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에서 2월 16일을 지나 다시 2월 15일로.
여행은 이별이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아내는 일주일 전부터 냉장고를 파먹었다.
내가 몸 담고 살았던 곳과도 이별해야 한다.
아내는 이틀 전부터 이삿짐을 쌌다.
8박 9일 일정의 짐을 싸는 일은 전투를 준비하는 것처럼 치열했다.
현지에 도착해 필요한 '그걸' 꺼내려는데 없으면 낭패다.
하와이에서 렌트를 하기로 한 사람은 국제운전면허증을 비롯,
여권의 이름과 같은 철자가 입력된 신용카드를 챙겨 가야 한다.
안 그러면 차도 못 빌리고 운전도 못 한다.
목숨 빼앗길 일은 없지만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신혼여행을 떠났던 부부가 오자마자 이혼을 하는 것도 그런 식의 갈등이 쌓인 끝에 꽝!
여행은 이별이다.
동행할 수 없는 존재와의 이별.
떠나는 날 아침 일찍, 아내는 꽃개 식량부터 챙겼다.
'집안 냄새'를 그리워할까 봐 배게도 챙기고.
치석(을) 제거(해준다는) 과자까지 꼼꼼히 챙겼다.
터틀베이 리조트에서 시청한 미국 TV에서는, 입 냄새를 풍기는 개가 따돌림을 당해 이런 과자가 필요하다는 광고가 나왔다.
*호텔링은 딩고로 낙점했다.
코 앞에 닥친 운명도 모르고 옆구리 긁기에 바쁜 꽃개.
아침부터 명상 중인 *용구.
저 자세로 꽤 오래 있었다.
탄핵 인용 이후 정국을 구상 중?
이별은 관계의 작은 죽음이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호사를 누렸다.
8박 동안 꽃개 똥을 안 치울 생각을 하니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이곳까지 오는 데 아내는 핸드백 끈이 끊어지고, 나는 딩고 사장님이 서비스로 준 까페라떼를 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집이 지척이어서 가지러 갈까도 생각했지만 버스를 놓칠 거란 아내의 만류로 참았다.
공항 가는 길에 마시려고 챙겨 온 건데 마시지 못하는 것도 아깝지만 홀로 남겨진 그것이 집에서 9일 동안 *발효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안 좋았다.
버스가 나 대신 생각을 정리해줬다.
이때만 해도 *용남고속?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짐은 기사가 실어주었고 차비는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헬조선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진에어만 인기 폭발이었다!
열 겹 이상 주름진 줄을 보고 숨이 막혔다.
공항청사 3층에서 와이파이 에그를 빌려온 아내와 교대해 한숨 돌리며 찍은 사진이다.
괌에 갈 때도 당한 일이지만 *한국인은 줄을 너무 바짝 붙어 선다.
부딪쳐도 간격을 안 두고 당연시하는 태도.
이렇게 복잡한 데서는 부딪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듯.
진에어에 짐을 붙인 뒤 우리도 수하물이 되는 절차를 밟았다.
전신 스캔을 받으며 잠재적 폭발물 취급을 당한다.
나는 테러범이 아닙니다.
같은 항변은 씨알도 안 먹히는 세계.
이런 시스템으로도 막지 못하면 미래에는 비행기 한 번 타자고 알몸 검사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비행기에 타는 일이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이 되는 거다.
몸에 삽입 가능한 액체 폭탄이 개발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보안 직원 앞에서 항문을 벌려주어야 할 지도
검색대를 통과한 우리는 면세점 정벌에 나섰다.
내가 사고 싶은 *품목은 없었다.
자동차
스피커
의자,
다 없었다.
공항 면세 제도야말로 일부 명품 브랜드를 위한 차별 정책이 아닐까?
샤넬백이 면세로 구입 가능하다면 내가 노리는 스피커도 면세로 구입 가능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모든 상품이 면세로 판매되는 혜택을 동일하게 누려야 신자유주의자들이 교리처럼 설파하는 공정 경쟁의 실현일 텐데 왜 안 해주는 거지?
왜 맨날 (나한테) 쓸데없는 향수, 선글라스, 가방 같은 것만 파는 거야?
'명품'이란 라벨링은 자본주의 신분제를 흐릿하게 해준다.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그들'이 된 것처럼 뿌듯하지만 착시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마취에서 깨어나면 돈이 좋다는 기억만 남는다.
돈이 많으면 좋은 거니,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긍정하게 된다.
