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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CON Jun 13. 2017

정신없는 하와이 여행 16 하와이 뒷골목에서의 비애

닛산 무라노의 저주 너머에 하와이가 넘실거렸다.


닛산 무라노는 이렇게 생긴 차다.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 주차장에서 찍은 사진인데 언뜻 보면 QM3를 닮았다.



하지만 닛산 무라노의 제원은 중대형급으로 분류 가능한 빅 사이즈 SUV.


축거는 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휠베이스를 말한다. 앞바퀴 중심축과 뒷바퀴 중심축 사이의 거리.


우리가 국내에서 예약한 차는 도요타 라브4였다.



렌터카를 예약할 땐 항상 스포츠카부터 시작한다.



이왕 빌리는 거 기분 좀 내자고.

가격을 보고 마음을 바꾼다.


캐리어만 기본 3개인데 트렁크가 많이 부족해 보이네?

대형 세단에서 중형 세단, 대형 SUV에서 중형 SUV...

점점 밑으로 내려간 스크롤이 마침내 멈추는 곳은,



빌어먹을 이 뻔한 세상

이를 꽉 깨물고 현대기아차를 제외시켰다.

10년째 탄 세단도 제외.

국내에 굴러다니는 쉐보레 라인업을 제외시키자 일본차 SUV만 남았다.

그중에 할 수 없이 고른 차가 도요타 라브4였다.

공도에 다니는 라브4를 보면 아내한테 반드시 손짓해 가르쳐줬다.


우리가 하와이에서 타게 될 차야.
작은데?

8박 일정의 3인 가족 짐을 고려하면 큰 차는 분명 아니었다.

내비게이션(미국에서는 GPS라고 한다)이 옵션이었는데 선택하지 않았다.

Wi-Fi 에그를 빌려 아내의 스마트폰으로 구글맵을 이용하면 충분할 거라는 판단에.

나는 아직 내비게이션을 구입한 적이 없다.


안드로이드의 친절한 무선 관계에 데뷔한, 갤럭시 탭S3 리뷰는 여기


모르는 데를 갈 때는 전날 네이버지도를 방문해 주요 정보를 메모지에 필기한 뒤 그것에 의지해 갔다.

한 방에 잘 갈 때도 있지만 주요 지점에서 어긋난 선택을 해, 유턴하거나, 다른 길로 돌아갈 때도 많다.

그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는데, 전혀 그럴 일이 아니다.

GPS 기술이 상용화되기 전에는 내비게이션이란 물건 자체가 없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운전을 해서 모르는 데를 찾아갔다.

도로에 제공된 정보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에는 무수한 표지판이 달려있고, (길바닥을 포함한) 거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정보가 제공된다.

내비게이션이 보급돼 거기에 의존한 운전자들이 그 능력을 상실한 것일 뿐.

나는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하와이 오아후 섬보다 1.2배 큰 제주도도 내비게이션 없이 잘만 돌아다녔는데 이까짓 코딱지 만한 섬이야 주요 도로 몇 가닥을 머릿속에 심고 거기서 미세하게 갈라지는 몇몇 간선 도로만 숙지하면 되겠지.

되겠지?


오늘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건물 입구에서 차를 인계할 거예요.

브로큰 엘리베이터.

여기서 모든 게 어긋나고 말았다.

액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차든 올라타자마자 바로 출발해 멋진 드라이빙 솜씨를 뽐내지만, 나는 시트 포지션부터 정확히 맞춰야 운전이 가능한 사람이다.

스티어링 휠을 기준으로 가장 편안한 시트 포지션을 잡은 뒤 거기에 맞춰 사이드미러를 조절하고 후방(룸)미러를 조절하는 절차를 반드시 밟아야 한다.

사이드미러의 경우엔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는 미세 조정을 거친다.

어떤 차는 달릴 때의 감각이 또 달라서, 달리는 중에도 신호 대기로 멈추면 그 틈을 이용해 사이드미러를 조정한다.

그리고 자동차를 다루는 주요 기능을 숙지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아내에게 내가 고지한 시간은 30분이었다.

최소 30분은 주차장에서, 차의 기능을 숙지하고 나한테 맞게 세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이런 게 안 된 상태에서도 액션 영화배우처럼 차를 몰 수 있기는 하다.

경운기를 모는 것처럼 어색해서 그렇지.

도요타 라브4를 예상했는데, 직원이 타라고 가리킨 차가 닛산 무라노여서 일단은 기뻤다.

차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준 거니까.

하지만 차는 건물의 지상 주차장에서 도로로 나오는 출구에 대기 상태로 있었다.

