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왕관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유럽은 혼돈의 시대를 맞았다. 천년의 제국이 남겨진 후 동부 지역에서는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이라는 새 이름으로 제국 체제가 15세기까지 지속했으나, 서유럽에서는 기존 제국 질서가 모두 무너지고 게르만족이 각지에 크고 작은 군사정치 단위들을 형성한 후 서로 경쟁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로부터 지브를터해협을 넘어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다. 동쪽에서는 울던 아이도 그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멈추었다는 가공할 전사 집단 마자르족이 침략해 왔고, 북쪽에서는 바이킹 집단이 폭력적으로 팽창했다. 이 무질서한 세계에서 어떻게 조화로운 질서를 되찾을 것인가?
두 가지 힘이 그 역할을 수행했으니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통치 집단이다. 교회는 정신적인 지배력뿐 아니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덕분에 위기의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재정복운동(Reconquista)을 시작했다.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문명 충돌 양상을 보였지만, 실은 그 내부에서 건설적인 융합 움직임도 일었다.
서유럽 내부에서는 세계의 최상위 통제권을 갖는 것이 교황인가 황제인가 하는 문제로 충돌했으나,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교회와 제국(국가) 모두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성장의 가도에 들어선 유럽은 그동안 준비한 힘으로 바깥으로 팽창을 시도했으니 그것이 십자군운동이다.
코르도바의 모스크-성당,
두 문명이 공존하는 ‘세계의 보석’
에스파냐 땅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온 것은 711년이다. 아랍을 떠난 무슬림이 북아프리카까지 팽창해 와서 현지 주민(베르베르인)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는데, 베르베르족 군 지휘관 중 한 명인 타리크(Ṭāriq ibn Ziyād)가 대군을 이끌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와 에스파냐 남부 지방을 정복했다. 지브롤터(Gibraltar)라는 이름도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의 ‘자발 타리크(Jabal Ṭāriq’)에서 유래했다.
711년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서고트왕국군이 이슬람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왕과 통치 엘리트가 거의 전멸하였다. 이후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에스파냐 땅 대부분이 쉽게 정복되었다. 이렇게 이슬람 아래에 들어간 에스파냐 땅을 ‘알안달루스(Al-Andalus)’라 칭했으며, 코르도바는 그 수도가 되었다.
당시 알안달루스는 아라비아반도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형에서 보면 가장 먼 변방에 속했다. 군사·종교적 지배만 이루었을 뿐, 경제·문화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그랬던 이곳이 점차 문명 중심지로 부상하는데, 칼리프(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이슬람제국의 주권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슬람권 내부의 충돌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750년 이라크의 아바스왕조가 시리아의 우마이야왕조를 몰락시킨 후, 이전 왕실 가문 사람들을 악착같이 찾아내 살해하려 했다. 난을 피해 겨우 목숨을 구한 아브드 알라흐만 1세(Abd al-Rahman)가 먼 에스파냐 땅까지 피신해 왔다. 그는 곧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알안달루스의 군주로 올라섰다(재위 756~788).
무슬림 지배자들은 현명한 통치 전략을 구사했다.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제거하거나 강제 개종시키는 게 아니라 높은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비록 이등 시민으로서 차별 대우를 받긴 하지만, 아예 쫓겨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공생하며 융합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아브드 알라흐만 3세(재위 929~961)가 스스로 칼리프를 주장할 무렵, 코르도바는 바그다드와 경쟁할 만한 문명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유럽의 다른 도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자를 깨치지 못한 참담한 상태였는데, 코르도바는 도서관이 80곳이었고, 거리에는 서적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음 지배자인 알하캄(Al-Hakam) 2세(재위 961~976)는 4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대도서관을 지었다. 주변 국가의 학자들이 과학, 의학, 철학을 배우러 코르도바로 모여들었다. 10세기 독일 시인 흐로츠비타(Hrotsvitha of Gandersheim)가 이곳을 ‘세계의 보석’이라 부른 것은 과장이 아니다.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바그다드에 뒤지지 않는 대규모 사원을 짓고자 했다. 시내 중심부에 있던 성 비센테 성당을 허물고 그곳에 메스키타를 건축하는 대신, 기독교들에게는 다른 곳에 새 성당을 짓도록 했다. 그의 시대에 완성된 이 사원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되어 2만 5,000명의 신자를 수용하는 규모로 커졌다. 남북 180미터, 동서 130미터에 달하는 이 건물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약간 작은 수준이다.
