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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Jun 10. 2024

시루섬*에 부는 바람

시루섬=증도

떠남은 언제나 옳다. 불시에, 갑자기, 후다닥 떠남은 더욱 옳다. 직장의 무게를 훌훌 고 가정에서의 역할도 잠시 내려놓고 친구들과 고속도로를 달린다. 우리의 모임은 이름도 '쉼'이다. 오늘은 쉬러 간다. 몸도 마음도 쉬러 간다.


일찍 서둘렀던 걸음을 멈추고 들른 휴게소에서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단숨에 해치운다. 실내를 가득 채운 번의 향을 갓 내린 커피와 함께 마신다. 바삭한 겉과 촉촉한 속이 혀 끝에서 바로 녹는 빵. 통유리의 바깥 풍경은 6월로 꽉 찼다. 초록도, 바람도 빈틈이 없다. 나서기만 하면 체하는 이른 바깥 밥도 오늘은 술술 내려간다. 막힘없는 몸 덕분에 오늘 여행은 벌써 성공이다.


붉은 흙이 시야에 가득하다. 흐린 구름과 옅은 경계를 이룬 바다도 보인다. 섬과 섬을 연결한 다리도 몇 개 건넜다. 위태한 수직의 도시에서 수평의 땅으로 건너온 시간, 바라만 보는데 마음이 편안하다. 방해라고는 없는, 긴장감도 없는 탁 트인 시야가 주는 선물이다. 색다른 풍경에 마음이 한껏 부푼다. 내 안의 단단한 것들이 평야에 풀어지고 바다에 흩어진다. 여행지에서의 만족이 수평선 혹은 지평선에 맞닿는다.


숱한 섬들의 역사는 순교기념관의 한 여인의 스토리로 재생된다. 섬과 섬을 오가며 일생을 바친 문준경 전도사의 파란만장한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집안의 뜻대로 결혼 후 바람기 많은 남편과 이혼하고 신앙생활로 새로운 삶을 이어갔던 그녀. 돛단배를 타고 노둣길을 걸어 복음을 전파한 그녀의 영향으로 신안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그녀는 한국 전쟁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풀려난 후에 증도로 다시 들어갔다가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그녀의 삶은 여전히 섬을 찾아오는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각자의 삶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남긴다. 죽음을 불사한 정면돌파의 삶.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3년 전, 나는 내 몸에 찾아온 불청객과 사투를 벌였다. 세상의 어떤 싸움보다 치열했던 시간, 나를 위로하고 또 나를 이기기 위해 나는 모진 시간을 보냈다. 아픔과 고통이 점철된 시간 사이사이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장을 셀 수 없이 끼워 넣으며 나목의 시간들을 견뎠다. 지나고 보면 과거의 고통은 실제보다 훨씬 더 깊은 슬픔으로 무르익어 그 시절을 지나온 내가 마치 영웅처럼 되어 있음을 본다. 세상의 많은 이가 지나온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스스로에게는 가장 특별하고 거룩한 자리로 매김 하기 때문이다.


함부로 논할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거룩한 삶 앞에서 사실과 각색의 내 사소한 생각이 범람한다. 멈춘 듯 때로는 후진하는 것 같은 나의 삶을, 축소해서 만들어 놓은 노둣길의 고무신에 담아 여정을 따라가 본다. 짧은 묵상에서 나의 자리와 나의 할 일을 재점검한다. 오늘은 몸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깊이도 가늠해 보는 그런 시간, 휴일의 번개 여행이 주는 뜻밖의 선물이다.


썰물과 밀물로 이곳은 매일 바닷길이 열린다. 화도로 들어가는 노둣길을 사진에서 본 적이 있다. 징검다리는 사라지고 시멘트로 연결된 튼튼한 길을 단번에 통과한다. 망둥어가 펄쩍 뛰고 게들이 재빠르게 뻘 위를 달리는 것을 2배속으로 본다. 먼 길을 달려와 만난 풍경이건만 정오의 뜨거운 햇빛이 유유자적 감동의 순간을 포기하게도 한다. 열린 창으로만 보는 갯벌의 풍경이 못내 아쉽다. 계절풍이 바뀔 때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아 천천히 걸어보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메마른 잎들로 축 늘어진 돌복숭 가로수의 화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이내 돌아 나오는 섬, 반듯하게 가꾸어 놓은 염전이 아담한 바둑판같다. 가두어 놓은 소금물에도 윤슬이 산다. 자연의 풍경은 어디든 닮았다. 삶의 화석처럼 세월을 말해 준다. 가만히 있는 듯 하나 언제나 생명을 키워내는 자리에 삶을 이어가는 숨결이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농촌에는 농부가, 어촌에는 어부가 그 풍경의 화룡점정이 된다.


