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이방인
아침은 아니었다. 일정을 짜는 문제로 아내는 마음이 상해 있었다. 이번 여행은 작년 여행과 달리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내는 프리스타일이어서 계획을 짜는 일에 부담을 느꼈다. 구글 맵으로 내비게이션을 찍어 돌아다니는 일에도. 아무리 그런 것들이 편리를 제공한다 해도 외국은 외국이었다. 일이 잘 풀리면 문제없지만 일이 잘 안 풀리면 대책 없는 건 사실이다. 오늘은 북쪽 해안을 훑기로 했다. 아내는 어디서 출발해, 어디, 어디를 찍고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에 가서 쇼핑을 한 뒤 점심과 저녁은 어디서 무엇을 먹기로 일정을 짰는데 그렇게 번호를 적으면서 정리한 종이를 잃어버렸다. 새벽 2시에 아내와 나는 숙소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종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종이는 다음 날 아들에 의해 발견된다. 스탠드가 설치된 침대 머리맡 탁자에 있었다고) 지금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다시 정리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강력한 감정의 지배를 받아 반드시 찾아야 했다. 조현아가 항공기를 돌려야 했던 것처럼 그걸 못 찾는 건 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아서. 아내에게 좌절감을 안긴 메모지 실종 사건이 하와이 3대 미스터리의 시작이었다.
4일 차, 2018년 2월 20일
① 라이에 포인트
② 선셋 비치
③ 와이메아 베이 비치 파크
④ 할레이바 비치 파크
⑤ 커피 갤러리
⑥ 99번 로드
⑦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 펫코
⑧ 쿠아 아이나 샌드위치 가게
⑨ 숙소 수영장
① 라이에 포인트
커피에 빵 같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왔다. 라이에 포인트는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데 있었다. 탁 트인 전망이 좋았다. 제주도 섭지코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 카메라보다 아내의 핸드폰으로 찍은 게 더 잘 나왔다. 파도가 부서지는 절벽을 내려다보면서 여기 빠지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행기를 쓰면서 검색해 보니 이곳 어딘가에 다이빙 포인트가 있다고. 미친…… 누군가 찍은 사진을 보니 그들은 파도가 달려와 절벽에 부딪치는 수면 어딘가에 대롱대롱 떠있었다.
사진 왼쪽 끝은 낚시 포인트.
바다를 생물이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인간이 정의한 '생물'이란 관념을 잠시 접어두면 바다처럼 맹렬한 생물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인류는 바다에서 기어 나왔다.
이런 어딘가에 다이빙 포인트가 있다니. 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 뒤 안 뛰어들 것이다. 누가 총구를 겨누지 않는 한.
② 선셋 비치
샌디 비치를 연상시키는 파도가 이어졌다. 괜찮은 해변이었다. 수영금지라는 푯말이 모래밭에 박혀 있었다. 그래도 하는 사람은 했다. 멀리 바다에 떠있는 인간들은 보드를 타는 거였다.
니콘 D5500 단조롭게 모드는 선셋 비치와 궁합이 잘 맞았다. 선예도(샤프니스)를 올린 거 말고 손댄 게 없는데 당시 경험한 해변의 느낌이 잘 묻어난다.
여행은 기본적으로 이방인 체험이다.
③ 와이메아 베이 비치 파크
아내가 검색한 결과에 따르면 와이메아 비치 파크에 주차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라고 했다. 하늘에 별을 딸 마음이 없는 우리는 그냥 지나칠까 했다. 하지만 지난 여행 때도 그런 사정을 감안해 건너뛴(북적거리는 데가 싫어) 북쪽 해안이었기 때문에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주차장 입구에 차가 한 대 멈춰 있었다.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차량으로 보였다. 마트 계산 줄도 그런 식이니까. 네 군데에서 계산을 한다고 했을 때 네 군데 중 한 군데에 서는 게 아니라 네 군데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한 줄로 서서 먼저 온 사람이 빈 곳을 찾아가는 방식.(물론 모든 줄 서기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들의 줄 서기 기본 양식이 그런 것 같다는 뜻이다.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매장의 줄 서기는 우리나라와 같다) 나는 그 차 뒤에 줄을 섰다. 눈치를 보니 몇 팀이 놀고 떠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내 차례를 기다렸다 빈자리에 주차했다. 아내 말로는 아침 일찍 와도 자리가 없다고 하는데 주차장을 백지일 때 점유하겠다는 건 하수의 논리다. 어딜 가든 용무를 보고 떠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믿음 하에 공략하는 게 고수의 논리.
