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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Jul 18. 2020

읽다

'첫'이라는 말은 설렘, 살짝, 떨림을 담은 마음주머니 같다. 러시아의 첫 여름이었다. 작은 도시의 여행이 끝나갈 때호스텔에 초등학생들이 묵었다장난치다가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불쑥 나는 말했다. “오늘 밤, 나에게 러시아를 가르쳐줘.” 아이들은 알았다며 뭐가 좋은지 신났다외출했다가 서점에 들렀다점원에게 말했다. "빠로쓰끼알파벳베이비." 책꽂이 한 칸을 그녀와 함께 싹 다 뒤져서 한 개 골랐다.

 

약속대로 밤에 우리는 부엌에 모였다. 식탁에 동그랗게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어 알파벳은 영어와 비슷해서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이외로 알쏭달쏭했다. 영어P 는 러시아어 R이 되고, C는 S이다. 이번엔 E 가 머리 위에 점 두개를 하고 나타났다. 마르고 키 큰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헤이요오." 했다소년의 난데없는 힙합 춤에 우리는 끼룩거렸다한방에 "요오발음은 해결됐다.

 

나의 입술목은 조화롭게 소리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쓰지 않았던 얼굴 근육은 딱딱해져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셋이  번에 웃음보가 터졌다내가 러시아어로 욕을 했다고 알려 주었다다음  ZH발음나는 맥을  췄다위로하듯이 셋은 한꺼번에 진동을 했다좁은 공간은 체취키득거림전기면도기 소리,땀이 한데 섞였다카페처럼 넓은 부엌은 할아버지가 독차지했다텔레비젼 보는데 방해된다고 우리는 쫓겨 났다냉장고   개의 작은 테이블구석 모퉁이는 바람   통하지 않았다소년 선생님들은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핑크빛 보드라운 입술은 오므렸다벌렸다주름졌다탁한 소리를 목깊이 끌어 올리기도 했다한여름밤금발머리 소년들은 거침없었다.

 

그 밤이후, 나는 알파벳 공책을 들고 다녔다. 그림과 함께 있는 단어를 아기처럼 읽었다. 아르부스, 베게모트, 흐렙. 글자를 익히기 위해, 점선 위로 선을 그었다. 다음은 모눈종이에 알파벳을 그렸다. 신경을 집중했다. 연필을 잡은 손등과 팔뚝에 핏줄이 불룩했다. 혈관을 타고 기억세포가 정수리를 톡 쳤다. 갑자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사람, 그것도 과거 속 엄마가 생각났다.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면, 엄마는 마당에서 하던 일을 멈췄다. 어디에서 온 편지냐고 물었다. 그녀는 남편한테 부탁하지 않고, 나를 꼭 기다렸다. 엄마는 다이얼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는 전화기 밑에서 편지를 꺼냈다. 옆에는 뒷통수가 볼록한 빨강 금성티비가 있었다. 채널을 바꾸려면, 가스렌지 손잡이모양을 한 바퀴 돌려야 했다.


초등학생, 나는 모나미볼펜으로 쓴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군대에 간 오빠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편지지에 엄마 얼굴이 가려져, 어떤 표정이었는지 보지 못했다. 엄마의 숨결만 느꼈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는 바람에, 시골집은 주말에 들리곤 했다. 엄마는 매번 나를 기다렸다. 버튼식 전화 아래서 누런 봉투를 열장 넉넉히 꺼냈다. 나는 세로로 아버지 이름을 적고, 끝에는 ‘처’라고 적었다. 축의금과 조의금 봉투였다. 느닷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번엔 남편대신, 자신의 이름을 적으라고 시켰다.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들만 공부를 시켰다. 나중에 시대가 바뀌었고, 비슷한 처지에 있던 여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한글을 깨우쳤다. 어렸을 때는 외할아버지가 야학에 못 가게 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때문에 엄마는 기회를 놓쳤다. 농촌생활은 밭일이 중요했고, 읍사무소에 가는 일은 남편이 처리했다. 처음부터 문자세계는 엄마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4.3사건에 오빠를 잃은 이야기, 식민지 시절에 일본병정에게 고구마를 팔았던 일,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목포까지 피난가서 배타고 집에 온 무용담을 엄마는 내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글자가 아니라, 온몸으로 삶을 겪었다.


나는 어릴 때 부터 명탐정 셜록홈즈, 빨강머리앤, 제인에어, 괴도루팡 같은 세계명작 문고판 시리즈를 읽으며 자랐다. 학교에서는 외국어를 배웠다. 활자중독인 나는 책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맹의 삶에 나는 무관심했다. 시골에 혼자 남은 엄마가 우편물과 은행때문에 곤란해질 줄은 당연히 몰랐다.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엄마는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무렵이였다. 유치원 선생님인 손녀가 한글책을 사다 주었다. 집에 갈 때마다, 나는 밥상을 펴고 엄마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더듬더듬 소리를 냈다. 선을 하나 그을 때마다, 연필을 꽉 쥔 엄마의 손이 떨렸다. 삼십 분 공부를 하면, 엄마의 눈이 이 침침해 지고, 팔목, 허리가 아파왔다. 자주 쉬었다. 밭일할 때 무거운 짐을 곧잘 들던 엄마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작은 연필로 한 글자 쓰는데, 힘에 부친 한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러시아 알파벳을 꾹꾹 눌러 쓰던 내 오른팔이 쑤셨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긴 외국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는 문맹이 되었다. 크메르어, 페르시아어, 타밀어, 아랍어, 우르두, 키릴 문자. 나를 둘러싼 공간이 달라졌다. 버스, 간판, 메뉴. 나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 했던 반대편 숲을 나는 처음 보았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익숙했던 사물이 낯설었다. 눈을 감았다. 몸은 호스텔 부엌과 시골집 안에 있었지만, 의식은 경계 바깥에 존재했다. 엄마가 몸으로 직접 읽은 반대편 숲에 나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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