태양의 부스러기 속에서 나의 하루도 절여지고 숨이 죽고 소독이 된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과 아직 내려놓지 못한 생각의 불순물이 간수를 빼듯 빠져나간다. 어느새 오래전 양수의 바다에서 노닐던 고요와 평안의 시간 가까이 내가 서 있다. 떨어진 배꼽의 태로부터 소금의 결정이 방울방울 흐르는 시간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열 달의 시간을 몸은 여전히 기억한다. 나는 이것으로 인해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여름을 즐겁게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염전에서 자란 언어는 읊조림에도 간이 밴다. 몇 시간을 달려왔지만 함께한 친구들과 주고받는 말이 심심하지 않다. 무더운 날에 수천 걸음을 걸었으나 적당한 염도로 서로를 지킨다. 늦은 오후가 되어도 지치지 않는 기막힌 언어의 염도. 맛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 소금뿐이겠는가. 서로의 시간이 비벼져도 제 맛을 지키며 인생을 즐기는 자, 마침내 우리는 소금꽃처럼 빛나고 말겠다.


마치 아랍 미리트의 사막을 지나 파타야의 해변에 당도한 듯 풍경이 이국적이다. 작열하는 태양, 가시가 되어가는 잎들의 질긴 생존의 시간을 걷는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모래 위의 풀들은 또 살기로 작정했나 보다. 스쳐 지나는 생명들에게 그들의 생채기를 옮긴다. 어서 오라고, 바람에 펄럭이는 얇은 바지를 콕콕 찌르며 반기는 그들만의 인사. 이 아픔의 자리를 지나야 고운 모래와 파도를 만날 수 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바다로 난 길이다.


키 작은 풀들이 듬성듬성, 사막 같은 풍경 너머에 야자수와 모래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모자이크의 조각 안으로 들어가니 현미경처럼 확대한 풍경이 보인다. 생명을 다하고 모래에 장사된 조개의 유해들, 그 껍질 위에 다닥다닥 붙어 함께 운명을 다한 거북손들. 햇빛과 바람에 바싹 마른 조개껍데기를 주워 모래를 턴다. 죽어서도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쓰임새로 뒤척여지다니. 세상의 모든 것은 버려진 자리에서도 그 필요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


오후의 모래사장은 바다생물도 피해 가는 시간. 이른 아침 게들이 게워 올린 알알이 모래 위 그림이 마치 페루의 거대한 유적처럼 다가온다. 우산으로 콕콕 찍어놓은 듯 선명한 키조개들의 숨구멍도 잠시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바다의 하루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무한반복된, 앞으로 무한반복될 변함없는 역사다.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는 바다, 그 파도의 끝에 내 숨결을 잇는다.


가슴팍 한쪽, 칼자국을 남겼던 쉰의 고개를 넘고 나는 무엇을 시작한다는 것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 체력에 슬픔이 섞이기 시작했다. 무시로 떠났던 오늘 같은 이른 아침의 당일 여행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되어 버린 장시간의 여행. 떠나온 이유를 꼽자면 열 가지도 넘겠지만, 제법 마른 슬픔의 자리에 숨구멍이 필요했다는 한 마디로 나의 여행을 변명한다.


이제 겁내지 말고 언제든지 후딱 일어서고 싶다. 떠남은 언제나 옳았다. 서른과 마흔의 시간이 주었던 여행과는 사뭇 다른, 쉰과 함께 떠난 여행도 가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체력은 내가 만든 현실의 한계였다. 시루섬에서 불어 온 바람이 이제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나는 오늘도 바람의 소식을 기다린다.



*시루섬-증도 생김새가 시루를 닮았다 하여 시루섬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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