짐을 싣고 바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트렁크를 여는 방법도 몰라, 차에서 내린 직원에게 열어 달라고 했다.

그가 나를 잠시 쳐다봤다.

열어 달라는 요구를 실어 달라는 요구로 착각해 내가 자기를 짐꾼 취급했다고 불쾌해한 것이다.

트렁크 공간이 운동장만큼 넓었다.

냉큼 짐을 싣고 운전석에 올랐다.


죽인다.

생소한 계기반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가 차를 인계받는 동안 주차장에서 나가려는 차들이 밀려있었다.

가속 페달이 발 끝에 겨우 닿았다.

직원은 키가 컸고, 나는 키가 작았다.

운전이 아니라 묘기였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정차할 때를 찾았다.

와이키키 도심에선 불법 주차를 꿈도 꾸지 말라는 여행책 내용이 나를 더욱 쫄게 만들었다.

단속 요원 입장에서는 '잠시 정차'나 불법 주차나 매한가지다.

구분할 방법이 없고, 나에겐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언어 능력이 없다.

발 끝으로 서는 발레리노처럼 토우 킥으로 차를 몰면서 어떻게든 잠시 정차할 공간을 찾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구글맵을 가동해 터틀 베이 리조트 경로를 탐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량 통행이 뜸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일단 시트 포지션부터 조절했다.

어떻게 조절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007년 11월식 아반떼.

나는 이 녀석만 10년째 타는 중이다.

그동안 많은 기술 발달이 이뤄져 요즘은 시동도 키를 꽂아 돌리는 방식이 아니라 스위치를 눌러 켠다.

(이것도 나에게는 굉장히 어색한 방식이었다)

엉덩이가 닿는 시트 왼편에서, 시트 포지션을 조정하는 단추를 세 개쯤 찾았다.

이리저리 눌러 대개의 방향은 찾았는데 희한하게 앞뒤로 움직이는 단추는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지도를 보던 아내가 당황해서 나처럼 시트 포지션 단추를 작동해봤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이런 구질구질한 내용까지 읽어야 하냐는 반론도 있겠으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니까) 그 단추는 맨 앞에, 가장 크게 있었다.

다만 다른 단추들과 달리 어느 한쪽을 눌러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두툼한 막대처럼 생긴 그것을 통째로 쥐고 앞으로 밀면 시트가 앞으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저속으로 달리면서 두어 차례 유턴을 하고 은밀한 장소에서 불법 정차를 해가며 겨우 그 문제를 해결하자(더웠기 때문에 에어컨 조절 방법도 익혀야 했다. 미국 차들은 섭씨가 아닌 화씨로 표기된다. 화씨가 더 좋다. 24도와 25도 사이에 많은 숫자가 배치돼, 에어컨 온도를 미세 조종하는 게 가능하다) 이번엔 구글맵이 말썽이었다.

아무리 봐도 구글맵의 빨간 점은 내 차의 현재 위치와 일치하지 않았다.

더 빨리 표기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빨간 점이 내 차보다 늦게 따라오는 경향이 있다고 봐야 했다.

결정적으로 구름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우리는 구글맵이 다리를 건너라는 것인지, 그 아래 도로로 가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리만 건너면 경로를 재설정하는데, 유턴을 해서 다리를 건너기 전 위치로 돌아오면 다시 다리를 건너라고 지시했다.

그 근처 어딘가, 통행 차량이 뜸한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무한대로 넓어진 오아후 섬을 저주했다.

더 충격적인 건 닛산 무라노에 내비게이션이 매립돼 있다는 점이다.

센터패시아에 삽입된 터치 스크린 조작 패널에 내비게이션 항목이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조작할 줄 안다면 아무 문제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 자식을 어떻게 다루는지 몰랐다.

지금도 거기에 대해선 다소간 화가 난다.

내비게이션의 쓸데없는 불편함에 대해 논문을 한 편 써내고 싶을 정도다.

우리에겐 터틀 베이 리조트 주소가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에게 주소 입력 창을 제공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소를 어디다 입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주도에서 경험한 일이긴 했다.

거기서는 내비게이션을 옵션 없이 그냥 제공했다.

그래도 나는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엔 호기심에 사용해보려 했는데, 같은 문제에 당면한 것이다.

우리에겐 펜션 이름과 주소가 있었지만 그 정보를 어디다 입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놨지?

구글이든 네이버든 접속하면 검색창이 있다.

내가 찾고 싶은 걸 입력하면 검색 결과가 제시된다.


내비게이션은 왜 그런 형식이면 안 되는 거지?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는 한적한 동네 뒷길이었다.