장애인 주차 구역은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우리나라는 항상 값비싼 수입차가 차지하고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자본에 의한 차별은 있어도 장애에 의한 차별은 없는 것 같다.(우리나라는 자본에 의한 차별도 하고 장애에 의한 차별도 한다. 여자로 태어난 걸 차별하는 건 당연하고 요즘은 개를 기르는 것조차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차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사회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차별하는 정서의 반대편에 특혜 의식이 있다. 나는 너희와 같은 ‘일반인’이 아니기 때문에 특혜를 누리는 게 당연하다는. 이재용은 집행유예, 우병우는 영장 기각, 홍만표는 뇌물 받아도 된다는 판결이 모두 이 사람은 특별하다는 논리의 산물이다. 음주운전에 걸린 자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호통 치는 그것 말이다)
장애를 차별하지 않는 미국인들에게 가진 자들이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건 차별이 아닌 어떤 합리적 공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사고하는 방식이 다른 가장 현격한 차이가 총기 소유 아닐까? 총기에 의한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질 때마다(빈도가 늘고 그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데) 총기 소지를 금지하면 되는 거 아니냐 생각하지만 그들이 총기를 ‘소지’하는 건 주방에 ‘칼’을 두고 쓰는 것과 거의 같은 논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총기를 소지할 수 없다면 칼도 소유할 수 없다. 칼 없이 어떻게 요리하란 말인가?(총 없이 어떻게 지키란 말인가?) 사람이 무엇을 소지할 수 있고 없고 하는 문제는 ‘헌법’에서 다루게 될 텐데 개인의 자유 의지를 헌법의 가장 주요한 가치로 치는 미국이 ‘대량 살상의 위험’ 때문에 총기 소지를 금지할 일은 없어 보인다. 미국인들 스스로 헌법을 수정해 총기를 금지한다면 그때야말로 지구 상에 평화가 정착되는 출발점이 아닐까? 적어도 미국 침공에 의한, 미국 공작에 의한 3세계의 비극은 현저히 줄어들 것 같다. 총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다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포악한 자유니까.(총이 없는 자들은 빼앗(아)겨도 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장애인 주차 구역은 비워 두지만 언제든 학교에 쳐들어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쏴 죽일 수 있는.
해변은 좋았다. 왼쪽 끝에 다이빙 포인트가 있었다. 바닷물 색깔이 맑지 않았는데 이틀 전 내린 많은 비로 흙탕물이 유입돼 그런 것 같았다. 수영할 마음이 없었던 우리는 오래 있지 않았다.
서로가 이방인인 공간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공평할 수 있다.
선셋 비치 사진과 비교하면 색감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저 시커먼 바위가 다이빙 포인트 같다.
장애인 구역에 주차된 차는 장애인 것이 120프로 확실한 게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필요도 없이 하와이만 돌아다녀도 수많은 장애인을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없는 좋은 나라가 아니라 장애인이 돌아다닐 수 없는 불편한 나라다. 미국인들은 땅을 넓게 쓴다. 와이메아 비치 파크 이용자 수를 고려하면 주차장을 늘릴 법도 한데 그렇게 안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애인 주차 구역은 물론 사람만 이용하라고 흰색으로 빗금 친 구역까지 모조리 주차되었을 것이다.
거북이를 볼 수 있다는 라니아케아 비치는 포기했다. 갓길 주차를 해야 하는데 애니 타임 노 파킹 표지가 일정 간격으로 서있었다. 이용자들은 아랑 곳 않고 주차하는 분위기였다. 나중에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경찰이 딱지를 끊고 있었다.
④ 할레이바 비치 파크
주차장이 보여 바로 차를 대고 사진 몇 장만 찍었다. 백인 부부가 주차장 바로 앞 나무 그늘에서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가 주차를 하는 우리를 굉장히 의식했다. 마치 우리가 자기들만의 소중한 공간을 침입이라도 한 양. 많고 많은 주차 구역 중 하필이면 이곳에 대냐는 힐난일 수 있었다. 주차장은 퍼블릭이고 나는 라인 안에 반듯하게 주차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아내와 아들이 내리지 않고 사진을 찍기 좋은 포인트를 찾다 그리 된 거였다. 아내와 나는 그 여자가 미국인스럽지 않다고 평가했다.
할레이바 비치 파크가 좋다고 평가한 책이나 글은 본 적 없다. 명성 그대로다.
그래도 멋진 사진은 남길 수 있었다.
일정에도 없었고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거라 아내와 아들은 내리지도 않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⑤ 커피 갤러리
작년에 오고 또 왔는데 여전히 괜찮았다. 처음 왔을 때의 감동은 없었다. 이곳의 매력은 가격에 있다. 아들은 파인애플 주스, 아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카페라떼 투샷을 시켰는데 8불 냈다.
인형조차 낯설다.
1분 1초가 다 낯설다. 그 느낌이 너무 좋다.
⑥ 99번 로드
특정 지명이 아니라 말 그대로 99번 도로다. 바다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예쁜 도로였다. 이곳에 온 뒤로 경찰을 벌써 두 번이나 만났기 때문에 제한 속도를 칼 같이 지켰다. 뒤에 오는 차량이 바짝 붙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갓길에 세워 먼저 가게 해줄까? 의견을 냈는데 아내는 단호히 거절했다. 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냥 가라고. 그 의견에 따랐다. 나중에는 십여 대의 차량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갈 때 넋 놓고 바라보다 올 때 찍은 사진이다.