명품은, 부자를 꿈꾸게 하는 라벨링이다.
인천국제공항 면세 구역에 위치한, 쓸데없이 화려한 화장실.
현실은
비참함을 넘어 식인적이다.
여행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의 이별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모든 일들로부터의 이별.
'여행자'라는 신분은 망각이란 여권을 소지하게 해준다.
비행기를 타고
시속 365킬로미터의 속도로 달아나는 거다.
공항 가면 찍게 되는 비행기 사진.
셀카 놀이.
DSLR도 셀카 된다고 입증하려는.
얼굴이 크게 나와서 그렇지.
타는 데가 멀다고 전철을 이용했다.
건물 하나는 으리으리하다.
두 칸 짜리였던가.
전철을 타고 건너간 곳에도 면세 구역이 있고 식당이 있었다.
일단 배부터 채웠다.
맛은?
클리어.
맛은?
클리어.
주문서 접수자 이름이 "밥이답이다".
힙합 작사가가 꿈인가
맛은?
클리어.
맛이 훌륭한 게 아니라 배가 고팠던 탓일 수도.
어둠이 내려앉은 공항에 우리가 탈 비행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오는데 엄청 걸었다. 진에어 이용자들은 조깅 복장으로 와서 뛰어도 좋다
한 번 저기에 오르면 지상에 발을 디딜 때까지 공동운명체가 된다.
자동차는 중간에 내릴 수 있고 배에는 구명정이 있지만 비행기는 얄짤 없다.
무조건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
승무원이 간식을 봉지째 줘도 비행기랑 같이 돌아와야 한다.
중간에, 내릴 수 없다.
저가항공을 꺼리는 사람도 있는데 당연하다.
목숨은 일회용이니까.
진에어는 대한항공 저가항공 브랜드.
하와이까지 거리가 있는 탓인지 비행기가 그래도 *큰 편이었다.
실내에 계단이 있는 비행기에 댈 바는 아니지만 괌으로 가는 비행기보다는 컸다.
대기 장소에서 마지막으로 꽃개와 일별한 뒤
(딩고가 호텔링 개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준다)
탑승.
비행기의 일부가 됐다.
이것은 아들이 찍은 비행기 사진.
인증샷은 이렇게 찍는 거라고.
기내식이 나왔다.
두부 덮밥은 별로였고 아이스크림 케익은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목이 마려우면서 방귀가 계속 나왔다.
소화 불량인지, 너무 잘 돼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가스인지 분간이 안 갔다.
속이 불편한 게 아니고 심장 언저리가 뻐근했다.
아들 핸드폰으로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할 때는 가슴이 답답하게 죄이는 통증이 왔다.
고도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수하물 노릇도 쉽지 않다.
진에어 하와이 노선은 전기 플러그를 꽂는 콘센트가 제공된다.
좌석과 좌석 사이 아래쪽에 있다.
(손으로 더듬어 돼지코가 있는 걸 확인한 뒤 꽂았다)
노란색 화살표는 거기서 전원을 공급받는다는 *인증샷.
파란색 화살표는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이어폰 커넥터를 연결한 모습.
내 노트북은 나보다 확장성이 좋다.
헤드폰 하나에 이어폰 두 개를 연결해 들으니 음량이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비행기도 워낙 시끄럽고.
[남자사용설명서]를 봤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
다 보고 나니 도착까지 1시간 40분밖에 안 남았다고.
하늘 위에서 인터넷이 가능할까?
진에어가 제공하는 와이파이는 이용 가능하다.
노트북으로 진에어 와이파이에 접속해 '기타' 항목을 누르자 비행기의 현재 높이와 *속도, 도착까지 남은 시간이 나왔다.
영화 따위의 콘텐츠도 제공됐는데 유료일까 봐 안 봤다.
유료인지 무료인지 확인하는 것도 귀찮아 안 물어봤다.
이것은?
기내에서 바라본 밤하늘.
아들은 별이 많다며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찍었다.
나도 창가로 가서 봤는데 뭐가 많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경을 안 낀 내 눈이 문제였다.
아들의 스마트폰도 아들이 본 찬란한 별을 담아내지 못했다.
창문을 닫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를 때는 다른 손님을 위해 "열어달라"는 지시가 있었다.
창문을 열고 닫는 데도 일정한 룰이 있는 것 같다.
아내는 잠을 청했지만 실패했다.
나도 거의 안 잤다.
