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구글로 미국 기업 사이트를 뒤졌다.
7월 5일 화요일.
진마켓이 열렸다.
(대한항공의 저가항공 브랜드인 진에어가 1년에 두 번 프로모션을 하는 날. 운 좋으면 헐값에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마침 약속이 있었던 지인도, 개가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취소해 이날을 별렀던 아내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목적지는 하와이, 날짜는 2월 말.
오전 10시, 장이 열리자마자 스마트폰은 장렬히 전사했다.
핸드폰 화면에 '날짜'가 보이지 않아 고를 수 없다는 거였다.
노트북으로 결제 창 공략을 계속했으나 2시간 가까이 '에러' 전사자만 속출했다.
'잘못된 접근'이라는 안내문이 나왔는데 동시접속자가 폭주해 '배 째라'라고 튕겨낸 게 아닐까.
나는 아내를 위로했다.
내가 자기였으면 일찌감치 폭발해 잔해만 남았을 거야.
엄살이 아니다.
확장성이 떨어지는 나는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진에어에 전화를 걸어 동시접속자 폭주를 '예견'해 서버를 미리 늘렸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하고도 남을 인간이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항의
아내는 해냈다.
'에러' 전사자들의 꼭대기에 올라가 40만 원대 티켓의 깃발을 꽂았다.
장하다! 대한의 딸!
진마켓 티켓은 아니고(전투 도중 원하는 날짜가 없어졌다고 한다) 슈퍼팩인가 하는 상품으로(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 취소하면 20만 원 상당의 수수료가 붙고, 포인트가 안 쌓이는 상품군인데 좋은 가격대에 나와 질렀다는 것이다.
장하다, 대한의 엄마!
아침 10시에 시작되는 전투를 위해 전날 커피도 포기한 여인의 집념이 낳은 쾌거였다.
7월 6일 수요일.
아내의 전투는 계속됐다.
나는 시장을 좀 더 지켜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아내는 쇠뿔도 단김에 뽑자는 주의였다.
호텔 티켓은 안개에 휩싸인 전투병이었다.
저기 있는 건 분명히 알겠는데 좀처럼 공략되지 않는.
생소한 영어 단어가 웹페이지에서 아내의 눈을 거쳐 내 귀로 전달됐다.
어메니티.(호텔 측이 제공하는 서비스 품목?)
익딜.(원하는 지역과 원하는 가격을 선택해 호텔 객실을 구매하는 방법?)
비딩.(원하는 호텔과 원하는 가격을 역경매 방식으로 구매하는 방법?)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검색 페이지 증가와 함께 진화를 거듭했다.
볼일을 마치고 저녁에 다시 본 아내는 구글로 미국 기업 홈페이지를 뒤지고 있었다.
인터넷은 네이버
였던 아내가 구글을 타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그렇게 한국의 인터넷 소비자들을 빼돌렸을 것이다.
이 친구들이 계발한 웹페이지 커뮤니티 시스템은 끝내준다)
밤 11시경, 마침내 아내는 쇠뿔을 뽑아버렸다.
와이키키 지역의 힐튼 하와이안 빌리지는 회원으로 가입해 '아너' 혜택을 받는 상품으로 지르고
노스 쇼어 지역의 터틀 베이 리조트는 익딜 방식으로 질렀다.
트럼프는 꺼져!
절대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힐튼 5박은 약 1800불.
터틀 베이 3박은 약 1000불.
(둘 다 리조트 피(추가 비용?), 세금 포함된 가격이고, 저 숫자보다 조금 보탠 값으로 이해하면 된다)
항공권은 3인 왕복으로 약 120만 원.
나는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를 자랑스럽게 안아주었다.
7월 7일 목요일.
이번엔 내가 전투에 나설 차례였다.
비가 그친 틈을 이용해 강남 교보타워로 떴다.
도서관에서 꾸준히 하와이 여행책을 빌려오긴 했으나 보다 확실한 정보의 최신판을 한 권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빅사이즈 서점은 언제 가도 천국이다.
여기 입고된 모든 지식이 내 것인 양 흡족해,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무단으로 읽는 이들도 너그럽게 동지 같다.
매끄러운 종이에 인쇄된 정보를 먹어치우는 그 기분, 나도 아니까.
여행 코너를 찾아 'ㄷ'자 모양으로 한 바퀴 돈 뒤 하와이 관련 책을 조졌다.
여행전문 출판사? 의 시리즈물이 대여섯 권 있고, 그게 다였다.
좀 더 개성 있는 하와이 안내서를 원했는데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 권을 정해, 사지는 않고 제목만 적어 왔다.
