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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CON Sep 07. 2016

정신없는 하와이 여행 02 하와이 책을 샀다

문화상품권으로 2시간 넘게 걸렸다.


아내는 해외여행을 좋아한다.

이 말엔 약간의 어패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해외여행을 좋아한다.

내가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새누리당처럼 '싫어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해외여행을 갈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회비용'이라고 하던가.

아내는 패키지여행 상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번 괌 여행 때도 아내는 스스로 일정을 잡고 숙소를 잡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정보들을 긁어모아 나와 아들을 서태평양 한복판에 떨어뜨렸다.


구글 지도 출처.


해외여행이라고는 제주도 4회 공략이 전부였던 나는(해외라는 말은, 바다 밖이란 뜻이니, 제주도도 포함시켰다) '인 리조트'를 선언했다.

귀찮기도 하고 '렌터카'도 안 빌려서 그랬다.

잘 모르는 데를 헤매다 '손 들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총 맞는 일 따위도 겪고 싶지 않았다.

(미국은 사형이 금지된 주도 있지만 경찰을 비롯한 사법 대리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무슨 말인지 몰라 번쩍 들지 않으면 총으로 쏴 죽여도 되는, 이상한 나라다. 연쇄살인범보다 손을 안 든 사람이 더 악질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괌은 생각보다 따듯한 관광지였다.



우리는 PIC 리조트에 묵었는데 하루 날 잡아, 순전히 사진을 찍을 목적으로 GPO에서 PIC 리조트까지 걸어갈 동안 중간에 여우비가 내린 거 말고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이 정도면 우리 동네를 걷는 것보다 안전해 보이는데?

마지막 날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가는데 90년대 중학교 영어 수준으로(헬로, 하우와이유, 파인땡큐, 앤쥬우?) 택시기사와 나눈(여성이었다) 대화도 따뜻했다.

어디서 왔냐고 해서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고, 그곳 날씨는 어떠냐고 해서, 아이스 에어포트라고 했더니 괌의 따듯한 기운을 가져가라고,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오오...

이게 소위 말하는 '관광객'이란 신분이었군.


나는 니가 관광객이란 걸 아니까 여기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도록 그 정도 친절은 언제든 베풀 수 있다.

사드 포대가 배치된 미군의 도시, 괌이 이 정도라면 하와이는 얼마나 친절할까?

'인 리조트' 정책을 폐기 처분하고 하와이는 섬 전체를 누리기로 결심했는데 여전히 여행은 어렵다.


경기관광포털 출처.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괌 여행 때 나는 '렌터카'를 안 빌렸지만 그 시점에서는 빌리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국제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하와이에서 렌트를 하기로 했다면 국제 운전면허증을 소지해야 한다.

(운전면허시험장에서만 발급해주던 걸 경찰서에서도 발급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을 탈 건지도 결정해야 한다.

그전에 하와이의 큰 섬 네 개 중 어디, 어디를 다녀올 건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하나의 선택이 다른 두 개, 세 개의 선택을 낳는다.

처음에 우리는 호놀룰루 국제공항이 있는 오아후 섬과 그랜드캐니언이 있는 카우아이 섬을 가려고 했는데 8박 일정도 짧다는 생각에 과감히 카우아이 섬을 포기했다.

제주도를 4회 다닌 경험에 따르면 겨우 8박 일정으로 오아후 섬을 '다 누리'는 건 욕심이었다.

그나마 일정을 반으로 쪼개 북쪽 끝인 노스쇼어에서 3박을 하기로 한 건 괜찮은 선택이었고 렌터카는 그 일정에 맞춰 빌리기로 했다.

와이키키 해변이 있는 남쪽에서는 대중교통 수단인 '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와이키키 지역 호텔들은 호텔 투숙객한테도 주차 비용을 물린다고 해서 비용을 줄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가다 보면 해외여행은 이런 도표가 되지 않을까.


