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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CON Mar 02. 2017

정신없는 하와이 여행기 05 하와이 첫날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미치도록 짧다.


2월 15일에 출발해 2월 16일을 태평양 상공에서 맞은 뒤 다시 2월 15일로 돌아온 우리는 아직 하와이의 첫날밤을 맞지 않았다.

우리는 사력을 다해 그 시간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도착 첫날은 '시차 적응'에 할애한 터라 여기서 우리가 무언가를 한다면 하와이에서의 시간을 늘리는 데 일조하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여행은, 전투가 되어간다.

호텔의 가장 곤란한 점은 '아침'이었다.

룸서비스로 시켜먹으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마치 이런 대화와 같다.

마세라티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내가 고백한다.


터틀 베이 리조트에 이 차를 모는 인간이 있었다. 저녁에는 있고, 아침에는 반드시 없었다.


저 차 한 번 타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말한다.


질러, 사면 되잖아.

자본주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비용' 문제를 머릿속에서 영원히 몰아낸 친구들.

'호텔의 가장 곤란한 점은 아침'이라는 문장에서, 곤란하다는 방점은 '아침'에 있는 게 아니라 '비용'에 있다.

부자들은 그런 걱정 안 해도 되고, 그런 걱정 하지도 않는다.

메뉴를 고르는 게 문제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보다 성격도 좋고오래 잘 산다.

짐을 풀고 쉰 뒤 저녁 즈음 월마트에 가자고 한 건 당연한 전략이었다.

힐튼에서 보낼 5박 동안 필요한 장을 보기로 한 것이다.



가족이 쉴 동안 나는 삼각대를 뽑아 빌딩 뷰를 찍었다.



아내와 아들은 힐튼 측이 제공한 와이파이 장벽을 뚫지 못했다.

와이파이 접속 화면은 스타벅스 매장의 와이파이 접속 화면과 비슷했다.


네가 이걸 쓰려면 내가 요구하는 무언가에 동의해야 돼.

다른 점은 옵션이 세 개 이상 있고 어떤 옵션을 누르든 다른 무언가를 입력하라는 창이 뜬다는 거였다.



힐튼 하와이안 빌리지 알리이 타워는 달달하지 않았다.

방은 작고, 가구는 단단하지만 오래된 것들이며, 거울이 달린 세면대는 너무 높았다.

백인들에겐 그 높이가 스탠다드일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불편할 정도로 높았다.

어메니티(호텔에서 추가 비용 안 받고 제공해주는 소모품? 생수나 로션, 비누, 샴푸 따위?)도 *최소한의 것만 제공받는 느낌이었다.

로션의 경우엔 걸레 썩은 냄새가 나는 것도 있었다.

나는 남성 화장품을 구매하면서 받은 작은 용기를 가져와 그걸 썼는데, 아내는 썩은 냄새가 나는 걸 바르다 기겁했다.

금고는 어딜 가나 항상 아들 담당이었다.

욕조가 *있는 건 좋았지만 샤워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어려웠다.

반나절 묵는 호텔에 *라벨링을 요구한 박근혜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욕조에 붙는 기다란 샤워 설비엔 세 개의 조절 장치가 필요하다.

물의 양을 조절하는 레버, 차갑고 뜨거운 정도를 조절하는 레버, 머리 위에서 쏠 지, 손에 쥔 샤워기로 쏠 지, 물을 받는 용도인 수도꼭지로 쏠 지 정하는 레버.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알리이 타워의 경우 C와 H로 표기된, 온도를 조절하는 레버와 물의 양을 조절하는 레버가 하나의 손잡이로 기동하는 듯 보였다.

위로 쏠 지 밑으로 쏠 지를 결정해주는 단추는 어떤 날엔 눌리고, 어떤 날엔 해머로 쳐도 안 눌릴 것처럼 단단했다.

물은 시원하게 솨아 나오는 게 아니라, 봄을 알리는 가랑비처럼 쫄쫄 나왔다.