1236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코르도바를 정복하여 이 지역은 기독교권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흔히 하던 대로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메스키타는 가톨릭 성당으로 변모했다. 16세기에 중앙부의 일부분을 부수어 마리아에게 바치는 제단과 십자형 성가대석을 설치하고, 사방의 벽을 따라 소성당들을 세웠으며, 이슬람식 뾰족탑(minaret) 대신 종탑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식 건물 안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매우 특별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엘시드,
재정복운동의 허구적 영웅
에스파냐 북부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ón)주의 수도 부르고스는 재정복운동(Reconquista)의 주요 거점이었고, 특히 에스파냐의 민족 영웅 엘시드(El Cid, 1043~1099)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에는 엘시드와 부인 도냐 히메나(Doña Jimena)의 무덤이 있고, 벽에는 ‘엘시드의 궤(Cofre de El Cid)’가 걸려 있다.
8세기에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이후 기독교 세력은 힘을 모아 오랜 기간에 걸쳐 이슬람 세력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국토를 회복해 갔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과 싸우는 정치 단위들이 형성되었다. 동쪽의 카탈루냐공국, 피레네산맥 서쪽의 바스크공국(후일 나바라왕국으로 성장했다가 프랑스에 합병된다), 나바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아라곤, 북서쪽의 아스투리아스가 점차 확장하여 레온과 합쳐지며 형성된 카스티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 끝에 최종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정리되고, 이 두 나라가 합쳐져 오늘날의 에스파냐가 만들어지는 한편, 남서쪽에서 독자적 단위를 이룬 포르투갈이 먼저 별개 국가로 발전했다.
한편 서기 1000년이 지나면서 에스파냐 내 이슬람권은 분열되고 세력이 약화되어 타이파(Taifa)라 불리는 소규모 제후국들로 나뉘었다. 점차 강성해지는 기독교 국가들은 이런 무슬림 소국들을 상대로 압박과 거래를 병행하며 이익을 얻고 있었다. 무슬림 국가들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제공하면서 조공을 받는 식이다.
민족 영웅이라는 엘시드의 활동도 사실 이런 성격이었다. 그는 카스티야의 귀족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지만, 아랍어 알사이드(Al-Sayyid, 영주)에서 유래한 엘시드로 더 잘 알려졌다.
그의 진면목은 이슬람 국가든 기독교 국가든 비용을 잘 지불하면 누구에게나 군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용병에 가까웠다. 당시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다르게 기독교적 신념을 위해 헌신한다는 이념은 찾아보기 힘들던 때다. 다만 그는 탁월한 전사여서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후일 독립해서 이슬람 소국들로부터 직접 공물을 수취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이슬람이라는 적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이념은 오히려 엘시드가 죽은 이후에 나왔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聖廟를 되찾자며 십자군운동을 제창하면서 유럽 전역에 성전聖戰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바깥에서만 싸울 게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신앙의 적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이념이 불타올라서 이베리아반도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전쟁터로 변모했다.
유럽 내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12세기부터 대대적으로 전 유럽의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재정복운동은 사실상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3세기 후반이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에스파냐 최남단의 그라나다만 빼고 거의 전역이 기독교 영토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잔존한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축출한 때는 1492년이다.
엘시드가 다시 영웅으로 되살아난 계기는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 간의 전쟁(미서전쟁)이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스파냐가 영국보다 먼저 이 표현을 썼다)이었던 에스파냐는 신흥 해양 강국으로 떠오르는 미국 앞에 맥없이 무너져서, 쿠바와 필리핀 등 식민지들을 빼앗겼다.
이처럼 국운이 쇠락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명예를 되살려줄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엘시드는 더 나아가서 20세기 전반의 에스파냐 내전 상황에서 프랑코 독재정권에 이용되었다. 1939년 내전에서 승리를 굳힌 프랑코 장군은 자신을 제2의 엘시드로 묘사했고, 1955년 그의 첫 번째 정치적 수도였던 부르고스에 거대한 엘시드 기마상을 건립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는 성지 뿔다. 이곳 성당에는 산티아고 성인의 묘소가 있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영어로는 Saint James)를 가리 킨다. 12세기부터 알려진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 성인은 갈리시아 지 방에서 전도 활동을 한 후 성지로 되돌아갔다가 참수당하며 순교했다.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이스라엘의 야파(Jaffa)로 가서 그곳에서 신비한 돌 선박을 타게 되었는데, 이 배는 곧 이들을 갈리시아 지방으로 데려갔다. 제자들은 이곳의 이교도 여왕 로바Loba("암늑대'라는 뜻)에게 야고보를 묻을 땅을 내어달라고 부탁했으나 외려 로바는 용을 부려 이들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십자가를 보자 용이 터져서 죽었고, 결국 현재의 성당 자리에 야고보의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성 야고보의 묘소와 조각 성당 지하에는 산티아고 성인 야고보의 묘소(왼쪽)가 있고 중앙탑 꼭대기에는 순례자의 복장을 성 야고보상이 있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야고보 성지는 9세기에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은자에게 발견되었다. 이 성지를 되찾을 때 별빛이 인 도했다고 하여 콤포스텔라Compostella('별빛이 인도한 땅'이라는 의미의 Campus Stellae의 변형)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세 력과 전투를 할 때면 야고보 성인이 기사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군은 야고보를 수호성인으로 삼았고, 적을 향해 돌진할 때도 '산티아고!(santiago!)'라고 구 호를 외쳤다. 중세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유럽 전역에서 신자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20세기에 산티아고 순례가 다시 부흥한 데에는 에스파냐 가톨릭 역사를 자신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고자 하는 프랑코 독재정권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순례길camino(산티아고 가는 길)은 그런 부정한 의도를 초월하여 평화와 성찰의 길로 자리 잡았다.
