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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CON Mar 24. 2018

비정규 하와이 여행기 09 악마의 발톱Ⅰ

가장 후회되는 풍경이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기도 하다.


 2일 차, 2018년 2월 18일   

   

 ① 알라모 렌터카   

 ② 노드스트롬 랙 워드 빌리지 점   

 ③ 브릭 오븐 피자 TJ 맥스 점   

 ④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   

 ⑤ 도로 통제   

 ⑥ 악마의 발톱   

    


    

 ① 알라모 렌터카   



10시에 일어났다. 어제 푸드랜드에서 산 파운드케이크는 커피랑 먹기 딱 좋았다.   



커튼을 연 창밖엔 비가 왔다. 일주일 전부터 아내는 하와이 날씨를 체크했다. 우리가 체류하는 열흘간 비가 온다는 예보였다. 아쉽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비가 와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닛산 알티마는 시동이 안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디스플레이 창에 뜬 그림으로 봐서는 버튼 방식 시동키의 문제 같았다. 됐다 안 됐다 하는 건 랜덤으로 제공되는 기능이 아니라 고장이다. 디지털 (혹은 그런 것처럼 포장된) 세계의 취약점.   

우리 아파트는 교통카드로 결제되는 음식물 수거함을 갖다 놨다. 앞면을 대면 정상 처리되는데 뒷면을 대면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음성 안내가 나온다. 버스에 오르는 교통카드 이용자는 카드를 대지, 카드의 앞면을 대는 게 아니다. 뒷면을 대는 게 문제라면 ‘카드의 앞면을 대 주세요’라고 알려주면 된다.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배격이 아니라.   

알라모 렌터카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분리돼 있다. 입구에는 타이어로 밟으면 사라지는 칼날이 바닥에 상어 이빨처럼 설치돼 있다. 들어갈 때는 밟혀서 고개를 숙이지만 역방향으로 나갈 때는 바짝 선 칼날이 타이어를 뚫어버린다.   

구글 맵을 이용할 때 혼선을 빚은 것도 알라모 렌터카의 입구와 출구를 반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로 표방되는) 구글이라고 오류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직원에게 시동이 안 걸릴 때 알티마가 보여준 메시지를 핸드폰으로 찍어 보여줬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터리가 다 된 거라고. 대기 차량이 있는 데로 가서 골라가라고 했다. 차량 교체는 귀찮은 일이지만 다른 차로 바꿔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아내는 돈을 더 낼 테니 SUV로 바꿔 갈 수 있냐고 물었다. 직원의 대답은?   

놉.   

‘노’도 아니고 ‘놉’이다. 절대 안 되니 다시는 그 주제를 논하지 말라는 경고. 아내는 무안했고 나는 낄낄거렸다.  마침 알라모 렌터카엔 우리밖에 없었다. 비행기 떨어지는 시간과 겹치지 않은 것이다. 십여 대의 차량에 앉아봤다. 나는 운전석에, 아내는 동승석에, 아들은 뒷좌석에.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냄새가 나, 미국인 냄새가 나서 싫어. 알티마는 물론 말리부와 캠리에도 타봤다. 현대 쏘나타도 타봤는데 아들은 앉자마자 진짜 넓다고 평했다.   

십여 대에 앉아보고도 결정을 못 내리는 나를 지켜본 아내는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직원이 세차를 끝낸 차량 한 대를 끌고 왔다. 캠리였는데 기존에 탄 캠리와 모양새가 조금 달랐다. 올, 이번에 새로 나온 캠리?

 
도요타 캠리 초간단 시승기는 여기   


알라모 렌터카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노드스트롬 랙 워드 빌리지 점으로 갔다.   




 ② 노드스트롬 랙 워드 빌리지 점   



이번 여행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장소인 노드스트롬 랙은 노드스트롬 백화점에서 하자가 발견된 물건을 싸게 파는 쇼핑점이다.




아들이 나이키 조던 GRIND를 60불에 득템했다.



수영복은 28불.



배가 고팠다.

