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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May 06. 2018

그때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게 있다

에쿠니 가오리,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속 책갈피

그때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장소,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
마실 수 없는 술,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게 있다.
(에쿠니 가오리,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중)

사랑니를 뺐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주기적으로 통증이 찾아왔지만 뺄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저 '언젠가' '때가 되면'이라는 말을 핑계 삼아 미루고 있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겠지 했는데 일주일이 넘어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약국에서 산 소염진통제로는 소용이 없었고, 새벽마다 몇 번씩 눈을 뜨는 것이 반복됐다. 결국 오늘, 고통이 발치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고 나서야 치과로 향했다.


의사는 관리가 되지 않아 이미 여러번 아팠을 거다, 진작 뺐어야 한다고 말했다. 속으로만 '하지만 너무 무서웠는 걸요'하고 말했다. 수술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약을 먹고 소독해야 한다는 것과 마취가 풀리면 아플 거라는 말과 함께 다시 치과를 나왔다. 뽑힌 치아의 안쪽은 까맣게 썩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니를 지금까지 뽑지 않은 건 나의 습관과도 맞닿아 있었다. 진작에 했어야 했다는 걸 알지만 하지 않고 미루는 습관. 곪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곪는 것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작은 등불 아래에서는 오직 등불 아래에 있는 것들만 보인다

사랑니처럼 많은 것들을 했어야 했지만 미뤄둔 채, 결국 흘려보냈다. 예를 들어 아직 대학생일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휴학을 하면서, 나는 내가 뭘 했는지 남겨두고 싶었다. 글로 적든,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든. SNS에 긴 일기를 쓰며 내가 뭘 했는지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든. 하지만 휴학을 마무리할 즈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시기를 놓쳐버렸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그 후로 나는 그 시간이 어딘가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느낌을 줄곧 받아야 했다.


초봄, 연인과 헤어졌을 때 나는 충분히 슬퍼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지금까지도 끝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애매한 채로 있다. 아직까지도 물건 하나도 버리지 못해 완전한 이별의 순간은 맞이하지 못하고, 그냥 미루기만 하고 있다.


이런 순간들은 그저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닥친 일들에 치이느라 신경쓰지 못한 나의 꿈과,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찾아두는 일. "언젠가 연락해야지"라고만 생각하던 친구의 소식을 묻는 일. 점점 늦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미루고 있는 것들이다.


오랫동안 미루었던 것에 비해 사랑니를 빼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 후에 밀려오는 통증이 거세긴했지만 며칠 후 사그라들었다. '언젠가'라는 이름으로 미루다 결국 흐지부지 된 것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모든 것들도 사실은 한 번 결심하고 나면 금방일 것이다. 하나씩 제때에, 미루지 않고, 끝맺지 못한 애매한 무엇으로 만들지 않고, 제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일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나의 새로운 습관이 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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