‘새사냥꾼’ 하인리히,
제국의 길을 열다
중세 중동부 유럽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정치 단위들이 난립해 있었다. 예수가 생전에 신고 다니던 샌들을 보관하는 프륌 수도원공국Fürstabtei Prüm 같은 작은 마을 크기의 나라부터 작센이나 바이에른 같은 대규모 공국까지 각국의 규모나 성격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른 한편, 이런 난맥상을 이겨내고 과거 로마제국을 부활시켜 유럽 문명권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통합하려는 이상이 수많은 지배자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었다. 그런 기획은 명목상 유럽 최고의 권위를 누리는 신성로마제국으로 발전한다. 이 제국의 길을 연 인물은 하인리히, 일명 ‘새사냥꾼’왕(Heinrich der Vogler)이다.
912년 하인리히는 부친으로부터 작센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야망에 불타는 그는 곧 영토 문제를 놓고 자신의 상위 군주인 동프랑크왕국의 국왕 콘라트 1세(재위 911~918)에게 도전했다. 불손한 신하 하인리히와 다투었던 국왕은 오히려 임종의 자리에서 왕위를 그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끝없이 일어나는 봉건 귀족들의 봉기와 마자르족·슬라브족 등 외적의 침략에 맞서 왕국을 지켜줄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자가 하인리히를 찾아갔을 때 마침 새 사냥용 그물을 손보던 중이어서 그의 별칭이 ‘새사냥꾼’이 되었다.
왕이 된 다음 가장 먼저 할 일은 슈바벤과 바이에른 등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지역 영주들을 손보는 것이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 같은 강력한 인물은 아주 벅찬 상대였는데, 결국 그의 궁전까지 쳐들어가 힘으로 굴복시켰다. 그다음으로 문제가 된 지역은 로타링기아Lotharingia였다. 후일 로렌Lorraine으로 발전하는 이 지역을 두고 독일과 프랑스가 수없이 전쟁을 벌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의 주요 세력들이 충돌하는 지점으로서, 말하자면 유럽의 급소라 할 수 있다. 하인리히는 로타링기아 공작과 결투를 벌여 그를 굴복시키고 자기 딸과 결혼시켜 봉신으로 삼았다.
그에게 닥친 더 심각한 문제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당대 유럽을 전율케 한 이민족은 마자르족이었다. 919년 하인리히는 마자르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 하마터면 살해될 뻔했으나 겨우 도망가서 목숨을 구했다. 2년 후 마자르족이 독일과 이탈리아 방면으로 다시 침략해 왔을 때, 귀족들도 이 강력한 적 앞에서는 일단 강력한 군주 밑에서 단합하여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인리히는 귀족 영주들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의 지휘를 받아들여 함께 적을 물리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매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마자르족과 10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시간을 번 뒤 각지에 성벽을 정비하고 기병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마자르족을 패퇴시켜 한동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이후 마자르족은 헝가리에 정착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하인리히는 점차 왕권을 강화해 갔다.
1283년 헝가리 아르파드 왕실에서 편찬한 역사책 《게스타 훙가로룸》(Gesta Hungarorum)에 따르면 훈족과 마자르족은 같은 뿌리였다고 한다. 흑해 주변에 살던 한 부족장에게 후노르와 머고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냥을 하던 도중 신비한 사슴을 발견하곤 추적했다. 추격 끝에 사슴은 사라지고 방어에 용이하며 목축에 적합한 옥토에 다다른 그들은 그곳에 정착했다. 6년 후, 형제는 벨라르족을 약탈한 데 이어 이란계 알란족의 왕 둘란의 두 딸을 납치한 후 각각 결혼했다. 이후 후노르의 후손은 훈족, 머고르의 후손은 마자르족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인리히의 또 다른 위업은 왕국 동쪽에서 위협을 가해 오는 슬라브족을 누른 것이다. 928년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해 가서 브란덴부르크를 빼앗고, 더 멀리 보헤미아공작령까지 진격해 들어가 바츨라프(Václav, Wenceslaus) 공작에게 매년 연공을 바치도록 만들었다(바츨라프 공작은 사후 국왕으로 승격하고 체코의 수호성인이 된다). 이후 레히틱Lechtic, 루사티아Lusatia, 우크라이나 등 다른 슬라브족의 공격이 계속되자 하인리히의 휘하 귀족들이 역공을 가해서 완전히 복속시켰고, 하인리히는 ‘슬라브족 킬러’로 알려지게 되었다.
