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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Mar 08. 2024

[단편 소설] 치약

지쳤다면, 잠시 짜는 걸 멈춰요.


그날 아침.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려던 A는 문득 짜려던 치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빵빵하게 가득 채워져 있던 새 치약은 매일 아침 온몸을 비틀며 내면에 있던 치약을 토해낸 탓에, 옆구리가 터져버리고 만 흉물스러운 몰골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처음엔 원대한 꿈을 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온갖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토해내다 마침내 고갈되어 버린 A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꼭 닮은 치약을, A는 마치 고약한 심보로 끝까지 볼장을 보려는 사람처럼 매일같이 괴롭혀댔다. 그것도 깔끔한 성격 탓에 하루에 세 번씩이나!


*


이제 막 케이스 밖으로 나온 치약은, 처음에는 달콤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사람들의 입안을 상쾌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어!' 그래서 치약은 행복했다. 누가 뭐래도 치약은 자신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치약은 꽤나 자존감이 높은 편에 속했다. 그래서 매번 칫솔이 자신에게 대책 없이 얼굴을 들이밀 때, 때로는 칫솔모 사이에 끼어 있는 불순물을 마주해야 했을 때에도, 두 눈을 꼭 감고 묵묵히 자신의 모든 것을 조금씩 내어주었다. 그는 무자비한 짓눌림에도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 치약이 처음 충격을 받은 것은 주인이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긴다고 느꼈을 때였다. 어느 날엔가 샤워를 끝낸 주인이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 한 구석에 두었는데 다음 날엔가 자신을 잠시 찾는가 싶더니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치약을 꺼내 이를 닦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치약은 애타게 주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앙상해질대로 앙상해진 몸에선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주 미약한 치약만이 입밖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치약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주인이 다시 자신을 찾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주인은 치약을 찾지 않았다. 이미 새로운 치약이 자신이 늘 놓여 있던 자리에서 '아직은' 통통한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도 치약은 주인을 기다렸다. 사실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치약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치약은 스스로를 믿었다. 자신은 일주일 동안은 너끈히 주인의 입안을 개운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을 주인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주인은 치약을 찾지 않았다. 몇 달의 시간이 흘러서야 주인은 화장실의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치약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주인의 손길이 치약은 무척이나 그리웠다. 주인은 '이게 왜 여기 있지?'라고 말한 뒤 치약을 발끝부터 얼굴까지 가차없이 끌어올렸다. 하지만 몇 달간 방치된 탓에 말라버린 치약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치약은 주인이 자신을 포기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인은 치약을 몇 차례고 거꾸로 쓰다듬은 뒤, 마지막 남은 치약을 있는 힘껏 짜내 손가락 위에 덜었다. 치약은 곧 자신의 주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지만 상관 없었다. 애매한 채로 방치되어 있는것보다 영광스러운 죽음이 차라리 낫다고 여겨졌다.


주인은 자신의 손가락에 묻어난 미약한 치약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은반지를 빼내어 문질렀다. 소량의 치약은 퀘퀘한 은반지를 다시 빛나게 만들었다. 치약은 뿌듯했다. 은반지를 닦는 것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낸 일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은반지는 다시 반짝이며 주인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치약은 물줄기 속에서 거품이 되어 사라지며 마침내 미소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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