들은 볼가강을 타고 불가르(오늘날의 카잔)로 직행했다. 볼가강은 불가르에서 남쪽으로 크게 선회하여 카스피해로 들어가는데, 바로 이 지점이 실크로드의 서쪽 종점으로서 큰 시장이 서는 곳이다. 바이킹 상인은 카라반 상인과 거래하여 중국 비단을 비롯한 동양 상품을 수입해 갔다.
불가르에서 더 나아가면 하자르(Khazar)라는 유목민의 땅이 나오는데, 이곳의 수도에 해당하는 이틸(Itil)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해를 건널 수 있다. 이란의 기록을 보면 바이킹이 910년경 이란 쪽 항구 아바스쿤(Abaskun)을 공격했고, 다시 3년 후에는 한 척마다 100명씩 탄 배 500척으로 공격해 왔다고 한다.
[바이킹의 이미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이킹의 이미지는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몽테스키외는 차가운 공기가 인체와 심성을 단단하게 만들어 용기 있는 인간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열대 지역에는 겁쟁이가 많고 북유럽 지역에는 용맹한 전사가 많다는 것이다. 스웨덴 문인들이 이런 주장을 이어받아 고트족이나 바이킹을 두고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멋진 전사라는 식으로 낭만적인 묘사를 했다.
작곡가 바그너의 상상력이 이런 흐름에 일조했다. 나흘 밤에 걸쳐 연주하는 웅대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북유럽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2부 발퀴레Die Walküre(영어로는 발키리Valkyrie)는 신과 영웅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미화했다. 다만 여기에 묘사된 많은 요소들은 그야말로 ‘창안된 전통’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876년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할 때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은 화가 되플러Carl Emil Doepler는 일부 캐릭터들에게 뻘 달린 금속 투구를 쓰게 했다. 이후 이 투구는 바이킹의 상징처럼 되었지만, 사실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뿔 달린 투구를 사용한 것은 오히려 프랑스인의 조상 격인 골족 사람들이고, 정 작 바이킹은 깃털 달린 투구를 사용했다. 그나마도 이 투구들은 많이 발굴되지 않는데, 금속이 아니라 가죽으로 만들어서 장기간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에 상륙하다
아메리카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서 북대서양을 건너 뉴펀들랜드나 래브라도, 세인트로렌스강 연안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1만 년 이상 떨어져 살던 두 대륙 사람들이 처음 조우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바이킹의 아메리카 여행에 대해서는 사가saga(북유럽의 영웅 이야기) 작품들에 이미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일의 발단은 노르웨이의 자다르Jadarr라는 곳에서 일어난 한 살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범인 토르발(Thorvald)은 민회에서 추방형을 선고받자 가족을 전부 데리고 아이슬란드로 이주했다.
9세기부터 바이킹 항해인들은 서쪽 바다로 멀리 나가 페로제도나 아이슬란드 같은 섬들을 발견하고 정착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얼음 섬’)는 바다에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토르발의 아들 ‘붉은 머리’ 에리크(Eric the Red)는 아이슬란드에서 지방 유지의 딸과 결혼하여 네 명의 아이를 낳고 농장을 운영하며 잘 사는 듯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격한 성격을 물려받았는지, 그 역시 살인을 저질러 민회에서 3년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에리크 또한 모험심이 강해서 이 기회에 서쪽에 있다고 알려진 섬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에리크가 서쪽으로 항해해 가니 과연 큰 섬이 나타났다. 그는 섬에 상륙해서 3년 내내 섬 곳곳을 두루 살펴보고는 거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추방 기간이 지나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에리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섬에 가서 살자고 권유했다. 그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그린란드(‘녹색의 땅’)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고학 발굴 결과 그린란드에서 한때 농장 수백 곳이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어 그린란드 인구가 늘었지만, 1002년에 새 이민자들과 함께 묻어온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린란드의 왕처럼 군림하던 에리크 또한 이때 사망했다.
