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신부

by 글똥

어느 해 1월 11일, 저녁 5시 30분에 숲으로 간 적이 있다. 몇 걸음 만에 어스름 해가 지기 시작하고 산그늘이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시간. 고라니가 활동하기 시작하는 때, 그들이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났다 후다닥 사라지는 것을 본다. 멈칫 바라보다 이내 다시 풀숲으로 겅중 사라지는 저녁 시간의 네 발 짐승들.


홀로 걷는 길은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서둘러 모퉁이를 돌아 나와야 한다. 후다닥 잰걸음이 더 바빠지고 등에서는 후끈 열이 난다. 풍경에 갇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지났던 길이 축지법을 쓴 듯 순식간에 포도池에 도착했다.


신년 첫날엔 혹독한 겨울 날씨 덕에 모처럼 들른 숲에서 얼음 썰매도 탔다. 몸은 자라 어른이 되었어도 어린 시절의 얼음 썰매 기억은 낯선 산책자들의 마음을 녹인다. 주고받는 말들로 포도池는 금세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수다스러운 초로의 아저씨, 아이처럼 깔깔 웃는 아줌마. 어른이들의 놀이터가 돼 버린 아이스링크장.


그새 날이 풀리고 포도池의 얼음도 얇아졌다. 두어 번 타 보았던 얼음썰매는 이제 내년을 기약해야 다. 빙판의 작은 연못은 달그림자에 빛나고 얕은 둔덕에는 벚나무들의 몸피가 진한 검정으로 물들어 옅은 여백과 구별된다. 바람을 삼킨 것은 어둠, 그 속에서 작은 소리가 재빠르게 내게 건너와 내 몸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나를 뚫고 지나갔다가 돌아와 내 앞에서 맴돌았다. 수없이 이곳을 지나갔으나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으며, 듣지 못한 소리였고 공기였고 경험이었다.


아주 오래전 읽은 만화책이 생각났다. 겁 많은 쌍둥이 소년 중 한 명이 산짐승에 쫓겨 달아나다 낭떠러지에서 폭포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필 그날이 백 년 만에 뜨는 특별한 보름달이었고, 폭포 아래의 물이 걸쭉한 액체로 변하는 날이었다. 그 물을 마시는 자는 천하장사가 되는데 바로 겁쟁이 소년이 그 주인공이 되고 그날부터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다는.


나는 오늘, 이 시각의 어스름이 숲의 식물들과 나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걸 알았다. 식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연못 위를 스르르 가볍게 미끄러져 내 심장까지 닿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건너편의 식물들을 바라보았다. 여섯 신부였다. 순간 내 주위에 가득해진 그녀들의 목소리가 내 몸을 감쌌다. 그녀들의 대화법은 황홀하고 신비로웠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깊고 은은한 울림이었다. 연못의 이편과 저편에서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웅웅거리는 어둠 속에서 내가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여섯 신부와의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마 그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내 발가락의 뼈들은 뿌리가 되고 다리의 힘줄이 물관이 되어 여섯 신부들의 곁에서 꽃을 피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의 시간이 꿈처럼 흐르고 나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연못을 빠져나왔다.


주말이면 가끔 오후의 시간에 숲으로 간다. 초록의 보리순이 고개를 내밀고 봄을 기다리는 논두렁에 우뚝 서서 여섯 신부를 바라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그녀들의 무채색 침묵이 곧 연분홍 꽃잎으로 바뀔 날도 머지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곁가지에 뭉툭한 눈들이 유록의 새순을 틔우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이 보인다. 끙끙거리는 그녀들의 특별한 혹은 일상의 모든 모습이 그날 이후 더욱 환히 빛난다.


낮에서 밤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그녀들에겐 또 하나의 생명을 키우는 거룩한 때였다는 걸 나는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앙상한 가지에서 팝콘처럼 벚꽃들이 피면 나는 얼른 그곳으로 달려가 여섯 신부와의 왁자한 수다 속에서 또, 봄을 맞이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눈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