진짜 미스터리는 배수구에 있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지만 서양인들 욕실 바닥엔 배수구가 없다.

건식이어서 맨발로 다녀도 발바닥이 젖는 일이 없게끔 되어있다. 

샤워를 할 때 커튼을 쳐 밑자락을 욕조 안으로 넣어주는 건 기본.

그렇게 커튼을 치고 샤워 설비와 마주한 나는 욕조 바닥의 배수구가 마음에 걸렸다.

금속으로 된 마개가 배수구에 끼워져 20도에서 30도의 틈으로 벌어져 있었다.

저 조그만 틈으로 물이 빠져나갈 걸 생각하니, 잘 안 나갈 것 같았다.

뽑아버리지 뭐.

물이 잘 안 빠졌다.

내가 처음으로 샤워를 했는데 욕조에 물이 안 빠지는 채로 하고 말았다.

완전히 안 빠지는 건 아니고 한참 막힐 때의 테헤란로처럼 느리게 빠졌다.


뭐지 이건? 안에, 머리카락 같은 게 콱 막힌 건가? 건물이 오래됐다고 하는데 이게 그런 건가?

엘리베이터에 탈 때도 쇠가 긁히는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아들은 전철 들어오는 소리 같다고 했는데 아주 정확한 비유였다.

배관이 낡아 물이 잘 안 빠지는 모양이라는 나의 추론은 완벽히 틀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배수구에 꽂은 금속 마개를 뽑은 게 문제였다.

어떤 원리인 지는 모르겠으나 금속 마개를 끼워 살짝 열어두는 게 오히려 배수가 잘 돼 정상적 이용이 가능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되지도 않는 영어'를 갖고 '물이 잘 안 빠진다'는 둥 프런트에 문의할 뻔했다.

변기도 높았다.

백인들 체형을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깨금발을 하든 엉덩이를 들고 싸든 잘 싸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일 보고 누르는 레버가, 장난이 아니다.


있는 힘껏 눌러야 해!

하와이의 몇몇 손잡이들이 나를 당황하게 했는데 ABC마트에선 냉장고 문이 안 열렸다.

당황해서 방향이 맞나 확인하고, 여닫이가 아니고 미닫이인가? 거듭 확인한 뒤 여는 데도 안 열려!

고장 났나? 직원한테 문의하려는 순간 있는 힘껏 여니까 바위처럼 열리는 문.

이렇게 힘을 쓰도록 만든 이유는, 냉기 보존을 위해?

*비데는 없었다.

우리는 힐튼 호텔이 제공한 산적한 문제를 뒤로 한 채 거리로 나왔다.

알리이 타워에서 '더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도 불편하다.

'ㄴ' 자 형태로 갈 수도 있고 'ㄷ' 자 형태로 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최단 거리로 갔는데 인도가 끊기고 사라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중간에 셀프 주차장 입구도 있고, 호텔 인부들이 짐을 부리는 하차장도 있어 그럴 수 있는 점은 이해하지만 도보를 이용하는 손님이 오가는 인도를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조성한 건 이해되지 않았다.

쇼핑하러 갈 때마다 이용한 길이었기에 더 그랬다.


'더 버스' 정류장은 이것 말고 다른 사인은 없는 경우가 많으니 잘 봐야 한다.


일본 관광객을 위한 버스만 줄기차게 지나갈 뿐 '더 버스'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몇 가지 실수를 깨달았다.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데 낮에 산 쪼리를 *신었고 가방을 안 맸다.

생수를 비롯, 커피와 맥주, 아들이 마실 음료수만 5일 치 살 예정이서 등에 맬 가방이 필수였다.

이 상태로 월마트에 갔다간 죽을지도 몰라.

여행은, 전투다.

매 순간 효율성을 따진다.

마지막 결정타는 차비가 날렸다.

'더 버스' 요금은 어른이 2.5불, 아이가 1.25불이다.