[그린란드와 '문명의 붕괴']
그린란드의 바이킹 사회를 몰락시킨 주요 요인은 기후 변동이다. 바이킹이 처음 도착한 980년경 그린란드의 기후는 현재보다 훨씬 온화했지만, 점차 기온이 내려가 소위 소빙하기가 닥쳐오자 환경 조건이 지극히 나빠졌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기후 요인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며, 사람들의 대응 또한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린란드에 정주한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목축과 사냥을 병 행하는 삶을 살았다. 초기에 약 1,000명이었던 인구는 조만간 4,00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자원인 나무를 계속 베어냈지만 나무를 다시 자라나게 할 방도가 없었다. 목재가 부족해 지니 배를 건조하기 힘들었고, 철을 녹일 연료가 모자랐다.
그러자 농기구와 사냥 도구가 부족해졌다. 나무가 없는 땅에 말, 소, 양, 돼 지, 염소를 기르다 보니 토양 침식이 심해져서 농사는 더 힘들어졌다. 겨울이 길어지고 기온이 내려가자 곡물 수확이 크게 줄었다. 유 빙 때문에 항해 조건마저 나빠지자 이웃 지역과 교역도 끊어졌다. 게다가 이 작은 집단 안에서 계급 갈등도 꽤나 심했다. 소수의 부자 들이 거대한 농장을 소유한 반면, 암소 한 마리가 전 재산인 사람도 많았다.
생활이 각박해져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에 잔인하고 격렬한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린란드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어 어업을 포기한 것도 식량 사정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바이킹의 후예들은 지난날 그들의 생활양식에 끈질기게 집착하여 농사와 목축에만 매달렸고, 심지어 바뀐 기후에 안 어울리는 의복을 그대로 입은 채 추위에 떨며 살았다.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사람들은 결국 굶어 죽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마지막 기록은 1408년에 끊어졌다.
그린란드 바이킹 정착촌에 남아 있는 교회 유적 12세기 초에 처음 지어진 그린란드 남부 해안 흐발세위(hvalsey)의 바이킹 교 회는 노르웨이와 오크니에서 유사한 구조의 교회가 발견됨에 따라 스코틀랜드계 노르웨이 석공들이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에리크가 죽기 얼마 전 그의 아들 ‘행운아’ 레이프르(Leifr)가 탐험을 떠났다. 그린란드를 떠나 해류를 타고 남서쪽으로 항해해 간 그는 차례로 ‘평평한 돌들이 깔린 땅(Helluland)’, ‘숲으로 덮인 땅(Markland)’, ‘포도가 나는 땅(Vinland)’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겨울에도 자라는 포도’는 야생 베리berry 종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해서 레이프르가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대륙에 발을 들였다.
곧 새 땅에 식민 사업이 시작되었다. 레이프르의 처남 칼세프니(Karlsefni)가 16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식민지를 건설했다.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이 땅의 원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초기에 양측은 우호적으로 물건을 교환했지만 곧 갈등이 불거져 양측이 몇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바이킹은 아메리카에서 후퇴했다.
이 이야기들이 전적인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1960~1970년대부터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졌다. 노르웨이의 부부 고고학자 안네Anne와 헬게 잉스타드Helge Ingstad가 뉴펀들랜드의 랜시 메도우즈(Lance aux Meadows)에서 발견한 바이킹 주거지가 가장 유명한 사례다. 이곳에서 여러 채의 주택과 대장간, 선박 수리 작업장 등이 발견되었다.
그 후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조용히 끝나버렸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이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변화시킨 것과 달리 바이킹의 아메리카 도착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양쪽 모두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랜시 메도우즈의 정착민들도 오래지 않아 거주를 포기하고 떠난 것 같다. 고작 수백 혹은 수천 명 수준의 인구 이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 정도로 끝났다.
전사에서 귀족의 땅으로, 노르망디의 탄생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초원과 아름다운 작은 숲들, 카망베르 치즈와 능금주(시드르)로 유명한 평화로운 지방 노르망디.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장을 건설한 선조는 오늘날 노르망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바이킹 집단이다. 노르망디(Normandie)라는 말 자체가 ‘북쪽에서 온 사람들(Norman), Northman의 땅’이라는 의미다.
프랑크왕국 침공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바이킹의 시대가 열린 해를 대개는 793년으로 본다. 잉글랜드 북동쪽의 ‘성스러운 섬’ 린디스판에 들이닥쳐 약탈을 자행했던 악마 같은 바이킹 무리는 곧이어 프랑스 해안 지역에도 출몰했다.