달러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11시에 체크아웃해서 11시 30분쯤 차량을 전달받고 두어 시간쯤 달리면 터틀 베이 리조트에 도착하겠지. 그러면 짐을 로비에 맡기고 노스 쇼어에 가서 점심이나 먹자. 차에 짐을 둔 채 점심을 먹는 건 위험하니까.

그 두어 시간 중 벌써 절반 가량이 흘렀는데 나는 여전히 와이키키 도심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앞으로 가야 할지 뒤로 가야 할지, 좌로 가야 할지 우로 가야 할 지조차 정할 수 없는 곳에서.

10초밖에 안 남은 시한폭탄을 든 사람처럼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내가 지금껏 하와이 여행을 다녀왔답시고 쓸데없이 긴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지만, 당신이 만약 하와이 여행을 가기로 하고, 렌터카를 빌리기로 했다면,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단 한 가지다.


내비게이션은 무조건 빌려라.

다시 출발했다.

시트 포지션도 해결되고, 그동안 차의 각종 기능을 다루는 법도 숙지했으므로 훨씬 편한 상태로 운전하는 것에 만족하며 이왕 이렇게 된 거 오아후 섬이나 실컷 구경하자는 기분으로 내키는 대로 갔다.

하와이 여행 책에 서술된 도로 교통 부분을 반복해서 읽은 탓인지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도로를 통제하는 정보가 영어로 표기돼 까막 눈이나 다름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쓰이는 몇몇 단어와 아라비아 숫자의 조합으로 어느 정도 그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마일로 표시된 거리나 속도를 km로 환산할 필요도 없다.

계기반이 마일로 표시돼 있기 때문에 스피드 리미트(제한속도)가 40이면 차량 속도계의 40에 바늘을 맞춰 운전하면 된다.

경로 탐색은 포기했지만 구글맵은 계속 켜두었기 때문에 우리가 섬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알았다.

아내 말에 따르면 나는 동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샌디 비치로 갔던 그 길에 올라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샌디 비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긴장된 근육을 풀었다.



쫓기는 심정을 털어내듯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았다.


이 도로를 타고 쭉 가면 될 거야. 제주도의 해안도로처럼.

애써 낙관적 견해를 밝혔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다시 방향을 튼 것은 구글맵을 지켜보는 아내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3시간쯤 더 걸린다는데.

순간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그어진 도로가 떠오르면서


그렇게 이동하기엔 너무 늦는 거 아니야(시간이 너무 귀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더 빠른 내륙을 관통하는 직선 도로를 타겠다고 덤비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우리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 뒤 다시 차에 올랐다.

나는 아내에게 (지도는 그만 봐도 될 것 같은데? 이 길만 쭉 따라가면 되니까. 다온 거나 마찬가지라니까?)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차에서 찍은 수평선이 엉망인 사진은 모두 아내가 찍었다.



웅장한 자연이 가깝게 느껴지는 풍광에







감탄하면서 잘 가다



이쯤 어딘가에서



'노스 쇼어'는 이쪽으로 가라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오, 그래?

나는 좋다고 그리로 빠져나갔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램프 구간처럼 차선을 크게 회전시키는 구간이었다.


PC로 보면 표지판 글자가 보인다.


응? 호놀룰루? 펄 하버(진주만)?

잘못 들어선 느낌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아내도 이상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잘못 든 게 거의 확실했다.



무지는 거리와 비례한다.

그것에 대해 모를수록, 그것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오, 마이, 곧.



경치는 참 좋은데, 또 틀렸네, 그지?

이럴 땐 침착하게 '다음' 표지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원하는 지명이 나오지 않으면 잘못 든 게 120프로 확실하므로 다음 교차로에서 유턴한다.

다행히 하와이의 고속도로는 유턴이 가능하다.

(아무 데서나 막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유턴이 가능한 교차로에서 유턴하면 된다)

우리나라처럼 (양옆을 막은) 유료가 아닌 무료라서 교차로가 나올 때가 있다.

도로 저 멀리 흐릿한 도심 너머로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다.

펄 하버가 보이는 데서 유턴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두어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겠지. 호텔 로비에 짐을 맡기고 노스 쇼어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차에 짐을 둔 채 점심을 먹는 건 위험하니까...

그 시간을 몽땅 허비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가족과 함께 차 안에 갇힌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날 몇 시간을 운전했는지 모른다.



나는 겸손하게 동쪽 해안 도로만 탔다.



이곳은 나중에 따로 차를 세워 촬영한 장소다.