유고슬로비아 출신인 JUG CEROVIC라는 건축가가 만든 서울 지하철 노선도, !NAT 출처.


중요한 건 내가 가고자 하는 데가 어디냐는 거다.

조금이라도 나은 선택을 하려고 책을 읽고 있다.



'파라다이스의 가격'은 소설가 서진이 아내와 함께 두 달 동안 하와이에 머물렀던 시간을 담담하게 서술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서핑보드를 배우겠다는 계획을 수정, 바디보드를 타기로 했다.


아웃도어 뉴스 출처.


저 정도라면 아들과 함께 즐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리고 펠레의 의자에 가보기로 했다.


서진 작가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한페이지 단편소설 출처.


펠레는 브라질 축구선수 말고, 하와이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여신'의 이름이라고 한다.

높이가 2미터쯤 되는데 사진에서처럼 투명한 물속으로 바위가 보여 겁이 난다고.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하와이 출구 전략을 열심히 짜는데 아들이 문화상품권을 타 왔다.



만 원 권.

내기골프에서 이겼다나.

학원 선생님이 상품을 걸었는데 자기가 이겼다고.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갈 때 쓰라고 했는데 친구 아빠가 쏘는 바람에 아끼게 됐고 현찰을 원했던 아들은 결국 아내와 9천 원에 교환했다.


잘 됐네. 이참에 책이나 사지, 뭐.

일전에 봐 둔 하와이 여행 책하고 두어 권 묶어서.

'다나와'에 들어가 제일 싸게 파는 데를 찾았다.

인터넷 책 값은 정가제나 마찬가지다.

어딜 가나 똑같이 10프로 할인된 가격에, 배송비가 있거나 없거나.

'하와이 여행백서'는 2015-2016 버전이 나왔고, '세월호, 그날의 기록'도 잔뜩 깔렸다.

문제는 '대한민국 사진대전 대상작가의 노하우'.



사진 촬영에 관한 책은 많이 빌려봤지만 양재헌 작가처럼 깔끔하게 개념을 정리하고 솔직하게 조언해주는 책은 보지 못했다.

보통은 M모드의 장점을 설명한 뒤 수동으로 찍어야 한다고 권하는 책이 태반인데 양재헌 작가는 디지털카메라의 특성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A모드인 조리개 우선 모드로 찍는 게 더 낫다고.

M모드로 찍어야 하는 필연성을 설명한 이들에겐 꽤 충격적인 발언일 수도 있겠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소장을 결심했는데 젠장, 저거 하나밖에 안 뜨네?



장바구니에 이 책을 비롯한 나머지 두 권을 담고 조지기 시작했다.

문을 닫기 전 건투를 비는 아내가 슬픈 눈빛을 건넸다.

회원 가입하고 '구매'를 눌러 결제로 넘어가려는데 자꾸만 나를 '인증'하라는 웹페이지가 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해 보라는 철학적 요구도 아닌 것이.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인증 번호를 입력하는 작업을 4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나를 '나'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직원은 내가 '미인증' 상태라고 확인시켜줬다.

이유는?

그건 자기도 모른다면서 '메모' 가능하냐고 물은 뒤 그런 문제만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번호를 알려줬다.

그 번호는 통화량이 많다며 연결을 거부했다.

아이핀으로도 인증시켜 봤다.

(하지만 잘난 아이핀도 털린 지 오래다. 헬조선에선 개인정보가 털려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그러다 문득 낯익은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엉? 내가 11번가 회원이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오늘 새로 가입됐지?

오늘 회원으로 가입할 때 '넌 이미 가입돼 있으니 그 아이디로 접속하라'는 안내를 받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원인을 찾아낸 나는 기존 아이디의 비밀번호를 재발급받아(핸드폰으로 나를 인증시키는 똑같은 절차를 밟은 뒤) 새로 로그인했다.

다시 장바구니에 필요한 책들을 담은 뒤 '구매하기'를 눌러 결제를 진행하려는데(아직 컬쳐랜드는 가지도 않았다!)



