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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Nov 17. 2016

미국에서의 등산 (1) - Baldy

젊은 놈이 뭐하러

미국에 온 지 3일째가 됐던 날, 매형의 고모부님의 부름에 의해 LA 인근의 산에 가게 되었다. 미국에 가기 전, 누나는 내게 '트레킹 할 거니까 운동 좀 하고 와.'라고 했고, 트레킹을 버틸 건강한 몸을 조금이라도 만들어 놓기 위해 북한산을 두 번 정도 올라갔고 수영을 매일 하곤 했다. 그런데 미국에 온 지 3일 만에 등산을 가게 될 줄이야. 시차 적응할 시간은 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도, 누군가의 부름에 의해 멋모르고 하게 되는 것들은 내가 퇴사 전에 꿈꾸던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감사히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등산 당일이었던 일요일, 아마 오전 6시쯤에 기상을 했던 것 같은데, 최소 오전 8시 정도에는 등산을 시작해야 했기에 준비를 서둘렀다. 시차 적응이 제대로 안됐던 시기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나는 스팸과 밥을 김으로 묶은 주먹밥을 도시락으로 싸줬다. 누나가 싸 준 내 평생 첫 도시락이라 어색했지만, 그래도 누나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됐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라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는지, 직접 누나에게 이야기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매형과 나는 도시락과 기타 준비물들을 챙기고 고산병을 대비해 알약을 챙겨 먹었다. 융프라우에서 고산병의 고통을 느껴봤기에 냉큼 받아먹었다. 그리고 '고산병 올 정도로 높은 곳을 가나?'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했다.


누나는 내게 계속 강조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해야 돼." 


본인의 경험담이었다. 등산 초보라고 해서 별도의 배려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그만큼 고모부님과 그의 등산 멤버들은 등산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냥 휴일에 모여 도시락이나 먹으러 산에 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누나는 매형과 나를 약속 장소까지 태워주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만 해도 매형과 그렇게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고 매형의 고모부님도 한번 본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른 등산 멤버분들은 당연히 처음 보는 분들이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었던 터라,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애들이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누나와 매형의 결혼식 후 오랜만에 뵙게 된 고모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다른 등산 멤버 분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고모부님은 미국에서 사업을 오래 하신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화를 이끌어가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덕분에 등산로 입구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별 어색함 없이 갈 수 있었다. 나도 나이가 더 들면 저 정도 언변은 가져야 할 텐데 하는 걱정 반, 부러움 반의 마음 또한 생겼다.


우리가 갈 산은 'Baldy Mountain'이란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Ontario Peak'라는 봉우리를 등반할 예정이었다. 높이는 8637피트로, 2632미터나 되는 곳이었다. 백두산 정상보다 조금 못 미치는 높이였다. 등산이라곤 어릴 때 북한산을 다녀본 게 전부였는데, 2천 미터가 넘는 곳을 오른다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물론 0미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천 미터 중반대에 있는 주차장에서 시작을 했지만, 등산과는 담쌓고 살았었기에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었다.


고모부님의 등산 멤버는 고모부님과 함께 일을 하시는 남자 두 분과 한 분의 사모님을 포함한 총세분이었다. 그중에 마라톤 선수였던 분이 계셨는데 내게 '페이스 조절'을 계속 강조하셨다. 힘들다고 느껴질 땐 최대한 보폭을 줄이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 힘들 때 보폭을 줄인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유념하고 등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이렇게 미국에 와 쉬고 있는 건 인생의 보폭을 잠시 줄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등산을 한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등산을 한다는 사실은 더 특별했다. 한국의 산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솔방울 하나만 봐도 달랐다. 내 발보다 더 큰 솔방울이 산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발이 큰 편은 아니지만 260mm 정도의 등산화보다 더 큰 솔방울이라니. '미국은 솔방울마저 큰 것이냐?'라는 생각을 하며 괜한 질투가 느껴졌다. 땅도 넓고 사람들도 피지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도 모자라 솔방울마저 크다니? 별 필요 없는 열등감이 잠시 스쳐갔다.