885~887년에는 배 700척에 나눠 탄 바이킹 무리가 파리까지 들어와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프랑스 국왕(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의 선조 격인 서프랑크왕조의 왕)으로서는 바다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역량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바이킹 집단에게 땅을 주어 신하로 만들고 이들이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도록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910년, 또다시 가공할 바이킹 무리가 센강의 지류인 외르(Eure)강에 접한 샤르트르 지역을 공격했다. 이 집단의 우두머리는 고향에서는 흐롤프르(Hrólfr) 혹은 롤프(Rolf)라고 불렀겠으나, 프랑스에서는 롤롱(Rollon) 혹은 롤로(Roll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프랑스 국왕 샤를 3세는 롤롱 집단과 협상을 벌여서 911년에 생클레르쉬르엡트(Saint-Clair-sur-Epte) 조약을 맺었다. 계약 내용은 롤롱이 엡트Epte강(파리 서쪽 지베르니 부근에서 센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에서부터 해안까지의 지역을 영토로 받는 대신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어 왕국의 방어를 돕는다는 것이었다.
조약에는 이웃 브르타뉴 지역을 공략해 들어가도 좋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당시 브르타뉴는 오만하게 독립 왕국을 자처하면서 프랑스 국왕에 도전하던 터였다.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거칠기 짝이 없는 야만족 전사 집단을 기독교도 귀족으로 만든 후 자기 부하로 삼아서 한편으로는 바이킹의 공격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전적인 브르타뉴의 준동을 제압하는 ‘일타쌍피’의 효과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롤롱은 프랑스 귀족 집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다음 해에 루앙 주교에게서 교리문답을 배운 다음 세례를 받아 로베르(Robert)라는 문명인 냄새가 물씬 나는 세례명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칼잡이 흐롤프르가 프랑스의 로베르 공작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땅의 일부를 분할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 준 후 자신은 루앙을 수도로 삼아 통치했다. 로베르 공작은 928~933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손들은 조만간 서유럽 문화를 수용했고, 고향 땅의 문화와는 멀어져 갔다. 940년대 기록에 의하면, 루앙에서는 스칸디나비아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젊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를 아직 옛 언어가 살아 있는 이웃 도시 바이외(Bayeux)에 보내 배우도록 했다. 노르망디는 더 이상 사나운 바이킹 전사의 땅이 아니라 세련된 프랑스 문화에 물든 귀족의 영토가 되었다.
[몽생미셀 수도원]
프랑스 북서부 지역에는 5~6세기경부터 서서히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먼저 도시에 기독교의 물결이 닿아 주교 성당들이 들어섰고, 그 후에 도시 외곽 지역과 시골로 확산했다. 동시에 깊은 숲이나 황량한 섬에 은거 수도사를 위한 수도원들이 설립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몽생미셸(Mont-saint-Michel) 수도원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랑슈(Avranches)의 주교 오베르(Aubert)의 꿈에 미카엘(미셀) 대천사가 세 번 나타나 몽통브 Mont Tombe(묘지 언덕'이라는 뜻)에 기도실을 지으라고 말했다. 꿈이라고만 생각하고 이 일을 미루자 급기야 대천사가 오베르 주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작은 구멍을 냈다.
대천사에게 혼풀이 나고서야 일을 시작한 주교는 708년에 작은 수도원을 지었다. 당시 존재했던 대부분의 다른 수도원들은 바이킹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고, 몽생미셸만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된 바위산이었 다가 밀물 때는 섬으로 변하는 외진 곳에 지어진 이 수도원은 곧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노르망디공작령이 성립되기 전 아브랑슈 지역은 브르타뉴 영토였기 때문에 몽생미셸 수도원도 브르타뉴에 속했다. 그런데 로베르 공작의 후손들이 노르망디 영토를 서쪽으로 확대하여 아브랑슈를 차지한 까닭에 이 수도원이 노르망디로 넘어왔다. 오늘날에도 브르타뉴 사람들은 몽생미셸 되찾기를 열망하고 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