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다
벌컥, 안방 문이 열린다. "눈 온다"는 말에 번쩍 눈을 뜬다. 흐린 창 밖에 뭔가 있다. 추운 몇 날이 지나니 하늘이 제 할 일을 한다. 세상이 조금 하얘졌다. 펑펑 내리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붉은 소파를 창에 바투 끌어 놓고 풍경 앞에 얼음이 된다. 소리 없이 나리는 듬성한 눈앞에서 푹푹 나리는 백석의 눈을 상상한다. 눈이 내게로 오고 있다. 내 마음이 혼탁해져 있음을 하늘이 가장 먼저 알았나 보다. 선한 마음으로 돌이키라고 내게로 오는 중인 저 눈들. 내 마음의 끝, 한 자락에 살포시 들어와 나를 훑고, 나를 톺아본다. 오래, 밖의 눈과 내 안의 눈을 마주한다.
#눈이 내린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본다. 하늘 천장 어디쯤, 차갑고 무거운 구름 한 덩이에서 저 눈들은 발아한 걸까. 야고보서를 듣는다. 어우러져, 슬그머니 내 마음에 들어와 버린 눈송이들. 녹아 흐른다. 솟구쳐 흐른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1 : 26'
#눈이 솟구친다
역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어느 지점에서 다시 역류한다. 35층의 바깥은 솟구치는 눈발로 가득하다. 세상이 뒤집힌 것 같은 공간이다. 마치 내가 물구나무를 섰거나 혹은 세상이 물구나무를 선 것 같은. 가끔 중산지의 물 위에 비친 도시들을 바라보며 상상했다. 물속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다면. 나를 닮은 또 한 사람을 꼭 만나고 싶다는 어이없는 상상. 비밀의 통로는 아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가득한 역린의 눈앞에서 세상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나를 잠시 건져낸다.
#눈이 흘러간다
바람이 춤을 춘다. 눈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연의 축하 퍼레이드다. 어찌하여 저들은 서로의 존재를 위해 하염없이 온몸을 내던져 서로에게 몰입하는가. 사랑이다. 흘러가는 눈을 보며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본다. 내 눈앞에 흘러가는 사랑을 잡으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민다. 나를 스쳐 지나는 눈과 바람을 놓치지 않으려 휘휘 내젓는 나의 왼팔. 모든 것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