명실공히 알프스 이북의 최강자로 군림하자 자신감에 찬 그는 황제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800년에 카롤루스(Carolus Magnus)가 교황으로부터 로마제국 황제 타이틀을 받았으나 그 이후 황제의 권위가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질 판이었다. 이제 자신이 사나운 귀족을 평정하고 외적을 눌러 이겼으니, 황제 자리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마로 찾아가 교황을 만나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그는 사망했다. 황제의 꿈은 그의 아들 오토 1세 때에 가서 이루어진다.
하인리히가 왕국을 분할하지 않고 모두 오토에게 몰아주어서 오토는 광대한 독일 왕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후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반란을 제압한 뒤 이탈리아 국왕에 올랐고, 그다음에는 교황을 구출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타이틀을 얻었다.
[나치의 성지가 된 크베들린부르크]
936년 하인리히는 자신의 시신을 크베들린부르크(Quedlinburg)시가 잘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후일 성녀로 시성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부인 마틸다Matilda von Ringetheim는 죽은 남편 하인리히를 추모하기 위해 수녀원을 짓고, 여기에 시신을 모셨다. 수녀원에 상당한 땅을 기증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게 했다 그 결과 이 작은 도시는 귀족적인 수녀들이 독립국가처럼 통치하게 되었다.
독일 중부 하르츠산맥에 위치한 아름다운 천년의 고도 크베들린부르크는 20세기 중엽에 돌연 나치 선동에 동원되었다. 나치 친위대장이며 히틀러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크베들린부르크와 그곳에 묻힌 하인리히 국왕이 나치 프로파간다에 아주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련과 전쟁을 벌이던 나치 독일은 슬라브족을 궤멸시킨 전사이며 독일제국을 건설한 선조인 이 위대한 국왕을 역사의 모범으로 부각하려 했다.
국왕이 사망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인 1936년부터 힘러는 하인리히의 기일인 7월 2일이 되면 이 도시를 방문했다. 다음 해에는 시신을 새로운 석관에 옮겨 다시 매장했다. 마을은 온통 나치 깃발로 뒤덮였고, 수녀원은 친위대 대원이 상주하며 지키는 나치의 성지가 되었다. 나치 당국은 하인리히의 두개골에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나치 기장) 깃발을 두르고 엄숙하게 매장하는 의식도 거행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조사했을 때 그 두개골은 가짜로 판명 났다.
나치의 선동 작업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도 동원되었다. 히틀러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었다는 이 오페라는 성배를 지키는 신비의 기사가 은빛 갑옷을 입고 백조가 이끄는 배를 타고 등장하여 귀족들 간 내분을 끝내고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치도록 이끈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새사냥꾼' 하인리히 국왕은 독일 전역을 돌며 민족의 단합을 주장한다. 사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이 나치에 의해 그토록 악용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을 휘두르며 이방인 적들을 무찌르자고 노래하는 장면은 바그너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치 독일의 군사 정복을 찬미하는 프로파간다로 작용했다.
크베들린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성지였기 때문에 귀중한 역사적 유물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을 주민들은 이 보물들을 지하 갱도로 옮겨 보호했다. 전쟁 말기에 이 지역에 진격해 온 미군은 유물을 맡아서 잘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가장 중요한 보물 여덟 점이 사라진 것을 안 교회 당국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절도범이 누구인지 밝히려 했으나 이 지역이 동독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조사가 중단 되었다. 후일 미국의 메더(Joe Meador) 중령이 보물을 훔쳐 간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덕에 감식안이 있었던 그는 좋은 유물만 가려 훔쳐간 것이다. 이 귀중한 유물들은 그의 후손과 미국 및 독일 정부 간 벌어진 재판과 협상 끝에 원래의 장소로 돌아갔다.
카노사의 굴욕,
황제의 석고대죄와 복수
1077년 1월, 독일 왕이자 장차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그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밭에 사흘 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빈 결과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2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1056년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죽었을 때,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여섯 살에 불과했다. 독일 왕, 이탈리아 왕, 부르고뉴 왕 같은 왕위는 차지했지만, 황제위는 교황에게서 대관식을 승인받아야 가능하다. 그러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린 국왕의 힘이 미약한 상태를 이용해 독일 각지에서 귀족들이 분쟁과 봉기를 일으켰다. 특히 이전 황제에게서 영토를 많이 잠식당한 작센 지역 귀족들은 차제에 국왕의 간섭을 벗어던지고 그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했다. 한때는 쾰른 대주교가 하인리히를 유괴하여 자기 통제하에 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왕은 점차 세력을 회복하여 귀족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해 갔다. 동시에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주교와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바로 이 문제로 인해 교황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교황은 세속인이 교회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일종의 성직매매simony 죄에 해당한다면서, 그런 죄를 부추긴 하인리히의 부하들을 파문하며 압박했다. 하인리히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1076년 자기 영향권 아래 있는 독일 지역 주교 26명을 보름스에 소집하여 ‘보름스의 회신’을 작성해서 보냈다. ‘찬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통해서 된 왕이, 교황이 아니라 거짓된 수도사인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의 속명)에게’라는 서한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서한은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이 찬탈한 사도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포기하라. 다른 사람이 성 베드로의 보좌에 올라가도록 하라. 나 하인리히는 신의 은총을 받은 왕으로 우리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당신에게 말하노니, 내려가라, 또 내려가라, 저주받은 자여.’