   



 ③ 브릭 오븐 피자 TJ 맥스 점



딱히 준비된 맛집 정보가 없어(그렇게 많은 정보를 접하고 와도 막상 현장에 오면 돌발 변수가 많아 알아둔 대로 이용하기 쉽지 않다) 눈에 띄는 피자집에 갔다.



하와이안 비비큐 치킨과 스모크 앤 파인애플을 반씩(하프 앤 하프) 시켰다. 별 기대를 안 하고 먹었는데 배가 고팠던 탓인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들은 별 4개를 줬다. 32불 정도 나왔는데 피자 값보다 한 잔에 3.5불씩 받는 콜라가 더 비싸게 느껴졌다. 3분의 1 정도 남아 포장해 갔다. 아내와 아들을 엘리베이터 입구에 두고 나 혼자 차에 두러 갔는데 이 조그만 틈으로 사고가 발생했다.   

내 차는 2007년 11월에 생산된 아반떼다. 이번에 렌트한 도요타 캠리는 2018년 식. 트렁크를 어떻게 열지? 뒷좌석에 두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피자 냄새가 차에 배는 게 싫었다. 트렁크 뚜껑이 열리는 걸 감안해 바닥에 두면 문제없긴 했다. 나는 식구가 먹을 음식을 주차장 바닥에 내려놓는 게 내키지 않았다. 바닥에 감도는 미세먼지나 배기가스, 중금속 따위가 피자로 스며들면…… 자동차 지붕에 올려놓기엔 차체가 길고 미끈해 너무 멀었다. 아반떼 트렁크는 잠금장치가 딸깍 해제되고 만다. 대개의 트렁크가 그럴 것이다. 끝까지 자동으로 열어주는 옵션이 달려있지 않은 한. 렌터카에 그 옵션이 왜 있는 거야?   

유압식 장비가 로봇의 팔처럼 길어져 트렁크 뚜껑을 끝까지 열었다. 피자가 뒤 유리창에 짓눌려 납작해질 때까지.



화면 밖에서 보면 시트콤이지만(이 글을 쓰는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당시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이거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이 지랄이라니. 아빠가 늦게 오는 것에 걱정이 된 아들이 와서 무슨 일이냐며 도왔다. 아들 덕에 그나마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내는 빵 터졌다. 트렁크 뚜껑에 눌린 피자는 무사히 도착한 숙소에서 저녁으로 맛있게 먹었다.



   

 ④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   



목적지까지는 잘 간다. 주차장에 진입하는 미세 조종 때 약간의 판단 착오와 주차하려는 차들이 밀린 걸 보고 한 차례 유턴을 했다. 다음은 역주행.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 주차장은 일방통행으로 설계돼 있다. 미국의 주차장이 대개 그런 방식일 것이다. 비가 내리고 차들이 밀려 빨리 하자는 생각에 성급히 군 게 화근이었다.(피자를 뒤 유리창에 처박은 사건도 머릿속을 맴돌고) 현지 여성이 창문을 내리고 한 마디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였지만 부끄러웠다. 역주행이란 걸 알고 한 건 아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아내와 아들을 먼저 내려주고 빈자리를 찾다 벌어진 일이었다.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다. 아디다스 매장에서 아들 바지를 두 벌 샀는데 나중에 숙소에서 입어보고 환불을 결심했다. 품질이 별로고 사이즈도 안 맞았다. 작년에 갔던 그 화장실에서 차례를 한참 기다린 뒤 오줌을 눴다.   

아내는 키플링에서 하와이 한정판 가방을 41불에 득템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만든 에코백은 안녕~




 ⑤ 도로 통제   

 
하와이에서 운전하는 게 별 문제가 없는 건 맞지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운전대를 잡은 나나 옆에서 구글 맵을 관장하는 아내나. 그래도 작년에 와이키키 도심을 빠져나가는 뒷골목 어딘가에 차를 세워두고 절망했을 때에 비하면 우리는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하와이 뒷골목에서의 비애는 여기   

 
연타로 어퍼컷을 맞은 뒤였기 때문에(피자를 뒤 유리창에 처박고 주차장에서는 똑바로 하라는 지적을 받아) 얼얼한 기분이긴 했다. 비를 퍼부은 하늘은 까맸다. 도심을 빠져나와 동부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제주도 해안도로처럼 한 길만 쭉 따라가면 됐다.

