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1년 동안 독서모임을 직접 운영해보면서
그날은 4년 동안 해 온 독서모임을 그만둔 밤이었다. 파트너를 1년 동안 해보면서 멤버로 있을 때와는 달리 '독서토론' 모임에 충실하고자 했던 난 묘하게 바뀐 분위기와 토론 외적으로 뒤풀이, 번개, 단톡방 관리 같은 멤버 네트워킹에 많은 걸 해내야 하는 역할에 부담을 느껴 투서를 소소하게 독후감으로 남기고 쉬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모임에서 이 사실을 알고 놀러 와준 내 롤 모델인 파트너 분들과 토론 모임에는 못 와도 뒤풀이를 함께 하러 온 멤버분들에게 "다음에 보자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약속은 하지 않을게요. 그치만 멋진 분들과 함께 이야기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라고 시크하게 인사를 하고 막차까지 술을 마셨다. 앞의 말은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으로 계속 이 멤버 포레버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이 이상 못하게 되자 쿨하게 정리해 보려고 노력한 말이고 뒤의 말은 순도 100% 진심이었다.
야속하게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 나서야 친해지고 싶은 멋진 분들이 나타났으니깐 말이야. 난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다르게 불호가 뚜렷해 선을 넘으면 관계 정리가 빠른 편이지만 4개월을 겪고 보니 멤버들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투명한 잔이 술로 채워지면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동안 쌓인 영화 같은 추억을 비워내려고 웃고 떠들면서 필름이 끊어지길 바랐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불태운 나에겐 이젠 하얀 재만 남아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 불빛이 무대 위 조명처럼 페이드 아웃되어 노랗게 적셔진다. 막이 내렸다는 걸 실감하자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에 애써 담담한 척하느라 깊어진 눈썹 아래 검은 호수에 한동안 비가 내렸다. 눈부시게 눈물겹게 질척이며 사랑했던 사계는 생각보다 길었고, 애정 그득했던 서사가 이성적으로 깔끔히 정리되는 아름다운 이별이란 말은.. 역시 판타지였다.
그렇게 훌쩍 떠나 한동안 독서모임을 안 할 줄 알았건만! 새로운 클럽들이 눈에 들어와 흑역사를 남기더라도 등록한다. 좋아 보이는 클럽을 보면 손이 가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독서모임 서비스는 '애정 비즈니스'다. 이 의견은 경험상 운영자 측에서 그닥 개선할 의지가 없는 내용이라는 점을 짚어둔다. 투서 후 그들이 직접 북 큐레이션 하거나 번개 모임을 미리 정한 서비스 클럽을 여러 개 만들어냈지만 글쎄 얼마나 갈까? 거기 멤버들은 계속 만족할까? 애정을 담을까? 고작 한 달에 한 번 모임에서 많은 걸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멤버와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계절이 달라진다. 포장하고 흉내 낸 클럽은 인스타 갬성만 충만한 가게를 보듯 티가 난다. 사실 뭘 하든 취향 차이라 이 의견에 반박 시 님 말이 다 맞다. 하지만 그 모임이 지속 가능하냐는 관점에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지워지질 않는다.
새롭게 신청한 클럽은 첫 모임부터 범상치 않다. 정성스레 쓴 손 편지를 받고, 멤버마다 의미를 담은 책갈피를 선물을 준비해 주셨다. 그뿐일까? 왼손으로 직접 그린 엽서를 보면서 손재주에 감탄하고 다른 한 손에 쥐어진 랜디스 도넛을 집어 냠냠 먹으면서 멤버들의 따뜻함을 흠뻑 만끽한다. 오랫동안 이 클럽을 한 고인물이 많아 텃세가 있을까 살짝 우려도 했지만 훈훈한 분위기에서 그동안 멤버들과 파트너가 같이 일궈나간 노력으로 다져진 끈끈한 의리를 엿본다. 이 클럽이 빨리 마감돼서 아쉬운 마음에 찜해두고 빈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 탄 나 칭찬해. 애정이 넘치는 클럽과 모임에 진심인 멤버를 보면 설레고 친해지고 싶다. 그런 모임에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면 긴장을 놓지 않고 집중하느라 빡세지만 아지트를 벗어나면 새롭게 태어난 듯 개운하다. 한 책으로 여러 시선을 나누고 지성이 뿜뿜한 토론을 하고 나면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고 느낀다.