그 직후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교황은 서신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하인리히를 파문하면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독일 귀족들로서는 그들을 억압하던 국왕이 파문당하는 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국왕에 대한 저항이 종교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되자 일부 귀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일종의 청문회를 열어 하인리히의 모든 권한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교황은 이 사태를 결정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일이 이쯤 되니 하인리히가 다급해졌다. 불온한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교황이 독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교황이 카노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인리히는 카노사의 성주인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에게 교황 면담을 요청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교황이 머무는 곳으로 찾아간 다음 불쌍한 모습으로 눈밭에 서서 무조건 싹싹 비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국왕이 철저하게 참회하는 모습을 연출하니, 교황으로서는 난감하게 되었다. 파문을 거두어들이면 더 이상 국왕을 압박할 수단이 없어지고, 그렇다고 파문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용서를 모르는 비열하고 졸렬한 교황이 된다. 장고 끝에 교황은 국왕을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교황이 파문을 거두어들이자마자 하인리히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클레멘스 3세라 칭하며 새 교황을 옹립했다. 다른 한편 독일 귀족들은 하인리히를 폐하고 루돌프Rudolf von Rheinfeld라는 인물을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언했다.
1080년 루돌프가 사망하고 독일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하인리히는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에 주둔 중인 노르만인들을 불러들였다. 양측이 여러 번에 걸쳐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1084년 로마가 약탈을 당했고, 이에 맞서 로마 시민들이 봉기하자 교황은 노르만인들(로베르 기스카르가 교황을 구출했다)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후 생을 마쳤다. 그 전에 하인리히는 그가 추대한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로부터 황제 관을 받았다.
장기간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양측이 타협을 모색한 것이 1122년의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이다. 이 협약에 따르면 추기경과 수도원장은 교회에 의해서만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천명했으니 이 점은 황제가 양보한 것이다. 한편, 황제는 선거에 출석할 수 있으며 만일 다툼이 있으면 황제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니 이는 교황이 양보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잔 다르크' 마틸다]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는 하인리히 가문과 구원(舊怨)이 있었다.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그녀와 어머니를 인질로 잡아가서 감옥에 가두고 토스카나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겨우 풀려나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마틸다가 철저한 교황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노사 사건 당시 독일로 여행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마틸다의 공적이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이 교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틸다는 군사를 동원하여 교황을 보호하고 카노사의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참회의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마틸다는 성안에서 교황에게 사태 해결을 위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에 위기에 맞서 '오직 베드로의 딸 마틸다만이 저 항했노라(sola resistit Mathildis, filia Pétri)'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청은 17세기에 마틸다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이장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마틸다의 조각상을 세웠고, 교 황 우르바누스 8세는 '교황청을 지켜낸 마틸다 여백작은 고대 아마존 전사에 필적한다'는 비명을 썼다.
교황혁명,
법의 힘으로 근대 세계를 예비하다
문제의 시작은 교회의 타락과 그에 대한 개혁운동이었다. 중세 전반기에 사제나 수도원장 같은 성직은 사실 교황도, 황제도 아닌 지방 토호들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부유한 가문이 자신의 영지에 건립한 교회나 수도원은 대토지가 붙어 있는 집안 재산이어서 가문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우리 가문에서 돈 들여 지은 수도원이니 당연히 우리 집 자식이 수도원장이 되어 관리한다는 식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려면 무엇보다 교회와 세속 사회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10세기경 클뤼니Cluny 수도원이 주도한 교회의 청정개혁운동이 그것이다. 이때 비로소 성직자들의 결혼, 축첩, 성행위 등 모든 남녀 간 결합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렇게 정화된 사람들이 행하는 성체성사만이 진실로 성스러우며, 이때 빵은 그리스도의 살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이 변한다化體設, transubstantiation’고 정리했다. 새롭게 정립된 성스러운 공동체는 속인들의 개입을 완전히 배격하고 스스로 정한 제도와 규칙에 따라 살겠다며 ‘교회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움직임을 더 큰 단계로 확대하려 한 인물이 클뤼니 수도원 출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서, 다름 아닌 ‘카노사의 굴욕’ 사건 당시의 교황이다. 그의 주장의 요체는 교황을 필두로 한 교회가 이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짜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는 〈교황 교서Dictatus Papae〉(1075)는 ‘로마가톨릭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다’(제1조), ‘교황만이 주교를 폐위 혹은 복위시킬 수 있다’(제3조) 등 교황의 최상위권과 무오류성을 주장했다. 세속 권력과 충돌한 문제의 조항은 제12조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아무리 교황이 최상위권을 주장한들 그것을 강제할 실질적 수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무력을 가진 세속 권력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법의 힘’이다. 법은 권위의 원천이자 통제 수단이다. 교황 지지자들은 과거 기록들을 뒤져서 교회뿐 아니라 세속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 교황이 최상위권을 차지한다는 근거를 찾았다. 중요한 계기는 11세기 말 피사 도서관에서 《로마법대전Corpus Iuris Civilis》, 일명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50권이 발견된 일이다.