아내는 어이없어했는데 인터넷으로 사면 편도 버스 비 정도는 뽑아낼 수 있을 거라는 게
나의 외과수술적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왕 올라간 김에 평소 노려보고 있던 스피커를 청음 하러 갔다.
사실은 이 짓을 하러 강남에
오디오 회사 청음실은 교대역 근방에 있었다.
한 번에 제대로 찾아가 기분이 좋았다.
잠긴 문을 노크하자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미리 전화로 원하는 스피커를 말해두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리오나 루이스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와 'Run'을 들었다.
카리스마는 훌륭했고 다이렉트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하와이 여행과 카리스마 스피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나는 스피커를 고를 것이다.
지난 2월 '괌'에 놀러 가면서 해외여행의 재미에 눈을 뜨긴 했지만 여전히 나의 퍼스트는 여행이 아니다.
원하는 상품을 한 줄로 세워놓으면 여행은 한참 뒤로 밀려 중간쯤 속할 상품군이다.
어차피 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이란 (소비 행위를 앞둔 소비자는 계급과 상관없이 자본가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소비도 투자라는 측면에서) 다른 모든 걸 포기한 하나의 '선택'이나 '기회'이기 때문에, 이걸 선택하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하와이 여행과 스피커,
재규어와 볼보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해외여행이란 상품은 일단 '가질' 수 없다.
스피커는 한 번 사면 평생 쓰는 것도 가능하다.
방의 한 곳에 둬 음악을 들을 때나 전기가 들어가는 제품이 고장 날 일은 거의 없으니까.
작년 겨울에 간 '괌'은 환상적이었지만 그건 내 주머니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기억이 있고 그걸 체험했다는 정보가 있으며 하드디스크엔 수백 장의 사진이 저장돼 있지만 그걸 소유했다는 느낌은, 없다.
여행이란 상품이 후순위로 밀리는 두 번째 이유는 '신분 상승'과 관련 있다.
최소한의 경비로 떠나는 '배낭여행'은 논외로 쳐야겠지만 우리처럼 '안전'이 보장된 숙박 업소를 거점으로 한 여행은 자국의 노동자 신분에서 하루에 돈을 수백 달러씩 뿌리는 소비자(유사 자본가) 신분으로 상승한다.
그건 좋지.
그걸 싫어할 인간은 부처나 예수나 맑스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도 당연히 좋아한다.
진짜 좋다.
하루에 투자되는 달러를 시간 단위로 환산했을 때 떠오르는 값만 잊을 수 있다면.
그것들은 여행지에서 빠른 속도로 없어진다.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그걸 인식하며 여행을 즐길 여행자들은 없을 것이다.
하와이 현지 시각으로 새벽 5시쯤 일어나 노스 쇼어 지역의 해변으로 카메라를 들고나가 거북이와 별이 함께 찍힐 풍경 사진을 준비하는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피 같은 딸라가 시간 속으로 공중분해되고 있어
라고 중얼거린다면 미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개 본국의 공항으로 귀환해 청사를 빠져나갈 때 비로소 날아드는 파랑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현실주의적 감각?
노우우우우우우.
우, 울, 증.
여행지에 두고 온, 감각에 대한 그리움.
향수병이 시작된다.
우리가 '괌'에 만족하지 않고 '하와이'로 판을 벌린 것도 그런 심리의 연장선상이다.
카리스마는, 업어오면 한 몇 달은(환상이 실현되었다는 감각에) 무척 행복한 기분으로 음악을 듣겠지만 그 뒤론 조금씩 무뎌져 이내 평범해지고 말 것이다.
'여행'이란 상품은 마약처럼 강렬한 체험을 수반한 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찾아 떠나게 한다.
여행지는 항상 다음 여행지의 마케팅 부서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 권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여행 권하는 책을 낸 사람들 보면 되게 무책임해 보여.
돌아올 때의 충격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무조건 좋대, 무조건 가래.
강남으로 돌아와 버스 타는 데로 걷는데 '도를 아십니까'가 앞서 가는 사람을 붙들었다.
그냥 지나치자 이번엔 여자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저기, 아버님!
내가 왜 니 아버님이야?
모처럼 강남에 올라와 결혼도 안 해본 사람처럼 고개 빳빳이 들고 워킹 중인데.
동시-행인이 100명쯤 되는 그곳에서 정체가 확 발가벗겨진 느낌?
20대 시절엔 '아저씨'란 말로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하더니 이젠 '아버님'이란 말로 사람 마음을 뚝 떨어뜨리냐.
언제부턴가 어버이란 단어가 아주 싸구려가 돼버렸어.
그런 마음도 모름서 '도'를 논해?
무엇이 중헌 줄도 모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