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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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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Oct 17. 2024

칠월의 능소화는 지고


칠월은 내내 장마였다

유월의  담장을 기웃거리던 능소화가 막 꽃잎을 펼치기 시작할 무렵

조숙한 망울들이 서둘러 세상에 빛나기 시작할 무렵

하늘은 굵은 빗금을 허공에 마구 그어댔다

가끔 빗금 안에서

또 빗금 위에서

나는 칠월을 마중하는 것이 좋았다

눅눅한 시절에 환한 꽃잎을 스쳐 지나는 것은 모두 아름다웠다


한 달, 보름달이 떴다가 지는 시간

능소화가 빗금의 무게로 칠월을 잃어버렸을 때도

나는 초록잎과 넝쿨이 무성한 담장을 바라보며 꽃을 추억했다

기다린 만큼 세월을 건너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

너를 만난 짧은 칠월도 내겐 고마운 시절이었어


팔월이 건너왔다

한반도의 중부로 장마가 건너가고

하늘이 다시 태양을 품기 시작하자

칠월에 숨어 있었던 것들이 삐죽삐죽

여름을 뚫고 나왔다

마치 나를 위한 세레나데처럼

하루에 한 송이, 그리고 두 송이

팝콘처럼 터져버린 망울들이

주홍빛 꽃잎으로 담장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눅눅한 마음이 반짝반짝 빛났다

꿉꿉한 생각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빗금 속에 잠든 능소화가

팔월의 담장에 다시 화사한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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