“거의 다 왔네. 별일 없겠지?”   

“정말? 내비(신경) 꺼도 돼?”   

“이 길만 쭉 따라가다 왼편에 건물 나오면 끝이야. 다 왔어.”   

“정말이지?”   

우리는 서로를 잘 믿지 않으며 그 점을 공공연히 밝힌다.(안 믿으니까 똑바로 하라고) 몇 번 확답을 받은 뒤에야 아내는 네비를 껐다. 와이파이 에그에 연결된 상태라 SNS에 접속해 꽃개가 잘 있나 확인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는 (디지털) 세계다.


   

몇 분 되지도 않았다. 고개 하나를 넘어가자 멀리 경찰차가 보였다. 길을 멀리 내다볼수록 정보량이 늘어 안전사고에 대응하기 쉽다. 스피드 단속일 수 있지만 많은 비가 내린 걸 감안하면 빗길 미끄러짐 사고가 발생한 걸 수도 있었다. 숙소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20여 킬로미터.



경찰차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창문을 내리자 경찰관이 다가와 도로가 끊겼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워떠…….   

머릿속에 U자 형태로 돌아가는 경로가 자동으로 그려졌다. 경찰차가 도로를 막았다. 그 방법밖에 없다. 그 길조차 끊기기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아내는 숙소가 바로 앞이라고 어필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앞을 달렸던 몇몇 차는 경찰이 틀어막은 옆에 있는 맥도날드 주차장으로 갔다. 언제까지 통제하느냐고 묻자 경찰은 모른다고 했다. 오늘 아침 나는 닛산 차량을 교환하면서 기름값 120킬로미터를 아꼈다고 좋아했다. 조삼모사의 쓴맛을 이렇게도 볼 수 있……. 



아내는 다시 구글 맵을 켰다. 섬의 중심을 U자 형태로 돌아가야 해 숙소를 목적지로 찍으면 안 됐다. 구글은 도로가 끊긴 정보를 업데이트하지 않았다.(나중에는 업데이트했을지 몰라도) 우리는 파인애플 생산지로 유명한 돌 농장을 목적지로 찍었다.




 ⑥ 악마의 발톱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터널 앞에서 장엄한 광경을 목격했다. 장벽처럼 서있는 산의 패인 골을 따라 가느다란 폭포가 떨어지는데 열두 개도 넘었다. 날 좋을 때 봤을 때는 왜 골이 파였나 몰랐는데 실처럼 가느다란 폭포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바로 이해했다.   


이건 다른 날 찍은 건데 가로등 위쪽으로 폭포 한 줄기가 보인다. 우리가 본 건 산의 정상에서 떨어지는 십수 개의 폭포였다.


안전한 데가 있으면 삼각대를 설치해 사진을 찍고 싶을 정도로 웅대한 광경이었다.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시도해봤을 것 같다. 도로가 끊길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니까. 삼각대는 없지만 차 안에서 최대한 화각을 벌려…… 아내와 아들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었다. 고속도로 교통사고의 주요 원인이 갓길 주차다.

돌 농장을 지나고 할레이바를 지났다. 터틀 베이를 지나 동부 해안도로를 타고 남하하는데 꽤 긴장했다. 도로에 물웅덩이가 넓고 깊게 형성돼 간간이 수상스키를 타야 했다. 20분이면 가는 데를 2시간을 달린 끝에 겨우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하와이 로컬 뉴스를 통해 일부 지역이 물에 잠긴 사실을 확인했다. 도로가 끊긴 지점 같았다. 물길에 휩쓸린 차량 탑승자가 무사히 구조됐다는 뉴스도 있었다.   

경찰은 자기 할 일을 정확히 했다.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내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접한 적 없는 물난리를 이역만리에서 접했다. 아내는 문을 삼중으로 잠근 뒤 잠을 청했다.






비정규 하와이 여행기 3일 차, 라니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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