법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교황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반이 되었다. 교황은 법의 해석자, 최고의 판관이며 최고의 행정관이라고 주장했다. 교황 법정은 ‘모든 기독교국의 재판정’이며, 교황은 ‘만인의 통상적 재판관’임을 선언했다. 말하자면 교황이 세상만사 모든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권을 가지고 기독교 세계 전체를 지도한다는 주장이다.
카노사 사건 당시 표면적으로는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졌으나 길게 보면 교황의 이상이 달성된 셈이다. 성직자 독신제가 성립되고 성직매매(즉 세속 당국의 성직자 임명)는 사라졌다. 교회는 세속 당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났다. 새로운 교회법을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기독교 공동체’, 즉 ‘보편교회the Church’가 성립되었다.
그동안 세속 국가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었다. 교회의 근본적 변화가 다시 세속 국가의 발전을 가져왔다. 쉽게 말해 교회 공동체의 발전을 모범으로 삼고 따라 한 것이다. 그들도 로마법을 연구하여 국가의 기본법을 다듬더니, 각국 내부에서는 국왕이 로마 황제와 다름없는 지상권至上權을 가진다는 개념을 만들었다. 종교 문제에서는 교회에 복종한다 하더라도, 같은 논리를 들며 세속 문제에서는 국왕이 하느님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고해의 강화]
교회 혁신은 위에서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참여와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신앙을 내면에서부터 강화해야 한다. 최선의 방법은 죄의 인식과 참회의 내면화이다. 신자들에게 심층적인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가 가르치는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해성사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구체적인 실현 방식이다.
매년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하도록 한 규정은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라노Lateran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종교적 의무 사항과 교회 행정 절차들을 확립했기 때문에, 중세 기독교 교회가 사실상 이때 재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고해성사를 규정한 것은 제21조다.
“사리분별의 연령(10대 초반)에 도달한 모든 남녀 신자들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자기 교구의 사제에게 진심으로 고해를 하고 그들에게 부과된 고행을 능력껏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하며, 적어도 부활절에는 성체성사를 정중하게 받아야 한다. ... 그러지 않은 자는 평생 교회 출입을 금지당하며 기독교적 매장을 거부당할 것이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모습 고해성사의 의무를 규정한 1215년 4차 공의회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소집하고 약 400명의 주교와 800명의 고위 사제 및 기독교 국가의 대규모 대표단이 참여하였다. 이탈리아 화가 체사레 네비아(Cesare Nebbia, 1536?~1614?)가 그렸다.
