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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May 19. 2020

소리 수집가

지구는 결코 잠들지 않고  이십사시간 굴러가는 소리를 낸다. 나는 소리에 곤두서 있는 사람이어서, 머물던 도시의 소리를 기억한다.


트롬소의 겨울. 허벅지높이의 눈을 빨아들이고 뱉는 기계의 모터음, 집마다 삽으로 눈치우는 소리, 도로를 긁는 제설차, 썰매와 스키의 마찰음, 보트의 엔진시동. 그리고,  모든 여행자의 입이 쫓고 있는 단어 “오로라”


게르에서 보내는 초원의 첫번째 밤. 목덜미를 깨무는 소리에 집중. 덩어리의 움직임, 돌무더기, 호흡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숨죽여 생각해 보니, 양과 말떼였다. 동시에  반지의 제왕을 더빙한 몽골어가 귀를 때렸다.  얇은 벽만큼 게르는 안과 밖이 모호했다. 내가  방목되어 풀에서 자는 것 같았고, 동물들이 스코틀랜드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별과 은하수, 위성 안테나, 텔레비젼, 염소똥과 말똥의 불튀, 모래바람이 둥근 게르에 깎이는 소리. 유목민이 길어온 물을 큰 통에 붓는 소리, 오늘 먹을  물이 생겼다고 안도하는 내 마음과 위의 공회전. 현실과 초현실이 뒤죽박죽 섞이는 소리.


웨일즈의 농장. 밤마다 사과와 배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소리. 낮에는 잔디깎는 소리, 무거운 돌과 거름을 나르는 수레의 괴로운 소리. “런치 타임”  노동자가  제일 기다리던 말.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

지난 밤 벽사이로  새는 전화벨과 남자가 매번 똑같이 대답했던  문장말고는 이등석 객실은 조용했다. 손님은 나 혼자. 직원이 문을 열고  한 마디했다.  “스노우븸 고우담”. 나는 해피뉴이어 라고 대답했다. 이틀 동안 처음 나눈 대화. 다행이었다. 밤새 이웃이 상대에게 했던 말을 귀로 훔쳤는데, 눈을 보며 직접 말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서. 새해 첫 날 인사말은 어디든 비슷하다. 입술모양과 혀의 위치만 다를 뿐. 하루에 사람이 최소한 말해야 하는 개수가 있을까? 일일 영양권장섭취량처럼.


아침마다 확인되지 않은 사내의 목청.

벼르던  어느 날, 마당에 가보니 수제요거트를 파는 할아버지였다. “마쪼니, 마쪼니.”  윗층 중년 여자들이 빈병을 돌려주고 마쪼니를 사는 풍경. 더는 슈퍼에 가지 않고, 나도 대열에 합류했다. 마쪼니장수의 단골손님 놀이에 심취했다. 동네주민처럼 살아보라는 한 달살이 광고의 부작용은 열달로 끝났다. 트빌리시의 우연한 맛.


카일라쉬 계곡 사람들 장례식.  태어나서 처음으로 총소리를 들었다. 장총을 하늘로 향하고 세 발 쏘는 의식. 영화에서는 그냥 음향효과였는데 , 실제로는 몸과 정신이 붕 떠서 안드로메다로 떨어지는 충격이었다. 지구 모퉁이에서 마주친 죽음.


반다아체. 모스크와 삼백보 떨어진 집. 새벽마다  귀밑에서 울리는  카잔.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라는 신호. 시키는대로 나는 침대에서 중얼거렸다. “ 단잠 자고 싶어요.” 해가 떠 있을 때 음식을 먹어서는 안되는 라마단. 저녁 식탁에 앉은 가족의 침묵. 모스크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접시소리, 마시는 소리, 씹는 소리가 허겁지겁 났다. 일곱 개의 목울대가 동시에 요란하게 작동했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공장의 기계처럼.


가족같은 분위기의 예레반 호스텔.

동거인들이 방학동안 집에 가는 바람에 혼자가 된 인도유학생. 인기척 없는 빈 집을 참기 어려워 호스텔을 선택했다. 돈으로 호스텔의 소리를 샀다. 남자는 안정되고 보호받는 기분이라고했다. 어디에서 나는지 신경쓰이지 않고, 집중이 잘 되는 생활잡음 : 세탁기, 피아노, 외국어, 파티, 설겆이, 청소기, 오븐, 노래, 샤워, 수다, 수영장. 장기여행자의 감정을 닳게 하는 소음이 유학생에게는 필수품이었다.


경계를 지키는 입국심사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같은 질문과 대답. 마지막, 도장으로 여권을 지지는 소리. 여행자의 심장을 달군다.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아드레날린  펌프질 소리.

 입국도장 꽝!


국경을 넘어 밤에 도착한 새로운 도시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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