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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Oct 28. 2018

말을 하면 그리워지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 (J.D.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 

너무도 순수한 아이의 세계와 야망과 위선으로 얼룩진 어른의 세계에서 기로에 서 있는 홀든 콜필드. 청소년이라는 시기에 대해 어쩜 이렇게 잘 담아내었을까 싶다. 홀든에게 있어 미래는 불분명하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매일을 보내지는 않는다. 아이처럼 공상의 세계에 자주 빠지지만, 조숙한 외모와 더불어 담배, 술 등 어른의 세계에도 발을 들인지 오래다. 여동생 피비의 순수한 세계를 사랑하는 홀든은 자신이 이미 그 세계를 떠나오고 말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홀든 또한 그 세계에 걸쳐 있다. 그럼에도 홀든이 피비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른의 세계가 어떠한지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홀든은 정말 따뜻한 아이라, 이 발칙한 남자아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꽤 있었다. 가령, 반복되는 우울함에 자신의 세계에서 설 자리를 잃고 떠나겠다고 한 홀든을 보며, 연극을 앞둔 동생 피비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다. 그를 보며 홀든은 생각한다. "그애가 밉기까지 했다. 만일 나와 함께 간다면 그 애는 연극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애가 미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꼈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 건지 홀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따뜻하고 성숙하지만, 홀든은 아마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홀든은 정이 많다. 우울감이 자신을 잠식할 때면 누구보다 영특했지만 일찍 죽은 동생 앨리를 떠올리고, 피비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을 힘들게 만든 펜시 고등학교의 스트라드레이터, 애클리 등의 친구에 대해서도, 말을 하면 그리워지니까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피비와 이야기하면서 홀든이 진정으로 되고 싶다던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의 따뜻함과 순수함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비유이기도 하다. 


홀든이 앨리를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어딘가를 누군가 꾹 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된다. 홀든은 앨리가 죽은 이후, 차고의 유리를 모두 박살내어 버린다. 그때에 대해서 홀든은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그해 여름에 산 왜건의 유리까지 박살내려 했는데 이미 내 손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 참 어리석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 했다. 앨리를 모르니까 내 심정을 이해 못 할 거다. 


지금도 우울할 때면 앨리에게 혼자 말을 거는 홀든. 사람들이 잠깐 들렀다가 혼자 남겨두고 떠나 버리는 텅 빈 곳이 앨리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싫어, 앨리의 무덤에도 가지 않는 홀든. 겨우 열 세 살이었던 홀든. 누구보다 착하고, 똑똑한 앨리를 하늘이 저버렸다는 사실에 얼마나 무력해지고, 슬프고, 분노했을까? 절망에 홀로 거리를 배회하며 "앨리, 나를 사라지게 하지 마. 앨리, 나를 사라지게 하지 마."하고 말하는 모습은 너무도 위태롭고 뭉클했다. 


홀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다. 이는 홀든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아이들이 거칠 수 있는 과정이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기도 하기에, 홀든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 뭉클한 마음이 가득 들게 된다. 한 시기가 자연스레 안겨 주는 성장통을 겪으며 이 세계 어딘가에 서 있는 홀든의 모습은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 앙트완과 어딘가 닮아 있기도 하다. 


이전에 반 정도 읽을 때까지는 왜 깨닫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고, 인상 깊고, 마음에 남는 책이다. 아무래도 역자 이덕형의 번역 역시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을 한 층 더 살린 것 같다. 보통 세계문학은 민음사 것으로 많이 읽는데, 문예출판사의 판본으로 읽기 잘한 것 같다. 낡은 헌책방에서 이 책을 찾아 선물해 준 엄마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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