마음이 넓어지고 일체감을 느낄만한 독서모임을 찾기가 어려워 답답해서 직접 파트너로 뛰어 기획해 꾸렸었다. (답답하면 직접 뛰라던 축구 선수 기성용 씨, 전 그래도 두발로 뛰었습니다!) 비록 다양한 걸 욕심내 신경 쓰느라 방전되어 다음 시즌 운영을 계속하면 좋겠다는 멤버분들의 말에도 그저 씁쓸히 웃으며 탈주했지만. 스스로가 만족 못 할 모임을 만들 게 뻔했던 터라 후속작을 졸편으로 남겨 원작을 망치는 뇌절은 안 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쉬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어요. 서로가 상황을 간 보고 질질 끌어 실망만 남기는 애매모호한 관계로 바뀔까 같이 달리기를 멈췄어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곧 지키고 싶다는 욕심으로 커져 오래 두고두고 사랑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했다. 꽂히면 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요령과 계산 따윈 접어두고 달려들어 생명을 소진하는 불나방이라 화려하고 눈부신 빛과는 거리 두기가 절실했다. 과몰입해버리고 나면 늘 그렇듯 빈자리가 후폭풍으로 손 흔들며 찾아오니 고독한 날 잃지 않으려면 차가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한다.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안전한 거리란 게 가당키나 한가? 당신은 그 말을 믿는가? 파트너 시즌 이후에는 축구하자고 연락 오고, 지난 시즌에 애정을 담은 게 기억난다며 종종 만나 밥도 먹고, 또 다른 분은 재밌게 한 추억에 파트너를 지원했고 인터뷰를 합격해 새 시즌을 준비한다는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 일방적인 애정이라 여겨 비워낸 인연이란 붉은 실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걸 보면 파트너로 걸어왔던 길이 꽤 나쁘지 않았나 보다.
여러 시즌을 겪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느낀 점은 지성인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라는 거다. 여기선 계급장도, 권위도 없이 한 주제에 코피 터지도록 뜨겁게 이야기를 해도 싸운다는 기분이 들진 않는다. 오히려 머리가 띵한 발언에 감탄해버리는 내가 있고, 타협 못하는 부분에선 속으론 빡쳐도 우아하게 상대를 설득해버리는 나를 발견한다. 편견 없이 지적 도파민이 터지는 케미에 기꺼이 중독되어 가리라. 멋진 분들과 함께 하는 만남을 고대하면서 모임에 가는 날을 기다리고 기대한다.
짠 내로 얼룩진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사진첩을 열어보니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뛴다. 단칼에 잘라낸 줄 알았던 독서모임이란 필름은 영혼에 불을 피워 카메라를 또 집어 들게 한다. 빛나는 지성을 탐하고 더 나은 존재를 갈망하기에 나는 과거의 나를 태워 이 글을 써내려 간다. 이 에세이에 수신 대상자가 이젠 사라져 빛바랜 고백을 담아 새로운 아지트의 입장료로 지불한다. 앞으로도 서로가 얽히고설키는 시간을 엮어 빤짝이는 비단을 짜내리라. 2022년, 맘 속에 별을 수놓을지 한 여름밤의 불꽃놀이가 될지 가봐야 알겠지? 올해는 멋진 스틸컷을 많이 찍고 싶다. 불나방 본성에 맞게 수많은 NG와 뒤따르는 이불킥이 그려지지만 어두운 이면들을 훌훌 털어내고 따스운 햇살을 받으면서 인생 방학을 즐겁게 맞이하련다. 냉정과 열정 사이,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