쿠알로아 목장도 지나고



중국인 모자 섬도 지나


나무 뒤쪽으로 삼각형 섬이 보인다.


절경이라고 느꼈던 풍경 바로 밑을 지났다.



피아트500은 아내가 좋아하는 차.



이렇게 작은 차가 경차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게 헬조선의 함정



현지인이 노는 바다도 지나, 달리고 또 달려 마침내 도착한



카후쿠의 새우 트럭 집결지.

터틀 베이 리조트가 몇 km 안 남은 지점이어서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먹고 가자!

적당히 빈 곳에 주차한 뒤 아내와 아들을 보내고 나는 차를 지켰다.

도둑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조심하지 않아서 후회될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한테 카메라를 쥐어주며 아빠 대신 찍어오라고 하자, 아들은 비장한 각오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지오바니 새우 트럭을 찍고


여기서부터는 아들이 찍은 사진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새우 트럭을 찍고




닭을 찍는 동안



나는 닛산 무라노에 매립된 내비게이션과 사투를 벌였다.

나는 정말 그걸 쓰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영어에 까막 눈이라지만 21세기 IT강국에 살면서 내비게이션을 다루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을 텐데(시트의 전진과 후진을 조절하는 스위치처럼) 내가 무언가 사소한 실수로 놓치는 거라고 확신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전 메뉴를 고르게 탐색했다.

그 결과 이전 사용자가 방문한 위치가 저장된 페이지를 찾아냈다.


그래, 여기 어딘가에 터틀 베이가...

없었다.

하지만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 따위가 입력된 걸 보고 작은 희망을 느꼈다.


그래, 거기 갈 때는 이걸 누르면 되겠어.

반쯤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 즈음, 아내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지오바니에 줄을 섰는데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냥 한국인이 하는 새우를 사 왔다고.



배가 고팠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다.



클리어.


지오바니는 다음 기회에 이용하는 걸로 할까?
그래, 다음엔 내비게이션을 꼭 선택하자.


다행히 차가 보이는 데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도둑은 없었다.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않겠다.

우리 차 뒤의 스포차카는 젊은 남녀가 타고 왔는데 신혼여행을 온 부부처럼 보였다.

나는 차에 올라타 아내에게 내가 알아낸 내비게이션 기능을 알려줬다.

아내가 '잠깐만' 하더니 내가 들어간 어느 페이지의 '스펠' 항목을 눌렀다.

그 페이지에서 터틀 베이 리조트 주소를 입력하자 마침내 내비게이션이 부릉부릉 작동하더니 '경로를 안내'해주겠다는 멘트를 (영어로) 날렸다.



우리는 박근혜가 탄핵이라도 된 듯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때는 탄핵 인용 전이었다)

많은 영어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빠져나갔지만 롸이트, 레프트, 쓰리 헌드레드, 투 헌드레드, 원 헌드레드만 들으면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기본으로 제시되는 홈 화면에서 3번을 정확히 찍고 들어가야 한다.



내비게이션을 누르고



뉴 데스티네이션을 누르고



스트리트 어드레스를 누르고



스펠 네임을 눌러야 비로소 주소 입력 창과 마주할 수 있다.

다른 건 백날 눌러봐야 소용없어!

내 요구는 이거다.


그냥 구글처럼 내비게이션 누르면 바로 스펠 네임을 입력하는 창이 뜨게 설계하면 안 돼?

숙소로 돌아올 때는 홈 화면에서



프리비우스 데스티네이션을 누르면



이전 방문지 목록이 바로 떠 그중 하나를 골라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내가 닛산 무라노에 반한 기능은 따로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계기반에 연동된다.

운전 중 내비게이션을 안 봐도 용이한 길 찾기가 가능하다.

이 기능에 홀딱 반해 국내에 들어와, 닛산 무라노를 알아봤더니



꺼지라는데!



여행기 속 여행기 특별 부록 1


닛산 무라노 깜짝 시승기


닛산 무라노는 현대차로 치면 맥스크루즈급 SUV다.



전형적인 패밀리카로 실내 공간이 넓고, 트렁크도 넓다.

내가 탄 차는 렌터카 업체에 보급한 기본형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세세한 편의사양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2007년식 아반떼만 10년째 몰아온 운전자로서 몇 가지 말하자면, 일단 시야각이 넓어 개방된 느낌이 좋았다.

아반떼는 전방의 왼쪽에 위치한 필러가 두껍게 인식돼 그쪽으로 차를 돌릴 때마다 사각지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닛산 무라노는 크고 높은 차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각지대가 없는 듯 느껴졌다.