6.25불로 끝나는 게 아니라 *돌아올 차비를 더하면 12.5불이 된다.

그 돈이면 ABC마트에서 아침 한 끼 정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더럽게 안 오는 더 버스월마트를 포기하고 길 건너 ABC마트에 갔다.

이런 식으로 ABC마트 *빠가 되나 봐.

장을 보고, 하와이에서 생산되는 맥주도 샀다.


아내는 롱보드가 가장 좋았다고.


인도가 끊겼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통로를 지나 *전철을 타고 숙소로 귀환, 한숨을 돌릴까 하는데 병따개가 없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 생각났다.

호텔 복도엔 얼음 창고가 있고 와인 오프너도 있다고.

찾았다.

진짜로 아이스박스가 있고 와인 오프너도 있었다.

하지만 병따개는 없었다.

프런트에 문의하니, 직원 말에 따르면 거기에 틀림없이 맥주 오프너도 있다고.

다시 가 보니, 처음엔 못 봤던 그것이 진짜 있었다.



파란색이 아이스박스, 노란색이 와인 코르크를 따는 스크루, 빨간색이 병따개.

벽에 부착된 병따개는 처음 보는 거라 시신경이 무시했던 모양이다.

병 주둥이를 걸어 안 깨지게 조심히 꺾었다.

이런 식으로 말고, 체인 같은 데 매달아두면 안 됐던 걸까?

맥주병 두 개를 그런 식으로 모양 빠지게 딴 뒤 객실로 돌아와 건배.

힐튼과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볼 작정이었다.

'와이파이'는 아내가 치른 값에 포함된 서비스였다.

그걸 해결하려고 두 번은 오르락내리락했다.

로비 직원의 설명은 그렇게 접속된 화면에 패스워드를 입력하면 된다는 거였다.

룸키를 넘겨준 *백인 남성은 '패스워드'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내 핸드폰을 가져가 어떻게 안 되는지 직접 시범 조교했다.

그러자 직원은 능숙하게 손가락을 벌려 화면을 키운 뒤 가운데 옵션을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라고 했다.

아주 간단한 건데 우리가 버벅거린 이유는 가운데 옵션이 '패스워드'가 아닌 '쿠폰'을 입력하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끝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한 가지 고비가 더 남았다.

우리에게 지급된 카드는 총 6장이었다.

룸키가 2장, 타월 교환 카드가 3장, 그리고 DVD 대여 카드가 1장.

나는 DVD 대여 기기 앞에 섰다.

옛날 오락실의 동전 넣는 오락기처럼 생겼다.

아니, 그보다는 현금지급기처럼 생겼다고 해야 할까.

10분5분간 버벅거린 끝에 겨우 빌리는 방법을 이해한 뒤 보고 싶었던 영화를 골랐다.



아내 말에 의하면 하루에 1편'만' 빌릴 수 있다나.

*게임 시디도 있었다.

이제 밤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40인치 TV는 LG 거였고 옆에 설치된 게임 콘솔은 소니 거였다.



DVD 플레이어 겸용이라, 콘솔 위에 붙여놓은 설명서대로 DVD를 투입하고 기다렸다.

TV 화면에 나온 메시지는


노 시그널

DVD 표면을 깨끗이 닦아 다시 넣어봐도 LG TV는 초지일관


노 시그널

DVD의 문제가 아니라 TV가 게임 콘솔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무엇의 문제인지 명확히 하기 위해 내 노트북에 DVD를 넣고 돌려봤다.

플레이가 됐는데 이번엔 지역 장벽에 걸렸다.

저작권 보호를 위한 미국 측의 교활함 탓인지 이러한 종류의 CD는 지역적 코드로 분리되어 있다.

미국 지역 코드가 입혀진 CD는 아시아 코드가 입혀진 플레이어에서 재생이 안 되고, 반대의 경우도 재생이 안 된다.