상품 내용이 바뀌었다고 해서 확인을 누르자, 재고가 없다는 화면으로 둔갑했다.



개삐~ 쥐삐~ 닭삐~ 이런 삐~ 삼킬~ 삐~ 삐~ 삐~

개돼지들은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하다.

아무런 보호도, 도움도 구할 수 없다.

그래도 이건 가상공간에서 안전하게 엿 먹은 경우다.

중고차를 사러 가면 이런 허위 매물에 낚이는 게 '하나의 절차'로 인정돼, 그렇게 안내를 받으며 물건을 둘러본 뒤 그냥 가겠다고 하면 중고차 매매 직원으로 위장한 조폭이 당신을 녹화는 되지만 녹음은 안 되는 곳으로 데려가 웃는 얼굴로 욕을 퍼붓는다고 한다.

당신이 흥분해서 달려들면 직원으로 변장한 조폭이 CCTV 화면을 캡처해 한 번 더 엿 먹인다고.

나는 기존 아이디를 탈퇴'시키'면서 (분명히 전에도 11번가에서 이런 짓을 당해

탈퇴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유를 묻는 칸에 이렇게 적었다.


허위 매물로 낚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새로 가입된 아이디를 탈퇴'시키'면서는 이렇게 적었다.



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한 발자국도 못 갔다.




아내와 함께 꽃개를 데리고 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 먹었다.

날은 다시 더워졌다.

집에 돌아와 열을 식히는 데 아들이 귀가했다.

북한한테 개인정보를 털렸다는(내 정보도 적들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친절한 안내문이 메일함에 꽂혔다) 인터파크에 들어가 책 두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결제창에 문화상품권을 체크하는 칸이 따로 있기를 바랐다.

고객의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그 정도 요구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치였다.

바랄 수 없는 행복, 통일과도 같은 소원이었다.

컬쳐랜드에 들어가 회원 가입했다.



환락가 네온사인처럼 현란한 첫 페이지에서 겨우 문화상품권을 입력하는 곳을 클릭했다.

다시 하라고 하면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화상품권을 충전하는 법도 구글에 물어봤다.

구글은 인터파크가 작성한 웹페이지로 안내해줬다.

나는 인터파크가 작성한 문화상품권 이용법을 보고 컬쳐랜드에서 사용 가능한 '상태'로 충전한 뒤

그들이 제시한 방법에 따라 책을 구매했다.

컬쳐랜드에 사이버머니처럼 입력된 '그것'을 쓰려면 컬쳐랜드 안에서 인터파크로 접속해 물건을 구매해야 했다.

현대카드로 결제하면 책 값의 10퍼센트를 포인트로 결제할 수 있는데 그건 또 인터파크 내부에서 결제할 때만 가능했다.

문화상품권을 들고 인터넷에서 책을 구매하는 과정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창조 경제 좋아하네.


액티브 엑스를 없애라고 지시?

컬쳐랜드에 로그인한 상태에서 인터파크에 있는 책을 사려고 결제를 시도하자 현대카드 측은

자기들이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프로그램을 깔라고 지시했다.

선택권 따위는 없다.

안 깔면 결제도 안 되니까.

그건 좋다.

거기까진, 인정하겠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깔 때마다 나를 웹브라우저 바깥으로 튕겨내 다시 로그인하고 장바구니를 찾아가서 다시 결제 과정을 밟도록 하는 건 뭐냐.

그걸 두 번이나 했다.

프로그램을 두 개나 깔도록 강요해서.

비극을 암시한 아내의 응원을 들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2시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한 끝에 겨우 결제를 마친 나는 알약부터 돌렸다.



