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 한 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똥 Oct 17. 2024

지렁이


신나는 토요일이어야 하잖아요

너무 열심히 살았나 봐요

입 안이 헐고 편도선까지 부으니 열이 나기도 하네요

오전 내내 자고 일어나면 거뜬할 줄 알았는데

아, 이젠 머리까지 아파요

타이레놀을 먹고 집을 나섰죠

하삼동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중산지로 향해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신을 벗고 맨발로 걷기로 해요

흙길을 걷는 건 처음이라 발바닥이  조금 아파요

덕분에 천천히 걸으며 풀밭에 가득한 클로버를 들여다봐요

벌써 네 개나 발견했어요, 네 잎 클로버를 말이에요

중산지를 걷다가

나처럼 느릿느릿 꿈틀꿈틀, 지렁이를 만났어요

내 발은 240mm, 지렁이는 그보다 2배는 더 길었는데 지나온 길이 구불구불 땅에 그려져 있었어요

쉬지도 않고 기어왔을텐데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아요

꾸역꾸역 가는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나서,

한 치 앞도 모르고 먹고 자고 싸는 내 인생이 바로 저기 기어가는 것 같아서

마른 땅을 기어가다 지렁이의 뱃가죽이 빵구가 날까 봐 가는 길에 남은 커피를 몽땅 뿌려 주었죠

흠칫 놀라는 지렁이,

그러나 다시 길을 가는 지렁이처럼

나도 다시 중산지를 걸어가요

팔을 흔들 때마다 빈 플라스틱 커피잔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꾸역꾸역 걸어가요

어쩌겠어요, 우리는 모두 지렁이의 生을 사는 중이잖아요

매거진의 이전글 칠월의 능소화는 지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