이 규정은 '교회-국가'의 시민권 관련 규정에 해당한다. 교회는 세례증명서와 사망증 명서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시민을 등록시켰고, 반대로 파문의 방식으로 시민권을 박탈 했다. 신자들은 매년 스스로 자기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본 후 죄의 상태를 밝히고 성체성사를 받아 교회 시민권을 갱신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크든 작든 잘못을 저지르며 살 수 밖에 없는 죄인이니 늘 참회하고 교회에 가서 용서를 구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이후 서구 세계는 죄의 문명, 참회의 문화가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십자군운동의 신호탄
“기독교도 창자 끝을 말뚝에 묶고…”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원정을 선포했다. 이 회의에서 교황이 어떤 연설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공의회에 참석한 인물들이 후대에 쓴 기록들을 통해 추론할 뿐이다. 예컨대 로베르 수사는 1107년에 쓴 연대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튀르크족은 하느님의 교회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들은 기독교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피를 제단에 바르거나 성수반에 붓는다. 또 희희낙락하며 기독교도들의 배를 갈라 창자의 끄트머리를 꺼내서 말뚝에 묶고는 채찍으로 때려 말뚝 주위를 돌아 내장이 쏟아져 죽게 만든다. … 여자들을 겁탈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교황은 이런 선동적인 연설을 통해 하루빨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자고 호소했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치며 호응했다. 동방 원정에 참여할 사람들은 1096년 8월 15일에 프랑스의 퓌Puy 지역에 집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다른 순례자들과 합세한 후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자는 계획도 발표했다. 200년 가까이 지속될 십자군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셀주크튀르크가 팽창해 오면서 중동 지역에 살던 기독교도들이 위험에 빠지고 성지순례를 방해받았다는 것은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은 638년 이래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곳 기독교도들은 관용적인 취급을 받았고, 성지순례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다면 비잔티움제국 황제가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에 십자군운동이 시작되었는가? 이는 절반 정도만 맞는 설명이다. - <중세 유럽인 이야기>, 주경철 - 밀리의 서재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를 다시 통합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교황은 동방정교의 세계인 비잔티움제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사실 이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도 5만 명의 병사를 끌고 성지 탈환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적이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의 의도가 역설적이게도 평화 회복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 세계는 폭력이 넘쳐나는 위험한 세상이었다. 오랫동안 바이킹과 마자르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아 유럽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사방에 성채들이 세워졌고, 기사들과 보병부대들이 할거하여 이들을 통제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날마다 칼부림이 벌어지는 험악한 시대에 교회는 폭력 사태를 줄이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eace of God(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와 ‘하느님의 휴전Truce of God(일요일과 성인의 날에 전투 금지)’ 운동을 펼쳤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한 이유 중 하나도 봉건 기사들의 파괴 성향을 통제하는 방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12세기 초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의 표현을 옮기면, 같은 편끼리 서로 죽이지 말고 나가서 이방인을 죽이라는 것이다.
교황의 의도는 그렇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사실 십자군 전사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은 부자들이었다. 기사들은 돈을 벌러 간 게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 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죄를 참회하고 저세상에서 영원한 보상을 구하겠다는 열정이 끓어넘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세적 가치를 부정해야 한다. 단적으로 두 가지를 금해야 한다. 무기와 성기를 남용하지 말라! 구원을 얻으려면 폭력과 성적 쾌락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죄를 많이 범하는 집단은 주로 기사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에게는 참회의 기회가 필요하다.
우르바누스 2세의 창의적 해법은 성전과 순례를 통합한 데 있다. 성전 개념은 전례가 있었다. 8~9세기에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습격한 무슬림과 싸우는 기사들에게 죽으면 하느님이 천국에서 맞아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편에 선 전사들의 죄를 사면하고, 전장에서 죽으면 순교자로 친 것이다. 성스러운 전투와 참회, 이 두 가지를 연결한 것이 십자군운동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폭력을 휘둘러 살인을 하는 행위가 죄를 닦는 선행이 되다니!
[롤랑의 노래]
십자군운동은 오래지 않아 문학적으로도 정당성을 얻는다. 기사도 문학은 무슬림 적들을 악마화함으로써 그들과 싸우는 전투는 정당할 뿐 아니라 성스러운 행위이며, 영적 보상이 이루어지는 임무라고 해석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11세기 후반의 무훈시 <롤랑의 노래>다. 십자군운동 시기에 탄생한 이 작품은 전투에 임하는 기사들에게 죄의 사면과 축복, 구원을 약속한다.
"튀르팽Trurpin 대주교는 설교를 시작했다. ... 당신들은 곧 전투에 임할 것이니/ 하느님께 죄를 고해하고 은총을 빌라/ 당신들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가 죄를 사면할 것이며/ 죽더라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서 왕관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확인하듯 우르바누스 2세가 제시한 십자군운동의 이념은 이데올로기 혁명 이었다. 초기 교회의 평화와 비폭력은 이제 전투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전에는 칼을 맞고 희생당한 사람이 순교자였지만, 이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순교자가 되었다. 이슬람의 지하드(이슬람 성전)와 십자군운동은 사실 같은 내용이다. 조만간 이 두 운동은 서로 충돌한다. 그 충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더 나쁜 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그 충돌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전망이다.
소년 십자군,
종말론적 세계의 기이한 현상
1212년, ‘소년 십자군’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일드프랑스 출신의 에티엔 드 클루아Etienne de Cloyes, 독일에서는 쾰른 인근 출신의 니콜라스Nicolas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등장해서 각각 1만 5,000~3만 명에 달하는 남녀 어린이들을 이끌고 성지를 향해 행진해 갔다. 이들은 전혀 무장도 하지 않고 오직 신의 은총으로 기적을 이루어,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를 탈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린아이 수만 명이 뜨거운 종교적 열정을 내뿜으며 저 먼 중동 지역까지 행군해 가겠다고 나선 이 사건은 대체 무슨 일일까?