아내는 포기했고, 나는 내일 힐튼과의 전투를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아들은 와이파이가 뚫렸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단 입장.

우리는 잤다.

쓰나미가 힐튼 라군을 덮쳐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힐튼 기병대가 깨울 때까지.




2월 16일.

9시 40분경, 누가 문을 두드렸다.

미처 반응을 못 하자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재차 문을 두드렸다.

늪 같은 데서 겨우 몸을 빼내 문을 열어보니 메이드였다.

자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다신 안 두드리겠지.

내처 자는데 10시 넘어 또 누가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좀 화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벨맨이 체크아웃 아니냐고 묻다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누가 봐도 체크아웃할 옷차림이 아니니까.

호텔 측이 제공하는 야자수 무늬 가운을 입고 눈이 벌게진 남자가 가긴 어딜 가겠어.

그제야 깨달았다.

문 손잡이에 '방해하지 마세요'를 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내는 캡슐 커피 머신을 *다룰 줄 알았다.

배워보니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용해본 적 없는 사람한텐 어려운 물건일 수도 있겠다.

어제 남겨온 판다 익스프레스와 ABC마트에서 장만한 식료품으로 아침을 때웠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하와이 정벌을 위한 대망의 첫걸음.

로스를 사랑하는 아내를 둔 택시 기사의 말이 맞았다.

환한 햇살이 해변과 그 위에 흩어진 사람들을 바싹 굽고 있었다.









*최소한의 것에 생수가 포함된 건 축복이었다. 터틀 베이 리조트는 생수조차 제공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불편했다.

*있는 ; 터틀 베이 리조트의 경우, 욕조도 없었다.

*라벨링 ; 블랙리스트도 '라벨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박근혜는 국민을 열심히 라벨링한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도 '종북 좌파'라고 라벨링,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시민도 '종북 좌파 빨갱이'라고 라벨링, 탄핵 찬성은 '인민'이라는 라벨링.

*같다 ; 희한한 일이지만 터틀 베이 리조트 변기의 경우엔 우리 집 변기보다 좌석 높이가 낮았다. 세면대 높이는 우리 집과 유사해 쓰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비데 ; 유럽의 호텔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플라스틱 덮개 형태의 비데가 아닌, '변기'랑 똑같이 생긴 비데가 제공된다는 모양이다. 한 변기에서는 일을 보고 한 변기에서는 물이 나와 주요 부위를 닦는다는 모양인데, 착각해서 비데에다 응가를 싸면 꽤 난처한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신었고 ; 쪼리를 신고 장을 보러 다니다간 발가락은 찢어질 것이고, 대퇴부 근육엔 햄스트링이 올라올 거였다.

*돌아올 ; 2시간 이내에 장을 다 보고 버스에 타는 데 성공하면 무료 환승이 가능하겠지만 월마트에 처음 가보는 아내 입장을 고려할 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 수 있었다. ABC마트에서 긁은 총액이 34.99달러였으니 12.5불은 나름 쫀쫀한 액수.

*빠 ; 실제로 그렇게 됐다. 주요한 타이밍엔 늘 ABC마트가 해결책이 됐다.

*전철 ; 알리이 타워 엘리베이터.

*백인 남성 ; 체크인하면서 우리 돈을 떼어먹으려 했던 직원. 그의 정체가 궁금하면 여기

*게임 ; 나중에 아들이 두 편을 빌려서 해봤다. 슈퍼마리오는 제법 했는데 나머지 하나는 꽝.

*다룰 ; 캡슐 커피 머신에 부착된 안내도를 잘 따라가면 된다.

*갈아입고 ;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 차림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도 놀랄 사람 아무도 없다. 터틀 베이 리조트에서는 비키니 차림의 늘씬한 백인 여성이 저녁 9시경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다른 사람'이 더 타도록 '열림' 단추를 눌러주기도 했다. 하와이는 그런 데다.




04 처음 만나는 하와이

05 하와이는 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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