풍경이 별로라고 느낀다면 그건 아내가 찍었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느꼈다면 그건 내가 후보정을 잘해서.
⑦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 펫코
작년까지 합쳐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아무런 느낌도 없다. 설렘은 아내의 몫.
아들의 아디다스 바지를 반품하고 짐보리에서 친척 선물을 산 뒤 코치를 방문해 아내가 가방을 득템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아내가 색깔은 블랙에 사이즈는 얼마나 하고 형태는 이래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아들이 함께 찾아주었다.
아내는 세금 포함 156불에 샀다.
단돈 7달러. 아내를 따라 백화점 아동복 매장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 나는(욕을 하면서. 조그만 아이의 바지 한 벌이 12만 원을 훌쩍 넘겼다, 7년 전 가격이 그랬다) 단돈 7달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안다.
우리나라 백화점 매장에 매겨진 값이 살인적이라면 여기 매겨진 값은 천사? 웃기지 않은가? 자본주의의 메카에서 (자본주의적) 휴머니즘을 맛본다는 게? 이 맛 때문에 동남아를 못 간다.
차를 타고 펫코로 건너가 꽃개를 위한 시간을 가졌다. 사진을 찍고 창밖을 구경하던 나는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유독 파란 차에서 내린 사람이 펫코를 방문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파란 슈퍼맨 셔츠를 입고 파란 픽업트럭에서 내려 이곳을 찾기도 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파란색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걸까? 우리 집 차도 파란색은 아니지만 남색인데.
상품 가짓수 봐라.
이 맛에 다른 데를 못 간다.
아내는 펫코에서 장갑 하나를 득템했다. 트루터치 펫 글러브 브러쉬라던가. 우리나라에는 유사한 상품만 돌아다닌다며 오리지널로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둥이네를 줬다.
장갑을 낀 손으로 털을 벗긴다고 생각하면 된다.
웰시코기는 털이 1년에 몇 번 빠지는지 궁금하다면 여기
펫코 건물 옆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말리사다 도넛을 사 먹었다.
빨간 줄무늬가 레오나드 베이커리 푸드 트럭.
안에 잼이 없는 오리지널 도넛을 식은 뒤 먹으면 맛없다.
12개가 든 한 다스를 샀는데 절반 가까이 못 먹고 남겼다.
⑧ 쿠아 아이나 샌드위치 가게
저녁은 쿠아 아이나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아내와 아들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파인애플 햄버거를 먹고 나는 아보카도를 시도했다.(나이가 들면 몸에 좋다는 말에 반응한다)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두께여서 아보카도만 따로 빼서 먹었다. 아보카도 한 입 먹고 햄버거 한 입 먹는 식으로. 아보카도는 그렇게 느끼한 맛은 아니고, 그냥 맹탕이란 느낌이었다. 제대로 즐겼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와 아들도 작년만큼 감동적이지는 않다고. 역시 맛은 객관화된 데이터보다 주관적 경험일 가능성이 높다. 음료 3잔에 아보카도 버거 스몰, 파인애플 버거 스몰, 파이애플 버거 빅 사이즈를 시켰더니 38.6불 나왔다.
그래도 여전히 고급스러운 햄버거.(라기보다는 샌드위치)
이게 스몰 사이즈. 젠장. 자기들도 조립 안 되는 거 아니까 포개서 안 준다.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아니,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
훌쩍 커버린 아들에게서 낯선 남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햄버거 안에 든 패티의 재료는 추억이 아니었을까.
⑨ 숙소 수영장
긴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수영장에서 놀았다. 피로를 풀었다.
코트야드 바이 매리어트 오아후 노스쇼어 수영장은 괜찮았다.
오른쪽 작은 원이 자쿠지인데 터틀 베이 리조트보다 면적도 넓고 수온도 뜨거웠다. 시설은 모르겠지만 주변 여건은 터틀 베이 리조트보다 코트야드 바이 매리어트 오아후 노스쇼어가 훨씬 나았다. 하와이 오아후 섬에 숙소가 딱 두 개밖에 없다면 우리는 무조건 코트야드 바이 매리어트다.
그렇다고 해서 코트야드 바이 매리어트 오아후 노스쇼어가 절대적으로 좋다는 뜻은 아니다. 3성급 호텔인데 그보다 못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다만 터틀 베이 리조트를 갈 바에야 여길 오겠다는 거다. 내가 입은 위아래 수영복은 모두 하와이에서 산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산 것보다 훨씬 훌륭한 품질을 자랑한다. 값도 싸고. 일단 수영복 변색이 없고 배수 효과가 탁월하다. 몸에 붙는 감도 좋고. 하와이에 놀러 갈 생각이고 수영을 즐길 작정인데 가지고 있는 수영복이 애매하다면 국내에서 판매되는 상품보다 하와이에서 판매되는 상품을 권하겠다.
전리품.
하루에 한 번씩 부지런히 사진을 정리했다.
나중에 리뷰하겠지만 방이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