1187년 하틴Hattin 전투에서 이슬람권의 영웅 전사 살라딘이 이끄는 강력한 군대에 패배하여 성묘와 십자가는 도로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갔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는 다시 한번 십자군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번에는, 곧 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며 그전에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리들의 지배가 끝난다는 예언을 꺼내 들었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우선 성지를 되찾아야 한다. 교황은 ‘모든 신자들이 십자가를 메라’고 설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십자군전쟁에 동참하리라 기대했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분위기가 열렬하게 타오르지 않았다. 이것이 소년 십자군이 일어난 맥락이다. 마땅히 해야 할 성스러운 임무를 어른들이 피하고 있으니, 순수한 어린이들이 나서서 대신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소년 십자군에 대해 기록한 연대기는 50개가 넘는다. 당시 기록에서는 ‘푸에리pueri’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10대 청소년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해서 학계에서 비판적인 견해가 제시된 적이 있다. 1970년대에 피터 라츠Peter Raedts라는 역사가는 ‘푸에리’라는 말은 실제 나이가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 곧 가난한 사람들, 주변인, 배척당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십자군 무리에 일부 어른들이 끼어 있었다는 당시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한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해에 니콜라스라는 소년이 일어나 수많은 남녀 어린이 무리를 이끌었는데, 그는 천사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주님의 십자가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팡이를 짚고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지팡이와 주머니는 전형적인 순례자의 도구이다. 십자군은 전쟁이면서 동시에 순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소년들이 국왕에게 호소한 사실이다. 당시 대다수의 왕은 실제로 십자군 정신이 충만했다. 국왕은 신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하는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등이 그런 사례로, 기꺼이 신의 명령을 따른다며 성지 회복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소년 십자군 시절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Philippe Auguste도 내심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십자군운동에 참여한 소년들은 자신들의 뜨거운 신심을 국왕이 승인하고 동참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오브리Aubry de Trois-Fontaines(?~1254)라는 시토회 수사가 지은 연대기는 이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지중해 연안까지 간 프랑스 ‘푸에리’들은 마르세유에서 일곱 척의 배를 타고 떠났다. 이 중 두 척이 생피에르Saint-Pierre-ad-Rupem섬 근처에서 난파하여 타고 있던 소년들이 죽었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재위 1227~1241)는 이 섬에 불쌍한 소년들을 추모하는 교회를 지었으니, 이 소년들은 순교자가 되었다. 나머지 다섯 척의 배에 탄 소년들은 더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무슬림에게 노예로 잡혀간 것이다!
한편 독일에서 출발하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한 소년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무리가 해안에 도착하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건넜듯이 지중해 물이 갈라져 걸어서 중동 지역까지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렇게 될 리가 만무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 리셰르Richer de Senones는 이 순진한 소년들에게 동정을 표했다. 제노바와 피사에 도착한 소년들은 바다를 건널 배를 구했으나 결국 헤매다가 굶어 죽고 묘지도 없이 버려졌다는 것이다.
리셰르는 이 소년들을 예수 탄생 당시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무고한 어린이들Innocents에 비유했다. 일부 설교자들도 소년들을 찬미했다. 모든 신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군운동에 참여해야 했으나 그렇게 한 것은 ‘작년에 십자가를 진 순결한 소년들밖에 없도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푸에리들을 위로했으나 대개 자신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만 해석했다.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종교적 흥분과 열정에 휘몰린 희대의 사건은 심대한 위기에 빠져든 중세 유럽 사회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모범적인 십자군 기사 부이용 공작]
저지低地 로타링기아(Basse-Lotharingie) 공작 부이용(Godefroy de Bouillon, 1058?~1100)은 가장 모범적인 십자군 기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거액의 참전 경비를 마련한 후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다.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3년간의 긴 여행 끝에 중동에 도착했고, 이슬람 세력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고는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여러 기록들은 그의 탁월한 무용에 대해 증언한다.
튀르크인의 몸통을 한칼에 두 동강 냈 다든지, 칼을 한 번 휘둘러 낙타 대가리를 쉽게 잘랐다는 식이다. 묘비명에는 부이용을 ‘이집트의 공포이며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두려움'이라고 표현했다. 무용만 탁월한 게 아니라 경건함도 돋보인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라는 타이 틀을 거부하고 대신 위탁인(avou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리스도가 진짜 왕이고 자 신은 단지 이 나라를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가 왕이었으나, 겨우 1년을 통치하고 1100년 사망했다. 어쩌면 이토록 짧은 기간 빛을 발하다가 사라졌기에 더욱 신화화했을 수 있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선조는 카롤루스(샤를마뉴)에 이른다. 황제의 후손이 예루 살렘의 통치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상한 일인가. 후일 그는 아서 왕과 동격의 이상적 기사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실제 사실은 신화와는 다른 면이 많다. 당시 기독교 기사의 수가 너무 적어서 무력으로만 정복하고 통치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이룬 일 중 많은 부분은 무슬림 지도자들과 외교적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