프로그램 관리 항목으로 들어가 이날 깔린 쓰레기 보안 프로그램을 지운 뒤(자기들 회사에 결제를 시킬 목적으로 깐 프로그램이지 내 컴퓨터를 보호해줄 목적으로 깐 프로그램이 아니다. 결제는 오래전 마쳤는데 정체불명한 저것들은 기생충처럼 내 드라이브에 깔려있다. 대체 어떤 법적인 근거로?) 청소기를 돌렸더니 9마리나 잡혔다.

악취 가득한 쓰레기 더미에 손을 넣고 뒤적거린 느낌?


내가, 돈을 안 썼나?

내 돈 주고 물건을 사는데도 이렇게 더럽고 구질구질하다.

익스플로러 오른쪽 구석의 도구를 눌러 안전 항목의 검색 기록 삭제를 실행했다.

치석을 제거하듯 내 디지털 자산에 들러붙은 자본의 찌꺼기들을 털어낸 뒤에야 겨우 한숨 돌렸다.



책은 다음 날 오후에 바로 왔다.



인터넷보다 택배가 더 빠른 느낌.


수고 많습니다.

아내는 왜 책을 사지 않느냐고 반문했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적절한 대답이었을까.

하와이가, 한 발 더 다가왔다.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나는 '아내는 해외여행을 좋아한다'는 말엔 약간의 어패가 있다고 했다.

부자도 해외여행을 좋아할까?

1년에 3억 원씩 쓴다는, 전자결제로 장관직에 오른 조 모(자이크) 씨도 해외여행을 좋아해서 아내처럼 익딜, 비딩 사이트를 뒤지고 나처럼 여행 관련 책자를 빌려다 읽고 그럴까?

돈으로 처바르면 되는데 뭐하러?

부자들의 여행을 도표로 나타내면 대구 지하철 노선도 같지 않을까?


출처 : http://traffic.visitkorea.or.kr 한국관광공사일 거란 의심이 든다.


나는 여행이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취향의 문제가 아닌 기회비용에 따른 고민일 가능성이 높다.

가장 좋은 호텔에 투숙하고 가장 좋은 차를 빌려 가장 좋은 레스토랑에서 가장 좋은 메뉴를 먹을 그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 말이다.

양재헌 작가가 집필한 '대상작가의 노하우'는 절판으로 보여 아쉬웠는데 이번 주에 빌린 '디지털 사진의 모든 것'도 양재헌 작가가 번역한 책이었다.



어쩐지 내용이 많이 비슷하더라니!




9월 8일 아침, 윈도 웹브라우저인 익스플로러가 죽었다.

작업관리자로 확인하니 '응답 없음' 상태.

구글의 웹브라우저인 크롬은 쌩쌩 돌아가는데.

구글 검색창에 이유를 물으니 소집된 컴퓨터 전문가들이 플래시 화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Sockwave Flash가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존 프로그램을 지우고 새 프로그램을 깔라는 조언.

그런데 내 디지털 자산은 어찌 된 노릇인지 프로그램을 제어하는 창의 목록에 안 뜨고 제어판 한쪽 귀퉁이에 박혀 있었다.

으음...

익스플로러 제어판에 들어가 Sockwave Flash를 사용 않기로 설정하면 잘 돌아가는 걸로 봐서 그 문제가 확실했다.

대신 네이버나 다음이 제공하는 플래시 화면이 엑(스)박(스)으로 처리돼 안 보였다.

알약을 돌려봐도 해결되지 않아, 컴퓨터 전문가가 추천해준 Malwarebytes Anti-Malware을 깔아 돌렸다.

3마리가 붙들렸다.

제거하고 재부팅한 뒤 익스플로러를 돌리자 원래대로 잘 굴러갔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지?

평소와 똑같이 사용했는데.

내가 오염된 사이트에 방문해 벌어진 일이라면 크롬이 고장 나야 정상인데.

나는 구글 크롬 사용자니까.

윈도 익스플로러는 '결제'가 필요할 때만 쓰는 창인데.

11번가를 방문한 뒤 벌어진 이 사태는, 우연의 일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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