약 4~5시간 정도 산을 오르다 보니 정상을 볼 수 있었다. 정상에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듯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사람이 올라가도 끄떡없는 튼튼한 나무였다. 마치 미서부의 황량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생겼었다.

황량함 가득한 정상에서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정상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배가 고팠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식사가 어려웠다는 20대의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먹어댔다. 고산병에 대한 걱정 또한 '그게 뭐죠?'라고 반문해야 싶을 정도로 멀쩡했다. 모든 걱정들은 등산하는 동안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나이를 먹어가며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걱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등산을 함께 했던 분들은 내게 등산을 곧잘 한다며 칭찬해 주셨다. 절대 쉬운 코스가 아닌데 잘 따라온다고 말씀하셨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한편으론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아빠를 따라 북한산을 자주 올랐던 어린 시절, 그때에도 지나가던 어른들은 내게 '어린애가 산을 잘 타네~'라고 말씀들을 하곤 하셨다. 북한산의 만경대를 오를 땐 '커서 허영호 같은 사람이 되겠구나.'했던 분도 있었다. 


내 의지로 간 것이 아니었던 어린 시절의 등산 경험은 미국에서의 등산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하고 싶어서 했든 억지로 했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정상의 고목에서 실컷 사진을 찍은 후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4월이었지만 고지대여서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었다. 눈 덮인 곳들 중에서도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한 곳들은 단단하여 미끄럽기까지 했다. 계단이나 난간 등을 전혀 설치해 놓지 않은 산이었기에 미끄러지면 한 30m는 멈추지 않고 구를 것 같아 조심에 조심을 기하여 걸었다. 아마 자연보호를 목적으로 구조물 설치를 최소로 한 것 같은데, 대의(자연보호)를 위해 소(사람 보호)를 희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크게 미끄러질 뻔했던 한 번의 위기를 빼곤 별 일 없이 하산을 마칠 수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오후 5시경이었다. 어릴 때 억지로 등산을 하며 가졌던 '어차피 내려올걸 뭐하러 올라가?'라는 의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한 단계 건강해지는 것 같아 기분 좋았고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주는 여러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 또한 좋았다. 피곤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뿌듯함이 분명히 있었다.


차를 타고 저녁 식사를 위해 LA의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일행분들 중 두 분은 소맥을 곁들이셨다. 나에게도 술을 한잔 권하셨지만 예전보다 당당하게 '아 저는 술을 못 마시고, 안 마십니다.'라고 이야기하며 거절을 했다. 술이 안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며 이내 수긍하셨다.


소맥을 드시던 두 분은 취기가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은 내게 LA에 계속 있을 거냐 물으셨고 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내 팔뚝을 툭 치시며


"젊은 놈이 뭐하러 한국에 다시 가. 그냥 여기 있지!"


라고 하셨다.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분이 한국에서 맛본 인생의 쓴맛이 담겨있는 듯했고 한국에 대한 불신, 분노 등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저 말씀의 의미를 하나하나 여쭤보진 않았지만, 표정과 말투, 내 팔을 툭 치시던 행동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저 말씀을 통해 '정말 한국은 헬조선인건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그 정도는 아닌데... 라며 아저씨의 생각을 머릿속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저씨의 말을 다르게 생각해봤다. 조금 뒤집어 생각하니, 단지 한국을 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내 나이면 미국에서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나이라는 걸 강조하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서른 넷이라는 나이가 어린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저 숫자와 상관없이, 도전을 시도해볼 만한, 사지 멀쩡하고 뭐든 흡수할 수 있는 나이인 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매형, 누나와 함께 한국 예능을 봤다. 무슨 프로를 언제까지 봤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분명 거실에 있었는데 일어나 보니 방에 들어와 있었다. 덜 됐던 시차 적응, 산행으로 인한 피곤이 초저녁부터 시작되어 아침까지 이어진 긴 잠에 의해 완전히 씻겨 내려간 느낌이었다. 


매형과 누나는 월요일이 되어 출근을 했다. 집엔 나 혼자 뿐이었다. 고단했던 등산 다음날부턴 진정한 LA 일상 체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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