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세계를 쌓는 것은 이토록 고되다
그대들은 어쩌려고 이러는가, 그대들은 어찌할 것인가 등 카더가든 못지않은 다양한 이름을 가진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왔다. 감독이 7년을 들여 만들었다는 애니메이션은 다소 독특한 스토리텔링으로 한 소년의 내면적 성장을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다. 난해하다는 평이 많은 가운데 나의 시선에서의 해석을 적어본다. 자세한 영화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 관람 후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영화의 시작, 마히토는 불길을 향해 달린다.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병원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화마로 가득한 거리에서 엄마를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가는 마히토.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간절하고 공포스러운 마음으로 내달린다. 울부짖음 끝에 엄마가 있길 바라며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히토의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엄마의 여동생인 나츠코가 아버지와 재혼하며 새엄마로 오게 된다. 엄마의 죽음을 제대로 소화시키기도 전에, 이모이자 새엄마가 된 나츠코 그리고 나츠코 뱃속에서 태동하는 자신의 이복동생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은 어린 소년 삶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은 어른도 버티기 어려울 듯)
엄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인 새엄마이자 이모를 부정하고 싶은 감정, 아빠에 대한 미움, 그리고 낯선 환경과 전쟁의 상황. 그 모든 것이 어린 마히토를 짓누르고 그 고통은 분노가 되어 돌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쳐 피를 쏟는다. 버틸 수 없는 심리적 부담과 양가감정이 충동적으로 나타나면서 자신을 해하게 된 것이다. 자해는 심리적 고통에 대한 일시적 해방이자 어린 마히토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감정 표출이었다.
새로운 집에 이사 온 첫날부터 마히토는 왜가리에게 꺼림칙한 위협을 느낀다. 그가 돌로 머리를 내리친 이후부터 왜가리는 더 적극적으로 마히토에게 다가와 도발하기 시작하고, 심지어 마히토의 엄마가 살아 있다고 자신을 따라오라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섬뜩하고도 의심스러운 왜가리를 없애기 위해 마히토는 직접 활까지 만들며 왜가리가 안내하는 성으로 들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왜가리는 어쩌면 마히토가 만들어 낸 잔인한 희망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의 도피, 어딘가에 사실은 엄마가 살아 있을 거라며, 엄마의 시신을 본 적도 없는데 사실 이 모든 게 거짓이 아닐까 엄마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히토. 헛된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는 마히토의 자아가 흔들리며 파괴적인 세계로 그를 이끌게 된다.
성은 파괴의 세계다. 그곳은 마히토가 만든 허상의 세계로 허무와 상실과 싸워가며 마히토 스스로가 성장을 이뤄내는 내면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악이라고 생각했던 팰리컨들을 이해하게 되고 인간을 잡아먹는 앵무새들을 헤쳐서 잃어버렸던 나츠코를 만나게 되는데, 현실에서는 미처 꺼내기 어려웠던 '엄마'라는 단어로 나츠코를 부르게 된다. 마히토가 새엄마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그 고통과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지브리 특유의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생생히 그려낸 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츠코는 새로운 세계에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린 시절 모습의 엄마를 만나 자신을 해하던 파괴적 사고들을 하나씩 탈피하고 상황과 문제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끝, 나츠코의 손을 잡은 채 현실 세계로의 문을 열며 어린 시절 모습을 한 자신의 엄마와 작별인사를 하며 의젓하게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마히토의 모습을 끝으로 파괴의 세계는 무너지게 된다.
성 안에서 큰 할아버지는 나무 블록을 하나씩 쌓아 올려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 작은 탑이 얼마나 견고할지 금방 무너지지는 않을지 톡톡 건드려보며 말이다.
허무와 우울, 상실은 위태롭다.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일지도. 어쩔 때는 높아진 탑을 올려다보며 이제 드디어 나만의 탑을 쌓았구나, 나도 드디어 견고한 사람이 되었어 안심해 보지만 가벼운 조각들로 쌓아 올린 탑은 쉽게 무너진다.
큰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이 세계를 이어받으라 권한다. 순수의 블록들을 가져왔으니 네가 다시 탑을 쌓아보라고. 마히토는 자신이 만든 흉터를 만지며, 이 흉터는 악의의 흉터라며 자신은 탑을 쌓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더 단단한 내면을 기르고 파괴로서 자신을 쌓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는 아니었을지, 때론 덤덤하고 망설이지 않는 용기로 자신을 괴롭혔던 혼란들로부터 묵묵히 자신을 지켜냈다.
한 세계를 구축하고 파괴하고 또다시 쌓아가는 것은 이토록 고되다. 마히토가 깊은 수면으로 가라앉았듯 어떤 고통은 축축하게 먹먹하고 또 어떤 고통은 무표정처럼 덤덤하다.
그러나 그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온전히 이를 감내하고 겪어내는 것으로도 그것은 대견한 일이 된다. 마히토가 파괴의 성을 무너트리고 현실의 문을 당당히 열였던 것처럼, 자신을 지켜낸 우리는 어제보다 성장했을 것이다.
얼마 전 저 또한 여기저기서 부실공사였네 웅성거리듯,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모든 게 힘들어 물먹은 배게처럼 몸과 마음이 무거웠는데, 고통을 감내해 왔던 힘과 조금은 더 나아져보려 노력했던 미약한 의지 등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더니 조금은 나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고전적인 대사지만 알은 세계다,라는 데미안의 문장처럼 깨부수고 나올 수 있다는 걸,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그래도 계속 믿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