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벽부터 버스, 봉고차를 갈아 타고 러시아국경을 넘었다. 출국, 입국 심사에서 문제가 생겨서 하루 종일 애가 탔다. 택시를 타고, 막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이름도 러시아말도 입에 붙지 않은 상태였다. 한여름의 먼지와 땀, 긴장을 씻고 싶었다. 나는 샤워, 깨끗한 원피스, 레몬 한 조각 넣은 홍차, 첫 식사, 낮잠 생각 뿐이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다게스탄 자치 공화국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거의 없었다. 마침 택시기사는 자신이 아는 숙소를 소개시켜 주었다.
여관 이층방에서 계단을 따라 마당에 왔을 때, 불길한 공기가 있었다. 뒤를 돌았을 때, 여자주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니까, 남자가 없어졌다. 나는 대문 밖으로 뛰었다. 길가에 세워둔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십분 전에 택시운전수와 나는 주인이 안내한 방을 같이 구경하고 있었다. 운전수와 택시, 나의 가방은 예고없이 숨어버렸다.
배낭이 사라진지 두 시간 째다. 그것을잃고나니그안에무엇이들어있는지처음으로생각해보았다. 오렌지색방수커버를벗기면, 파란색 35리터크기,나의집이다. 가장바깥부분은그물로된신발장. 여름샌들을보관한다. 등산화는부피가커서, 계절에상관없이내가신고이동한다.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나만의 방을 원했다. 자신만의 영역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한 방에 여덟명 씩 자는 호스텔에서 몸은 계속 지쳤다. 그 때, 무겁다는 핑계때문에 미뤘던 서재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부터,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집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면의 웅덩이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타인에게 귀를 빌려 주었다. 도둑, 길거리 시인, 라이프 코치, 마술사, 히피. 일기장은 나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많은 비밀을 적을 수록, 더 많은 모험이 벌어졌다.
나는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전에는 캐리어와 배낭을 합친 가방을 산적이 있다. 등에 맬 수있고, 바퀴가 있어 끌수 있었다. 방콕의 시장에서 산 집은 한 달만에 찢어졌다. 꿰맸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나는 배낭여행자도 아니고, 여름 휴가온 관광객도 아니었다. 둘 다 불편해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집과 나는 쌍둥이같았다.
여행을 시작한 첫 날로 돌아가 보면, 더 우습다. 십오킬로그램 짜리 캐리어를 출국하기 이틀 전에 샀다. 가장 멀리, 가장 오래 여행을 하고 싶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을 담아야 할 지 몰랐다. 히말라야, 여름바닷가, 등산, 유럽 도시를 생각하니 뭐든지 필요할 것 같았다. 원피스, 스웨터, 장갑, 반바지, 스카프, 구두, 운동화, 등산바지.
외국에 도착했을 때,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마중나왔다. 나의 거대한 캐리어를 보고, 그는 입이 벌어졌다. 결국 이주 후에 가방 통째로 친구집에 놓아둔 채, 여행을 시작했다. 십오킬로그램의 두려움과 불안을 버렸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두루뭉술한 생각이 투명해졌다.
그후로 정기적으로 가방을 살피고, 물건을 버린다. 도시를 이동하기 전에, 특히 국경을 넘기 전에 짐을 가볍게 한다. 파기스탄에서는 어쩌면 찬장에 돌이 잔뜩 있었다. 크리스탈원석, 연두색, 보라색 광석. 오만에서는 유향, 인도에서는향수, 오일. 흙으로 구운 가네쉬 신, 향신료.이란에서는 카페트에 빠져서 꼭 사고 싶었지만, 그것을갖고 여행할 수는 없었다. 어쩔수 없이 나는 알게 되었다.국경을 넘어서 여행을 계속 하려면, 나에게 빈 공간이있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 생각, 자연을 받아 들이려면.또한, 모든 것들은 그 장소 그 시간에만 일어나는 일이므로최대한 만끽해야 한다는 것도. 다음은 없다. 만약 다음이 일어나도 그것은 똑같지 않다.집은 비울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담을 수 있다.
사실 내가 버리는 건 소지품이 아니라, 그것에 투영된 나의 걱정, 무지, 욕심이다.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경험과 자유였다. 집에 대한 원칙도 생겼다. 물건을 살 때는, 꼭 비슷한 크기를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번 불어난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 때의 다이어리는 삼십 분 단위로 해야 할일 목록을 적도록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내 삶도 그 칸에 맞춰 단순하게 명사의 품사처럼 살았다. 직업, 딸, 친구. 하루는 무게를 줄일 만한 것을 찾다가 다이어리의 가죽커버를 찢었다. 비싼 표지가 뜯겨지니 속도 한심해 보였다.
잃어 버린 수첩은 정반대였다. 네팔에서 두꺼운 종이로 손으로 삐둘어지게 만든 일기장, 독일에서 직접 종이를 자르고, 디자인하고, 바느질해서 만든 스케치북, 이란에서 선물받은 핸드메이드 수첩. 공통점은 종이에 줄이 하나도 없다. 무한대로 펼쳐진 하늘 같았다. 스케치를 하거나 일기, 시를 적었고, 메모지로 썼다. 기차표, 초콜렛 포장지처럼 나의 기억을 붙이기도 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전화번호. 읽을 수 없는 외국어 문장.
여행가방과 나는 서로의 아바타이다. 나의 의식은 가방을 조종하고, 집은 중요한 습관을 만든다. 책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책기둥처럼, 나는 마당에 서 있었다. 너덜너덜 해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