특히 폐쇄공포증이 있는 아내가 개방성을 까다롭게 따지는 편인데,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운전이 편했다.

제주도에서 탄 K5랑 크게 다른 점인데, K5를 밖에서 바라볼 땐 멋있고 좋다.

특히 처음 데뷔한 해의 K5는 안드로메다에서 수입한 차인 양 뽕빨나게 멋졌는데, 막상 제주도에서 탄 K5는 운전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차였다.

대시보드가 높게 설계된 탓인지 전방 시야가 좁아져 불편했고, 우레탄 재질에 문제가 있는지, 유리 코팅에 문제가 있는지 낮에 다니는 내내 전방 유리창에 비친 대시보드 무늬 때문에 눈이 쉽게 피로했다.

닛산 무라노는 운전이 굉장히 편한 차였다.

커다란 덩치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차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 건 디자인의 영향이다.

무단변속기인 것으로 아는데(처음 경험해보는 변속기였다) 좋았다.

이쯤 되면 세상 모든 자동차를 스포츠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기어 변속의 쾌감도 모르면서 무슨 시승기를 쓰냐는 식으로.

내가 시승기를 쓰게 된다면 꼭 지적하고 싶었던 내용이다.

공도는, 공공이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설계된 도로이고, 사람들이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는 건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하기 위함인데, 시승기는 왜 항상 "스포츠카"의 관점으로 쓴답니까?

왜 시승 차량을 타이어에 연기가 날 정도로 과격하게 몰아 성능을 테스트하나요?

그런 성능, 죽을 때까지 경험해볼 일 없는 사람이 90퍼센트 이상일 텐데.

포르셰나 페라리처럼 처음부터 스포츠 성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차라면 몰라도.

닛산 무라노는, 가족과 함께 캠핑이랄지, 여행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차로 보였다.



렌터카 업체에 제공된 차임에도 후방 카메라가 내비게이션에 연동돼 주차할 때 너무 편했다.

몇 가지 단점도 있다.

브레이크가 살짝 밀렸는데, 덩치가 커서 밀렸다고 이해해 주기에는, 내가 너무 살살 운전한 측면이 있다.

10년 된 아반떼지만, 격한 운전 때문에 한 친구는 뒷좌석에서 비명을 지른 적도 있지만, 브레이크는 잘 듣는 편이다.

내가 원하는 위치에 정확히 선다.

(내 차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반떼도 그러할 거란 주장은 아니다)

닛산 무라노를 과격하게 몰았을 경우 브레이크가 제대로 잡아줬을지 의문이다.

후진을 할 때 뒤로 굴리는 힘이 너무 약해, 가속페달을 밟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거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별 거 아닌 거 아니다.

주차할 때 후진 기어를 많이 쓰는데 차가 너무 안 나가 가속페달을 밟다 너무 빨리 튀어나가면 당황해서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수가 있다.

결정적으로 닛산 무라노는 일본 회사 차(라는 인식이 강하)다.

단순히 그렇게 정의 내릴 문제가 아니란 거는 알고 있다.

민족주의가 진보 진영에 몰리면 악의 축처럼 묘사돼 뼈도 못 추릴 때가 많다.

독립운동을 이끈 김구조차 이 프레임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을 두 개의 민족으로 놓고, 일본 민족이 대한민국 민족을 말살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이제 겨우 100년 밖에 안 지났는데 일본 민족 기업의 차를, 네가 그렇게 타고 다녀도 되는 거야?

라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다.

먼저 닛산은 일본 기업이 아니다.

르노가 먹었다.

그렇다고 르노가 프랑스 기업일까?

무라노는 모르겠지만 한 등급 밑의 SUV인 닛산 로그의 경우 부산 공장에서 생산해 전량 수출하기도 한다.

르노가 인수한 닛산의 라인업을 대한민국에서 생산하는 구조에서 민족주의가 설 자리를 잃는 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기계적 논리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라는 말을 이겨낼 수 없는 게 또한 사실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말이다.


저 새끼 저거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위한 온갖 좋은 말 다 같다 쓰면서 일본차를 타고 다니네.

특히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떠오른 요즘 같은 시기에 닛산 무라노가 일본 차라는 인식은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세금을 포함하면 6천만 원에 육박할 차값은 둘째치고 말이다.



 

여행기 속 여행기 특별 부록 2

 

복습


하와이 전쟁의 서막

하와이 책을 샀다

국제운전면허증은 면허증이 맞을까?

처음 만나는 하와이

하와이는 천국이 아니다

하와이 첫날밤

하와이 첫 해변

하와이 월마트에서 당한 의문의 1패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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