졸리는데 잠이 안 왔다.
잠이 안 오는데 자야 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그나마 갈 때는 괜찮다.
설레서.
힘들어도 버티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믿음에.
항상 문제는 돌아올 때다, 여행의 가장 나쁜 점.
간식이 나왔다.
짜잔.
진에어 하와이 노선 간식 구성은 이렇다.
수도승에게 지급될 법한 메뉴.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바나나가 꿀맛이라고 하던데, 마트에서 사 먹은 바나나보다 못한 맛이었다.
설익어 싱거웠고, 크로와상처럼 생긴 저 빵은 단지 밀가루를 저런 형태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해 '잼'도 없어, 물하고 먹기 힘들었다.
수도승의 마음가짐으로 간식을 먹기 전 시차를 적용했다.
2월 16일 새벽 1시 38분에서
2월 15일 새벽 6시 40분으로.
날짜를 바꿀 때 시간이 걸렸다.
날짜를 더할 수만 있어, 하루를 빼려면 한 달치를 전부 돌려야 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누리는 사치.
저 작은 년놈이 4천 원이다.
수십만 원짜리 상품은 '명품'이랍시고 세금을 감면해 시중보다 싼 가격에 팔면서 사람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상품엔 두 배 마진을 붙여 판매한다.
중간에 더워서 겉옷을 가방에 넣었다.
파란 하늘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취침 중인 손님을 위해 닫으라고 한 것 같다.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구름을 뚫고 내려가자
잔잔한 해수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덩어리.
뒤이어 나타난
하와이 *오아후 섬.
빌딩과 바다 사이의 가느다란 모래톱이 와이키키 해변이다.
파란색 건물은 힐튼 하와이안 빌리지 레인보우 타워.
무한도전이 서핑보드 요가?에 도전했던 라군 뒤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저기.
노란색 건물은 우리가 5박을 할 알리이 타워.
기장이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을 했다.
하와이는 현재 비가 내리며 기온은 24도입니다.
알로하, 하와이.
착륙.
날개 너머로 호놀룰루 국제공항이 보인다.
지옥의 *입국 심사가 기다리는.
*호텔링 ; 누차 말하지만 개를 호텔에 맡긴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아원에 맡긴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고 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호텔링'은 개를 맡기려는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해 업계가 고안한 용어가 아닌가 싶다.
*용구는 딩고 사장님의 반려견이다.
*'잠시만 안녕'을 클릭하면 엠씨더맥스의 라이브 무대를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다.
*발효 ; 징그럽지만 인증샷을 남겼고 공개할 예정이다.^^ 변기에 부어서 버렸는데 생각보다 끔찍했다.
*용남고속 ; 인천공항버스 승차장에서 기사와 욕 배틀을 한 사연은 나중에.^^
*한국인 ; 호놀룰루 국제공항 출국 심사장에서 목격한 한 백인 남성은 앞사람과 1미터를 띄워놓고 있었다. '너의' 냄새조차 맡을 수 없다는 듯.
*품목 ; 스피커 중에는 블루투스가 되는 코딱지만 한 상품이 있긴 했다.
*큰 편 ; 작년 이맘때 괌에 갔을 때도 진에어를 이용했는데 그 비행기보다는 하와이 노선이 무릎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짐짝이 되어 실려가는 고통은 마찬가지.
*인증샷 ; 돼지코를 직접 보여주고 싶었으나 엎드려 찍는 자세를 취해야 해서 생략했다.
*속도 ; 하와이로 갈 때는 편서풍을 타서 빨라지고, 헬조선으로 올 때는 편서풍과 맞서 느려진다.
*오아후 섬 ; 하와이는 크게 네 개의 섬이 있는데 호놀룰루 국제공항과 도심이 있는 섬이 바로 오아후 섬이다. 8박 9일 일정에 여유가 있다는 판단에 다른 섬도 가볼까 했지만 과감히 포기한 이유는 제주도 여행에서 배운 교훈 때문이다. 섬은 방문할 때마다 새롭다. 오아후 섬도 그럴 거란 판단이었고, 우리 예상이 맞았다. 다시 하와이에 가게 되더라도 오아후 섬에 재방문할 것 같다. 놓치고 온 게 너무 많아서!
*입국 심사를 지옥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리고 이 글을 쓴 날을 기점으로 했을 때는 아주 먼훗날의 일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후 처음으로 찾아간 낮은 곳이 인천공항이었다.